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좀 더 먹어. 점심도 안 먹었다며.”
명란이가 명주 앞으로 찌개 냄비를 밀어놓는다. 언니가 온다고 하자 생 대구를 사와 시원하게 끓여낸 것이다. 국물이 맑고 삼삼해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에 딱이지만 명주는 몇 번 뜨고 만다.
“그런 인간들은 그렇게 살다 죽게 놔둬야지 어쩌겠어. 도박꾼 손목을 잘라봐라. 그렇다고 그 버릇 버리는 줄 알아. 손목에 갈고리 끼고 또 화투장 만진다고.”
명란이는 덧붙여 말하며 대구 살을 발라 명주의 수저에 올려놓는다. 명주는 수저를 들어 입에 넣는다. 부드러운 생선살을 몇 번 깨물어 목 안으로 넘기고 목청을 돋운다.
“봉식이 거기에 갈고리 끼우면 더 잘 놀아날 걸.”
그 말에 명란이가 깔깔거린다. 수녀원 문지기 같은 우리 언니가 뒷골목 말도 할 줄 안다며. 그 말에 명주는 눈을 흘기며 문지기한테도 입은 있다고 받아친다. 그녀가 숙맥이라서 남편의 망(할)짓거리를 여태 봐 준 건 아니다. 보고 들은 것에 온갖 소스를 쳐서 사방으로 내돌리는 소문, 즉 남의 눈이 무서워서 눌러 참은 것뿐이다.
명주는 TV앞에 나뒹굴고 있는 찌라시를 접어 부채질을 한다. 이 겨울에 누군가 가슴 복판에 활활 타고 있는 화로를 엎어 놓은 것 같다. 명치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확 올라와 얼굴을 지나 정수리까지 치민다. 그 순간, 온 몸의 땀구멍이 분화구처럼 열리고 땀이 송송 솟아난다. 이삼십 분 만에 한 번씩 일정하게 열기가 올라오는 것으로 봐 갱년기에 들어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화가 나면 간격이 빨라진다. 명주는 땀을 닦아내고 찬물을 들이키고는 벽에 기대앉는다.
그런 명주가 안타까워 명란이가 손을 잡는다. 40대 후반의 여자 손 치고는 너무 가냘파서 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잡고 보니 마른 나뭇가지처럼 딱딱하다. 마치 그녀의 건조한 삶처럼.
“언니, 너무 열 받지 마. 남자가 여자 손 좀 만지고 발 좀 만졌다고 해서 뭔 일이 나는 건 아니잖아. 그딴 건 진짜 별 것도 아니야. 만약 그런 게 문제였다면 난 첫날밤에 이혼했다. 신혼여행지 바에서 홍만금 그 인간이 바텐더 손을 이렇게 조물거리며 주문을 했다니까.”
명란이의 말에 명주는 기가차서 웃는다. 아무리 종업원이 예뻐도 그렇지. 새 신부를 옆에 두고 새 신랑이 그랬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덩치 좋고 해죽 해죽 잘 웃던 홍만금은 명란이 친구 오빠였는데, 명란이를 보자마자 죽자고 좆아 다녔다. 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마치 세상이 막을 내리는 것처럼 매달리더니 결혼을 하는 것과 동시에 딴 사람이 되었다. 마누라는 천신만고 끝에 획득한 전리품인 양 집 안에 고이 모셔놓고, 사방의 여자들한테 다리를 걸치고 재미 보는 일로 날을 보내고 새벽을 맞았다. 결국 명란이는 결혼 후 일 년 육 개월, 그러니까 딸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이혼장에 도장을 찍었다.
“누가 치사하게 그깟 스킨쉽 때문에 그런다니? 지가 무슨 대한민국 여성의 대표남이야? 세상의 여자들한테 빚진 거 있냐고? 왜 모든 여자들의 하인 노릇을 못해 안달이야? 안달이!”
