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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ef Oct 27. 2024

악몽거래 1

 햄버거를 한 입 물고 고개를 든 나는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검붉게 번득이는 눈깔 말고는 다른 것은 안개에 쌓여 있던 모호한 것이었다. 나를 쏘아보고 있던 그것이 몸을 움직이는 순간, 나는 햄버거를 내던지고 달렸다. 달리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낯선 길, 생전 처음 보는 비쩍 마른 나무들이 음침하게 줄지어 서 있는 도로를 달려 좁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인적이 끊긴 길은 황량한 들판으로 이어져 있었고, 들판을 가로지르자 검고 거친 길이 가파르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 어떤 다른 길이 없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 길을 달려 올라갔다. 마침내 절벽 끝에 도착한 나는 뒤돌아보다 그것과 부딪칠 뻔했다. 그것이 어느 사이 나를 바짝 뒤쫒아 왔던 것이다. 소리도 없었고, 기척도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그것에게 잡힐 순 없었다.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날카롭고 차가운 공기가 귀를 잘라내는 것 같은 지독한 통증과 몸이 푸욱 꺼지는 느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래도 그것에게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행이야, 라고 나는 눈을 감으며 뇌까렸고, 그대로 지반 위로 처박혔다. 내장이 파열되는 것 같은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는데, 천만 배는 더 큰 고통이 뒤따랐다. 그것이, 그것이, 나를 따라 떨어져 내린 그것이 내 등 위로 철푸덕 엎어졌던 것이다.

 으아아악, 으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죽음보다 더한 공포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질렀다.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죽었다면 아무 것도 몰랐을 텐데, 이것이 내 등에 엎어지든, 엎어져 산산조각이 나든 아무 것도 몰랐을 텐데!

 나는 그것을 떼어내려 몸을 비틀며 울부짖었다. 몸부림을 치고 쳐도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슬라임이 내 등짝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뜨거운 숨을 내 귓바퀴에 쏟아 부었다. 참을 수 없는 악취와 함께 끈적이는 이물질이 귓구멍뿐 아니라 모든 숨구멍을 막았다, 그냥 이대로 미쳐버릴 수 있다면! 그저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다면! 죽지도, 미치지도 못하는 내 자신이 서러워 나는 목을 놓아 울었다. 귓속으로 물기가 흘러들었다. 

 그 순간, 엎어져 있는데 왜 귀가 젖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또…… 악몽을 꾸고 있었다. 현실이 자각이 되자 정말 다행이라고 안심하면서도 심장이 폭격을 맞은 양 날뛰었다. 잔뜩 오그린 몸이 돌덩이 같았고, 축축한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눈을 떴다. 캄캄한 어둠이 그것의 아가리처럼 방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나는 발치로 밀려난 이불을 당겨 뒤집어썼다. 입이 심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목구멍은 걸쇠를 걸어놓은 것처럼 잠겨있어 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는 겨우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 내 머릿속 기억들이 기묘하게 비틀려진 것뿐이야. 무작위로 집어낸 기억들이 한데 섞여 반죽되고 길게 길게 늘여 빼다 보니 괴상망칙한 스토리가 전개된 거야. 재주도 좋지. 매번 기발한 공포물을 만들어 내다니. 순정만화는 질렸잖아. 그래서 공포물이? 그렇게 속으로 주절거려가며 내 자신을 달랬지만 그렇다고 진정이 되지는 않았다.

 요 며칠 악몽잔치라도 벌인 것처럼 계속 시달리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줄을 잇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불안감이 증폭되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업무 강도는 높지만 적성에 맞기 때문에 일과 후의 피로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잠시 동안의 여유 시간 뒤에 곧바로 잠들 수 있었는데, 매번 어두컴컴한 공포의 숲으로 빠져들곤 했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심장 박동이 안정되고 뻣뻣하게 굳은 근육도 풀렸다. 나는 일어나 휴대폰을 켰다. 오전 3시 19분. 내일 일을 위해 다시 수면을 취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을 감자마자 다시 그 끔찍한 공포 속으로 들어갈 게 뻔했다. 번번히 그래왔으니까. 

 무릎을 세워 안고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고도 판타스틱한 북극광이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화가인 친구가 캐나다의 옐로나이프에서 감상한 북극광을 화폭에 옮긴 것이었다. 친구의 화실에 들렀다 그림에 매료된 나는 거금을 주고 구입을 했고 내 침대 옆에 걸어놓았다. 어쩌면 이 황홀한 판타지가 나를 잦은 악몽의 길에서 우회전 시켜 편안한 꿈길로 인도해 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기대감으로 끝났다. 아름다운 오로라 물결은 종종 나를 황홀경에 빠뜨렸지만 내 꿈길까지 따라오진 못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아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불러보았다. 내일을 위해 제발 와 달라고. 반듯이 누웠다 옆으로 누워보고, 또 웅크리며 한참을 뒤척거렸지만 하품 한번 나오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여지없이 그것의 희번득 거리던 눈알이 되살아났고, 그것의 육중한 무게에 짓눌리던 느낌이 생생히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놈의 그 끔찍한 숨소리는……. 형체 없는 입술에서 뿜어져 나오던 끈적거리던 숨이 가시벌레처럼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착란에 숨이 막혔다. 연속되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자느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나았다.    

 휴대폰을 열었다. 악몽거래소에 접속했다. 새벽 4시 8분이면 한창 단잠의 롤러브레이드를 탈 시간인데 접속자가 672명이나 되었다. 나처럼 악몽에 시달리느라 잠 못 드는 사람들일까? 이들도 나처럼 수면장애에 관한 온라인 뉴스의 하단에 붙어 있던  320×100사이즈의 ‘악몽거래소’ 배너광고에 눈이 꽂히자마자 주저 없이 클릭하고 회원가입을 했는지 모른다. 아주 작은 위로라도 얻고자.

 거래소 회원들은 게시판에 오만가지 악몽 피로를 하소연했다. 어쩌다 한두 번 꾸는 악몽은 솜털 폴폴 날리는 애교이고, 며칠 동안 연달아 꾸고 나면 잠드는 것 자체가 두렵다고. 그러니까 악몽은 수면이 아니라고. 수면의 혜택 따윈 전혀 없다고. 잠이 들고 렘수면의 단계에 접어들자마자 공포의 투기장으로 던져져 버리는 것이다. 자는 내내 생사의 위험에 직면해 죽어라 달아나고, 미친 듯이 싸우고, 극심한 공포에 떨며 울부짖어봐라. 겨우 눈을 떴지만 이미 맛이 가버린 상태다. 녹초가 되어 있는 건 당연한 거고, 핵주먹으로 천대는 맞은 것처럼 머릿속까지 멍하고, 심리적 상해는 복구가 요원하여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의욕도 꺾여 그냥 하루 망치는 거다. 그냥 수면의 초고속 터널을 타고 외계행성으로 날아가 핵고생을 하고 죽다 깨어나는 것이 악몽이고, 하루에 두 번의 괴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악몽질주자의 삶이라고 말이다. 줄줄이 댓글이 모두 공감 일색이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안 겪어보면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동병상린의 위로를 받고 'my 아수라 일기‘에 500자 내외의 악몽스토리를 올리면 5000원이 지급되었다. 일주일에 2편, 한 달에 8편까지 올릴 수 있고, 현금 이체를 원하지 않으면 거래금액은 마일리지로 적립되었다. 200,000만 마일리지부터는 ‘룰렛 마일리지’를 이용할 수 있는데, 나는 39편의 악몽일지를 쓰는 동안 이체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마일리지만 쌓아놓았다. 

 마일리지를 사용해 룰렛을 돌려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다양했다. 떡볶이와 열린 귀권, 격투기와 뚫린 입권, 비명의 집 방문권, ‘조롱의 문 열어볼권‘ 미친 정의사(정신과 의사)와 놀권, 알 수 없는권, 꺼이꺼이 울권, 희희락락 몽둥이춤권, 낭떠러지로 떨어질권, 죽다 살아나기 체험권…… 등등. 이 이름도 괴상한 서비스가 어떤 형태로 어떻게 전개된다는 설명 없이 우스꽝스러운 공포분위기의 그림 위에 글자만 동동 떠 있었다.