“친절의 대 사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그런다며? 그래도 형부는 대의명분이라도 있지. 홍만금 그 인간은 우선 들이대고 보잖아. 어우, 정말 역겨워.”
“대의명분이 울고 가겠다. 홍서방이 김봉식보다 백배는 더 순진한 거야. 아예 드러내놓고 그러는 인간은 적어도 욕먹을 준비는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런데 이놈의 인간은 스리슬쩍 여자들과 비비고는 친절을 베푼 거라고 발뺌을 하니까 더 열 받는 거야!”
“그래도 형부와 안면 있는 여자들이 찾아와 구두도 사 가고 그러잖아. 지난번에도 먼 데서 꾸역꾸역 찾아와 구두 한 켤레 사갔다며.”
“그러게 말이다. 그 덕에 곧 재벌이 될 것 같다.”
명주는 보이지도 않는 봉식을 향해 빈정거린다.
며칠 전, 점심 먹고 들어오는데 여자의 코맹맹이 소리에 놀라 멈추어 섰다.
“앙, 김사장, 그렇게 연락을 끊으면 어떻게 해? 우리의 수호천사께서 어디로 가셨나 하고 얼마나 찾았는데.”
“누님, 연락을 끊다니요. 전 누님들이 안 찾아줘서 얼마나 섭섭하던지요. 그렇게 열심히 봉사를 했는데 뉘 집 하인보듯 생 까셨잖아요…”
검정 페도라를 쓴 여자가 봉식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앙살을 떨고 봉식은 신이 나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명주는 열불이 나 화장실에 가 가슴을 치며 속을 누그러뜨린 다음 다시 매장으로 돌아왔다. 여자는 봉식의 극진한 시중을 받으며 구두를 신어보고 있었다. 그 꼬라지를 보며 명주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어머, 두 분이 닮은 거 같은데, 사장님 이모님이신가요?”
그 말에 단박에 얼굴이 우그러진 여자는 봉식이 수입 그릇점을 할 때 단골이었다고, 김봉식과 네 살 차이 밖에 안 난다고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깊은 주름을 화운데이션으로 메우고 아이라인을 짙게 칠하고 있었지만 여자는 김봉식보다 열 살은 더 먹어보였다. 그런데도 여자가 찾는 것은 대부분 하이힐이었다. 명주는 여자가 가리키는 구두를 가져다 던지듯 툭 내려놓았다. 여자가 김봉식의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김사장, 아르바이트 아줌마 교육 좀 시켜야겠어.”
봉식은 씩 웃을 뿐, 여자에게 명주를 소개하지 않았다. 명주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여자와 짝짝꿍만 맞췄다. 봉식의 서비스 정신이 제대로 발동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친절만이 봉식의 절대카드는 아니다. 여자들이 콧소리로 깎아달라고 떼를 쓰면 응해주는 센스도 있다.
여자는 열 컬 레도 더 신어본 후에 레오파드 웨지힐로 결정을 하고는, 굳이 아울렛 매장인 것을 거론하고, 요즘 백화점은 일 년 내내 세일인데, 40~50%는 기본이라고 봉식의 옆구리를 긁었다. 그러자 봉식은 20% 더 할인 해주라고 명주를 찔렀다. 명주는 김봉식을 향해 있는 대로 눈을 부라리고, 요즘 장사가 안 된다고 징징거리며 가격표대로 다 받아냈다.
“형부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 잘 생긴데다 말 잘 하지, 마당쇠는 저리가라하게 친절하지, 어떤 여자가 안 좋아하겠어?”
“그러게 그런 남자가 왜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다. 세계의 친절남이라는 푯말을 들고 지구 행진을 했어야지.”
명주는 콧방귀를 뀌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창밖의 짙은 어둠을 보며 명주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저런 어둠의 방이 수 없이 쌓여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봉식이 찬사를 늘어놓던 밤이 그녀 안에서는 죽은 방이 되고 있었다.