 그러니 룰렛을 돌려 무엇이 나올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게다가 룰렛서비스는 댓글이 금지되었고, sns나 개인 블로그 등에도 체험 기록을 하지 않겠다는 동의를 하고 이용을 하게 되는데, 서약을 어길 시 무차별 폭력과 벌금 6700만원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회원들은 뭔 이런 미친 서비스가 있냐고, 게시판에 항의를 하고 지X을 했지만 답변은 한결 같았다. ‘탈퇴하삼’

 어쨌든 회원들은 이판사판 개사판에 도전해 보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것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서 견디지 못해 룰렛을 돌리는 모양이었다. 게시판 하소연 속에 이런 문구들이 날뛰는 걸 보면 말이다. 

[동그라미 돌렸다가 머리털 나고 악몽스트레스보다 더 겁난 스트레스 겪음.]

[땡그라미가 힘껏 덤비라기에 앗싸 덤벼들었다가 내 자신까지 때려 부술 뻔 했숑.]

[후덜덜덜 악몽 이기기? 직접 해보는 거 강추!]

[졸라게 쫄리고 났더니 악몽이 더 개판됨]

[룰렝은 스트레스 해소기임. 덕분에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음.]

[악몽거래소 신고 요망! 죽다 살아났당.] 

.

.

.

 그러게, 그러게 말이다. 룰렛을 돌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괴상한 선택지 그대로 별별 일을 겪는 걸까? 그것이 악몽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이런 장난을 치는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부딪쳐 보기 전에는 못 알려준다. 이거였다. 궁금하면 해봐. 라고 꼬드기는데, 악몽의 그 무시무시한 공포 속에서 매번 죽다 살아나는 자에게 무엇이 두렵겠냐? 라고 되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악몽의 한 끄트머리라도 때려 부술 수 있다면, 아니, 그냥 완전히 개박살나 악몽의 똥구멍으로라도 빠져나올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냐? 나는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절박한 이유를 갖다 붙였다. 그리곤 후다닥 악몽일지를 작성하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손에 난 땀을 닦고 룰렛 중앙의 [GO!] 누를까, 말까, 백번 쯤 고민하다 눌러버렸다. 룰렛이 천천히 돌다 한 지점에서 멈추는 듯하더니 이내 맹렬히 돌았다. 가장 걸리고 싶지 않은 것을 찾아내려 부러 난리를 치는 것처럼 핑핑 소리까지 내며 돌았다. 심장이 쫄리다 못해 피 한 점 남기지 않고 쥐어짜지는 것 같았다. 괜히 돌렸다는 후회와 거듭된 후회, 후회 속에서 룰렛이 멈추었다.

 글자가 보이기 전 눈을 감아버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날뛰었다. 내가 얼마나 쫌보인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것에 반항하듯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떠 룰렛의 바늘이 똑바로 가리키는 것을 읽었다.

 ‘개개 개박살권’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개박살 나도 상관없다고, 악몽의 똥구멍으로라도 빠져나오고 싶다고 했지만, 아예 진짜 뽀사버리겠다고! 

 이런 장난질에 장단을 맞춘 내가 바보멍청이였다. 괜히 이런데 들어와 가지고 정신만 더 사납게 되고 말았다. 도대체 ‘개개 개박살’이 뭐야? 한번으로도 모자라 열두 번 박살이냐? 하도 어이가 없어 게시판을 샅샅이 뒤졌지만 개박살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그것의 강도가 어떻다는 것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신생 사이트라서 누적 이용자가 많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룰렛을 누르기 직전에 새로 추가된 것일자도 모른다. 룰렛 구경을 여러 번 했지만 이 개뼈다귀 같은 항목은 처음이지 않은가. 

 나는 머리를 싸맸다. 체험 날짜가 이 주일 후의 주말 2시인데, 이걸 승낙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승낙하면 각오해야하는 거고, 취소하면 마일리지가 휙 날아가는 거고. 