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덮는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부끄러움을 벗는다. 가면 같은 화장을 지우고, 허물 같은 옷을 벗고, 갈증을 위로하기 위해 서로의 혀를 밀어 넣는 것….이라며 이마빡에 피도 안 말랐을 때부터 김봉식은 연애론을 읊었다. 공원 뒤 으슥한 벤치에 앉아 달빛처럼 보얗던 명주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실행에 옮기느라 밤을 새웠다. 그땐 뭐에 쓰였는지, 마치 안개지역을 횡단하는 기분으로 끌려 다녔다. 그것이 무지였을까? 아니면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것일까?
“형부 태생인가 봐.”
명란의 말에 명주의 눈꼬리가 날카로워진다.
“뭐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좋아하는 거.”
“맞는 말이다. 여자 없이는 한시도 못 살잖냐.”
“언니도 막 볶아?” 명란이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묻는다.
“얘는…. 다 귀찮다. 귀찮아.”
명주는 손사래까지 치며 고개를 흔든다.
“그건 언니 생각이고, 형부 입장에서는 그게 바로 생의 즐거움이잖아.”
“…………”
명주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생각해봐. 여자들이 코맹맹이 소리로 싸장님, 싸장님 이것 좀 어떻게, 저것 좀 어떻게 하며 생긋 생긋 달라붙으면 형부의 의무감이 얼마나 신나게 발동하겠어? 형부의 팬티 속에선 그것이 불뚝 불뚝 일어나 종을 치고 말이야.”
“뭐야?”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명주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다. 김봉식, 그 인간이 친절을 가장하는 변태가 아닐까 하는 걱정을 무수히 했는데, 차마 단정 짓지는 못했다. 그건 김봉식뿐 아니라 양명주의 추태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몽둥이 봉(棒)자를 쓰는 김봉식은 이름부터가 문제다.
봉식은 사랑, 즉 뜨거운 연애가 지구를 돌리는 에너지라고 떠들어 댔다. 60억 인류의 절절한 사랑 때문에 지구는 우주 공간에 떠 있을 수 있으며, 인간들의 애타는 사랑 때문에 공전과 자전을 아무 문제없이 유지한다는 개발네발 쌍개발같은 소리를 씨부려댔다.
그 때문에 자신은 사명감에 싸여 연애의 주체인 여성들을 독려하기 위해 친절을 베풀고, 또 자신도 마음속의 열정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연애적인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때로는 상상을 실현시키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자신은 가정이 있기 때문에 결코 친교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친교의 범위? 그의 되지도 않은 이론에 하품을 하던 인간들이 일제히 되묻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어느 선까지가 그 범위에 해당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연정의 그 안쪽까지는 단순한 친교, 연정이 발동하고 더 나아가 실행의 줄다리기를 타면 위험하다는 상투적인 답변에 모두 심드렁해 했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렇게 자꾸 찡그리니까 이마 주름이 북한강처럼 깊잖아. 얼굴 좀 펴.”
명란이가 넉살을 떨며 명주의 미간을 양옆으로 민다. 명주는 눈을 한번 흡뜨고 소주를 조금 마신다. 소주 맛이 쓰다. 이렇게 쓴데 왜 가끔 이것에 기댈까? 사실 기대는 것이 아니라 쓴 맛끼리 사연을 나누는 것이다.
“이혼이란 게 쉬운 건 아니잖아. 내가 워낙 참을성이 없어서 단칼에 해치우긴 했지만 어떤 땐 정말 잘한 일일까? 라는 얼토당토 않는 반성도 해 본다니까.”
명란이는 언니마저 이혼할까봐 전전긍긍한다. 두 딸이 다 이혼하면 친정 부모님의 충격이 얼마나 클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명란은 사십이 넘도록 재혼하지 않는다. 홍만금에게 받은 쇼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지 재혼이 결정되는 듯 하다가도 막바지에 가서 어그러지곤 한다.