 그래. 악몽스트레스나 개박살 스트레스나 거기서 거기라면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자고 내 자신을 억지로 납득시키다 깨달았다. 내가 개박살이 나는 게 아니고, 뭔가를 내가 개박살 내버리는 거라면? 악몽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두려움이 슬그머니 밀려났다. 어쩌면 뭔가를 실컷 때려 부수면서 악몽의 끈을 싹뚝 잘라버리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해소 방편으로 그릇 때려 부수기도 있다잖아. 그래. 그렇다지. 이게 바로 그런 건가 보다. 나는 곧 고무되었고, 승낙을 눌렀다. 

 마침내 나에게도 룰렛 체험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잘하는 짓인지, 잘못 하는 짓인지 확신은 가질 수 없었지만 나는 개박살의 대상이 내가 아닌 그 어떤 것일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 하며 2주일을 보냈다. 마침내 체험 날이 되었고, 개박살의 에너지 보충을 위해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다. 커피를 마시고 손을 비비며 시계를 백 번 쯤 보는 동안 오후 2시가 되었다. 내가 초조히 시계에서 눈을 떼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빼꼼히 문을 연 나는 오홋! 살짝 놀라 손을 입으로 가렸다. 짙은 눈썹에다 매끈한 수트차림의 젊은 남자가 문 앞에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를 따라 나가 그가 문을 열어주는 자동차에 올라탔다. 남자는 유연하게 핸들을 돌려 원룸 골목을 빠져나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지금 개개 개박살장에 가는 거라고. 약 58분쯤 걸리는 곳인데, 정체구간을 만나면 10분 쯤 더 걸릴 거라고.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어도 좋고, 영화를 봐도 좋다고. 그리고 수다도 환영한다고. 운전 경력 9년째이며 속도를 즐기지 않으므로 수다에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그 중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간간이 그가 묻는 말에만 대답을 했는데, 그것도 두 문장 이상은 넘어가지 않았다. 왜냐면 골목을 빠져나가 대로에 진입했을 때 개박살은 내가 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때려 부수는 것이냐? 고 물었는데, 그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룰이 자주 바뀌거든요.”

 어쩌면 내가 처참하게 뽀사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우울한 기분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50% 승률에 배팅을 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나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없이 물어보았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끈질기게 물었다. 물론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아, 정말 고민이 층층이 떡처럼 쌓여갔지만 그만 운전을 멈춰 달라고, 저기 횡단보도 앞에서 내리겠다는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오락가락 생각의 구름다리에서 휘청거리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동차에서 내린 나는 남자를 힐긋 보았다. 이게 뭐예요? 라는 뜻으로. 남자는 늘 봐온 풍경이어서 그런지 전혀 동요의 기색이 없었다. 생뚱맞게 초원으로 데려와 놓고는 말이다. 초원 끝에는 양귀비처럼 붉은 꽃이 흐드러져 있었고, 꽃밭 너머에 신축 건물 세 채가 보였다. 건물 뒤로 물결치듯 이어지는 능선들과 그 산자락 아래 멀찍멀찍이 떨어져 있는 집이 몇 채 있을 뿐, 사람 그림자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풍경이었다. 넓은 풀밭 위에 띄엄띄엄 서 있는 100cm 남짓한 사각 목조물마다 무시무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기괴한 전위예술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남자는 뜨악해 하는 나는 보지도 않고 저 멀리로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저 목조물 옆의 박스 안에 있는 것들을 이용하셔도 되고, 본인의 발과 팔꿈치 그리고 주먹을 사용해도 됩니다. 목조물이 완전히 파손되어도 손해배상은 청구하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저기 저 건물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분들은 누가 춤을 추든 노래를 부르든 전혀 관심 없습니다.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되고, 웃어도 울어도 되고, 욕도 허용된답니다. 다만 목조물을 때렸을 때, 목조물만 와작 부서져 버릴지 아니면 무엇이 튀어 나올지 저는 모릅니다. 막무가내로 덤벼도 괜찮지만 약간은 주의할 필요가 있겠지요?”

 남자의 ‘약간 주의’ 라는 말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초원의 목조물이 오늘의 개박살 대상이라는 사실에는 다소 위로 받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때려 부수면 되는 거였다. 난데없이 튀어 나오는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켜켜이 쌓여 있는 악몽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리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사실을 강조하듯이 남자가 나를 똑바로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자동차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겠습니다. 일을 다 마친 뒤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 물 가져가세요.”

 남자가 500ml 생수 두 병을 건네주고, 까닥 목례를 하곤 자동차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는 덜렁 혼자 남았다. 미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 자동차 안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어느 사이 헤드폰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뒤로 젖힌 운전석에 기대어 있었다. 한 마디로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아주 이판사판 개사판인지, 아니면 황홀 황홀의 찬란한 기회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낯선 경험 앞에 선 것이었다.  

 나는 초원으로 들어갔다. 가을 끝자락으로 들어선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나무와 풀들은 홍조를 잃은 지 꽤 오래 되었다. 걸음을 내딛자 빛바랜 풀이 사삭, 소리를 내며 눕는 소리가 들렸다. 사위어가는 가을의 신음처럼 나지막했고, 움츠린 것들의 비명처럼 짧았다.

 내 처지 또한 납작 눕는 풀과 다르지 않았다. 악몽의 긴 터널 속에 갇혀 오도가지도 못하고 입 안 가득 비명만 가두고 있었다. 치료를 해야 하는 병이지만, 치료가 요원한 악몽스트레스를 불치병처럼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런 나를 위로하는 방편이 오직 목조물과 마주하는 것인 양 걸음을 빨리했다. 두께 1cm 정도의 얇은 MDF판때기로 만든 내 갈비뼈 높이의 목조물은 조잡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허술하지도 않았다. 몸무게 49Kg의 내가 만만히 볼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박스 안에는 야구 배트와 빨래 방망이, 망치와 부지깽이, 도깨비 방망이, 철퇴 등이 들어있었다. 넘버원 박살기들을 전부 다 들어 본 뒤, 그립감이 가장 좋은 빨래방망이를 쥐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아예 드러누웠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보지도 듣지도 않을 테니 네 맘대로 해. 라는 듯이. 그래. 헤드폰 불륨만 최고로 올려놓고 있어라. 나는 남자를 향해 혼잣말을 하곤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목조물을 향해 빨래 방망이를 확 내리쳤다. 결의에 찬 시도였지만 타격은 별 볼일 없었다. 무엇보다도 방망이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야구 배트로 교체했다. 배트를 휘둘러 목조물 옆구리를 가격했다. 따악! 제법 야무진 소리와 함께 목조물에 금이 짝 갔다. 징그러운 야차 그림에 줄이 죽 그어지자 괴물 사냥에 나선 것 같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한번 해보자고 스스로를 격동했다. 초원 복판에서 배트 휘두르는 건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어 스스로에게 조차 민망했지만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어쨌든, 구경꾼이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나는 배트를 휘둘렀다. 열 번쯤 시도한 끝에 목조물이 와자자작 부서져나갔다. 첫 번째 개박살 완성? 그래. 꼴같잖은 두 번째 박살도 이루었다. 세 번째를 지나 네 번째에서는 숨이 차 더는 배트를 다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 더워 경량 패딩을 벗었지만 땀은 그치지 않았고, 물을 한 병 반이나 마셨지만 목이 타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은 가벼웠고 기분도 최고의 레벨로 치솟고 있었다, 따라서 네 번째, 목조물에 무조건 도전할 수밖에. 