명란이의 걱정이 아니라도 명주는 지금 당장 봉식과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작년에 친척의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의 이혼한 부모가 서로 얼굴도 마주 보지 않은 채 혼주 노릇 하는 걸 보았다. 부, 모의 하객들도 서로를 외면한 채 냉랭히 식을 지켜보는 그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놀라 딸들이 결혼할 때까지는 이혼도 마음대로 못하겠다고 혀를 찼던 것이다.
“언니, 스타일 좀 바꿔보는 건 어때? 형부가 그랬다면서. 언니한텐 변화가 없어서 재미없다고.”
“내가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야? 나도 할 건 다 한다고.”
“알아. 그런데 조신과 얌전을 삶의 척도로 삼은 건 사실이잖아.”
“그게 왜 나빠? 사람이 조신해서 나쁜 게 뭐가 있니?”
“그렇지. 그런데 형부가 그걸 알아주지 않으니까 문제지.”
“남자 입맛에 맞춰 살고 싶지는 않다.”
“맞아. 그러니까 입맛 맞지 않는 형부 때문에 심장에 쥐나지 말고 언니는 언니 나름대로 재미를 찾아봐. 연애라도 하든지”
그 말에 명주가 쓰게 웃는다. 부부가 각자 연애 하는 집안이라니……. 명주는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베란다 창에 달라붙은 어둠의 얼굴이 처연해 보인다. 먹칠로 제 표정을 감추었으나 그 안에 도사린 막막한 우물은 어쩌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명주가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명란이가 명주의 바지허리를 잡아당긴다.
“이런 헐렁한 바지 좀 그만 입고 스커트를 입든지 스키니를 입어라. 그만하면 날씬해서 멋지게 소화할 거잖아.”
“스키니?”
“아주 펄쩍 뛸 줄 알았다. 마흔 아홉 형부는 허벅지가 딱 붙는 청바지를 산다면서.”
“그 인간하고 나하고 같냐?”
“다르지. 형부가 언니보다 스타일리시하지.”
그 말에 명주는 입을 다문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만사가 귀찮아져서 요즘엔 거울도 잘 안 본다. 체중이 불어나는 건 아닌데도 펑퍼짐한 옷이 좋고, 지우는 게 귀찮아 선크림도 안 바른다.
그러나 봉식은 나이가 들수록 더 바지런을 떤다. 현관문 들어서기 바쁘게 피곤하다느니, 스트레스로 사지가 녹고 있다느니 엄살을 떨면서도 욕실에 들어가면 한 시간이다. 세안제로 꼼꼼히 세수를 하고, 주기적으로 각질제거 팩을 하고, 탄력에센스에 보습크림을 듬뿍 바르고 잔다. 아침에는 허여멀겋게 선크림을 바르고, 한 여름에도 말끔하게 다린 긴 팔 와이셔츠를 고집한다.
“그나저나 장사는 잘 되고 있어?”
명란이 두부를 김치에 싸서 명주에게 주며 묻는다. 명란이는 음식 솜씨가 좋아 똑같이 김치를 볶고 두부를 부쳐도 훨씬 더 맛이 난다. 명주는 잘긋잘긋 씹히는 김치와 김치 사이로 스며드는 고소한 두부 맛을 음미하다 입을 연다.
“사장이 딴 데 정신을 파는 데 잘 될 리가 있니. 겨우 겨우 끌고 가는 거지.”
곧 두 아이 새 학기 등록금도 내야 하는데, 장사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란 자는 연애교의 교주답게 딸들의 대학 등록금이 얼마인지 아예 관심도 없다. 명주는 물을 마신 후 길게 눕는다. 허리도 다리도 쑤셔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쇼핑센터 규정 상 판매사원은 의자에 앉을 수 없다. 장부를 기록하거나, 서랍에서 뭘 찾거나 하는 일이 아닌 이상 서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모두 그 점을 염려하지만 한 두 달만 지나면 이력이 붙어 괜찮다는데 명주는 갈수록 버겁다. 두 시간만 지나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고, 다리는 모래주머니를 얹은 것처럼 무겁다.