 남은 물을 마시고 숨을 골랐다. 얼얼한 손바닥을 비벼 진정을 시킨 후, 다시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목조물을 쳤다. 팡! 이상한 소리가 난다 싶었는데, 콰앙!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목조물이 개박살이 났다. 단 한번에? 기록세우는 거냐고? 그런 개소리를 지껄일 때가 아니었다. 갑자기 복싱글러브가 휙 날아와 내 얼굴을 쳤다. 어디서? 그걸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싸리나무 회초리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나를 후려쳤다. 아니, 이게 뭐야! 항의할 사이도 없이 넓적한 널판지가 튀어 나와 나를 짓이기려들었다. 기가 막히다 못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분노게이지 같은 거 재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배트를 쥐고 덤벼들었다. 부서져 나뒹구는 목조물을 쾅! 쾅! 내리치자 어디선지 날아온 스프링이 팅, 튕겨 올라 나를 마구 두들겨 팼다. 스프링 끝에 달린, 족히 2kg은 되어 보이는 해머가 말이다. 얻어맞다 죽을 것 같았다. 달아나야 했다. 재빨리 몸을 숙이고 발을 떼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연거푸 글러브가 날아오고, 파리채가 날아와 따다닥 뺨을 갈겨대는데, 왜 움직일 수 없냐고!

 나는 목을 찢으며 울부짖었다. 이런 건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어야지. 약간 주의라니! 배트를 휘두르며 날아오는 것들을 최대한 막다 얻어맞고, 휘청 거리다 다시 일어나며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아주 갖가지 것들이 튀어 올라 나를 두들겨 팼다. 패는 것으로도 모자라 뭔 바가지 같은 것이 슝, 날아오더니 내 머리에 덥석 씌워져져서는 쥐어짰다. 머리를 터트려버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나는 미친 듯이 바가지를 잡아 뜯어냈다.

 입에서 쌍욕이 탄도미사일처럼 날아갔다. 한번 욕이 터지자 알고 있던 욕이란 욕이 다 튀어 나왔고, 새로운 욕까지 만들어 쏟아냈다. 얻어맞으며 욕을 퍼붓고 있는 내 꼬라지가 서러웠다. 아니, 내 인생 자체가 서글퍼 견딜 수 없었다. 스트레스를 풀러 와서 죽도록 얻어터질 수 있냐? 고통의 줄다리기가 내 운명이냐?

 개뼉다구 같은 운명이 내 모가지를 조이겠다는 거냐! 그래. 조여라! 조여!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팅 스프링이 튕겨 오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앞으로 엎어졌다. 무릎 뼈에 심한 충격이 가해졌고 얼굴을 그대로 풀밭에 처박아버렸지만 해머에 대가리가 박살나는 것보단 나았다. 무리하게 엎어지면서 바닥에 붙박였던 발이 떨어졌고, 이동이 가능해진 나는 잽싸게 일어나 다시 날아오는 해머를 향해 쌍욕을 퍼부으며 배트를 휘둘렀다. 둔중한 해머는 몇 미터 날아가지 못했지만 스프링이 늘어진 덕분에 제 속도를 내진 못했다. 

 나는 배트를 거머쥐고 외쳤다. 나와! 계속 나오라고! 내가 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글러브와 파리채가 날아들었다. 어? 파리채가 아니라 탁구채였는데, 따악, 야무지게도 내 뺨을 갈기곤 사라져버렸다. 으아아악! 머리통이 통째로 열렸다. 너무 화가 나니까 눈이 불길이 확확 쏟아졌다. 나는 온 몸에 불길을 두른 전사처럼 달려드는 것들을 향해 배트를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것이 연습이 되었는지 제법 타격률이 높아졌고, 넓적한 판때기를 쳐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다. 분분히 날리는 판때기 쪼가리를 뒤집어쓰며 나는 미친년처럼 웃었다.   

 속이 시원해서도 그렇고, 내 작태가 한심해서도 그랬다. 쪼가리나기 직전인 내 인생! 누군가의 발길질 한번이면 깨져버릴 것 같은 불안한 나란 인간! 그래, 그 동안 나를 괴롭히던 놈들이 아니라 내가 문제였어! 저항력을 키울 생각조차 못하고 물렁탱이처럼 살아온 게 문제였다고! 저항할 힘이 없었다면 놈들의 더러운 행태를 보자마자 달아나기라도 했어야지. 곧장 끝내버렸어야지! 발에 쇳덩이 단 것처럼 미적 미적거리다 결국 마음 가득 상처만 남기고 말았잖아. 마음의 상처가 쌓이고 쌓이면 불안을 야기하고 위축을 불러오고 조바심으로 내몰아 결국 하자인생이 되게 하는데, 내가 왜 그 사실을 뼈에 새기지 않았냐고! 모가지 꼿꼿이 세워 독기 뿜을 용기도 없었던 모지리야, 놈들이 하이에나라면 나는 사자가 되었어야지! 

 언제 어느 때나 사자가 될 수 있었다면, 모두 그런 용기로 살아냈다면 짓밟는 놈들의 발목가지를 물어뜯어 아주 아작을 내버렸을 텐데. 다시는 그 따위 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은근슬쩍 속임수로 내 것을 가로채지 못하게 막았을 텐데! 놈들보다 더 길길이 날뛰어 터럭 한 점 건들지 못하게 했을 텐데! 세상이 누군가의 등짝을 후려치며 화풀이를 하고, 누군가의 등골을 빼먹으려 눈을 희번득이는 자들로 가득한 이유가 무엇이겠냐? 그런 놈을 향해 물어뜯을 용기 없이 웅크려 사는 자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어. 아닌 일에는 NO 라고 말할 용기부터 갖춰. 모기만한 소리로라도 아니라고 말해. 당연히 안 들릴 테니까 목을 한번 가다듬고 조금 더 크게 말해! 모기만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보처럼 당하고 있으면 내 자신을 때려. 때리자고. 내 머리를 치고, 내 볼을 주먹으로 쳐. 이렇게 말이야. 나는 내 볼을 주먹으로 쳤다. 머리도 쳤다. 그래. 이렇게라도 하란 말이야! 상대는 네가 바보인줄 알겠지. 대답은 못하면서 자기 자신을 치고 있으니 우습게 여기겠지. 그래도 그렇게 해. 그렇게 내 스스로를 화나게 해서 용기의 불쏘시개를 만들란 말이야!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질렀다. 문제점을 개선할 의지가 박약한 게 태생일 수 있다. 그러나 용기를 세우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스스로에 대한 모욕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방편 삼지 말아야 한다고! 두려움과 마주칠 자세라도 갖추어야 한다. 뒷걸음질 치며 겨우겨우 살아왔다는 건, 결국 나이 값에 따른 배포도 키우지 못했다는 말이잖아! 날아드는 것들이 나의 심약한 면면으로 보였다. 깨부숴야 할 문제였다. 나는 나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나 자신의 무력함을 향해 무자비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제발 바꿔! 바꾸란 말이야! 이 멍청한 물렁깽이야, 짓밟혀 으깨지지 않으려면 갑옷처럼 단단해지라고! 철판을 댄 것처럼 강해지라고! 목구멍이 찢어져 피가 나는 것 같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숨차게 달리던 혈관들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어버린 것처럼 휘청거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악을 쓰고 길길이 뛰다 죽는다한들 아쉽지도 않을 것 같았다. 시궁창 같았던 내 속을 다 토해냈으니 여한도 없었다. 

 그때 코끼리 대가리만한 복싱 글러브가 날아왔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힘껏 배트를 날렸다. 팡, 귀청 터지는 소리와 함께 현수막 같은 게 주르르 펼쳐졌다.


 ‘폭풍 개박살 축하! 

 상품으로 다음 미션이 도착했습니다.

 [쌍으로 미친 쿵푸권, 쿵짝쿵짝 격투권, 초대박 깡다구권, 낭만가득 절벽낙하권, 호러 떡볶이권 중 랜덤 발송]

 파트너 있음.

 시간 엄수해주시기 바랍니다.’     

 선물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는 현수막을 날려버리기 위해 배트를 휘두르다 그대로 너부러져 버렸다. 에너지가 완전 바닥나 버려 손가락 한 개 까닥일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태워버릴 듯 갈증이 몰려왔지만 물은 이미 바닥 난지 오래. 쇠파이프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통증이 몰려왔고 땀이 식자 오한이 덮쳤다. 메마른 입술을 축이지도 못한 채 따다닥 이빨을 부딪치고 있는데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지옥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경고성 축하가 바람을 따라 늴리리 춤을 추고 있었다. 좋아! 좋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불 질러 홀라당 태워버린 가슴 속엔 두려움 따위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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