명주가 다리를 두드리자 명란이는 쿠션을 가져와 그 위에 다리를 올려준다. 피가 내려가는지 시원한 기분이 든다. 명란이는 핫백도 데워다 준다. 뜨거운 핫백을 허리에 대자 욱신욱신 쑤시던 통증이 가라앉는 것 같다.
아이들이 다 크니까 밥 차려줄 걱정은 안 해서 좋지만 그 만큼 외롭기도 하다. 다른 집 딸들은 엄마하고 친구처럼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러 다닌다는데 명주의 딸들은 어찌나 바쁜지 마주 앉아 느긋이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친구들에게 남편 흉을 보고 이런 저런 하소연하기도 싫다. 참다 참다 속이 터질 지경이면 춘천까지 차를 몰고 와 명란이 앞에서 꺽꺽거릴 뿐이다.
“우리 자매도 한때 날렸었는데…”
명란이 턱밑에 손을 괴고 아쉽게 웃는다. 그녀의 말마따나 한때는 명주과 명란이 자매가 지나가면 근방의 총각들이 캥거루처럼 뛰었다. 그런데 ‘눈부신 한때’란 그저 나비의 한철 날갯짓과 같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아주 잠깐일 뿐이다. ‘눈부신 한때’ 후에는 마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마음의 힘을 가꾸고 키울 여력이 없었다. 명주는 아릿해지는 기분을 가라앉히려 침을 깊이 삼킨다.
서울의 겨울은 차고 시리다. 집에서 나온 명주는 잠깐 망설인다. 매장까지 걸어서 이십 여분 거리인데, 요즘 들어 걷는 게 버겁기만 하다.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린 명주는 연말답게 북적거리는 거리를 바라본다. 여느 때보다 더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눈여겨본다. 인터넷 쇼핑이 생활화되면서 오프라인 매장이 직격탄을 받고 있었지만 달리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품목을 바꾸든지 인터넷으로 진출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김봉식과 싸우기 싫어 말도 꺼내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그 인간이 인터넷 판매를 반길 리 없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린 명주는 지하의 푸드코트로 내려가 뜨거운 우동국물로 시린 속을 달래고 일층으로 올라간다.
“부사장님 나오셨습니까?”
하, 김봉식의 깍듯한 인사에 기가 찬 명주는 몸을 휙 돌린다. 그러나 봉식은 여느 날과 달리 앞뒤로 바람을 일으키며 명주의 기분을 끌어올리려고 애를 쓴다.
“당신은 삐졌을 때가 예쁘더라. 새초롬히 내려뜬 눈이 얼마나 살큼한지 어우, 이거 봐. 선다. 서.”
“선 김에 뽑아버리지 그래!”
명주의 내뱉는 말에 봉식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뭐? 당신도 그런 말을 할 줄 알아?”
“왜 못해? 내친 김에 내가 뽑아줘? 여기를 이렇게 쿡 찍어서…”
명주가 구두주걱으로 김봉식의 거기를 콱 찔러버린다. 컥, 기겁을 한 봉식이 허리를 접더니 책상 모서리를 잡고 숨을 몰아쉰다. 생각보다 세게 친 모양이다.
“어제 질질 침 흘린 값이야. 앞으로 그 여자는 내 손님이니까 당신은 얼씬도 하지 마.”
어제 미니스커트와 시시덕거리다 명주에게 들킨 것이다. 명주가 매장으로 들어선 것도 모르고 봉식은 그녀의 다리를 좁은 부츠 안으로 집어넣으려 용을 쓰고 있었고, 여자는 김봉식의 어깨를 잡은 채 몸을 비틀어댔다. 미니스커트가 나가자마자 대판 붙었고, 분을 이기지 못한 명주는 춘천으로 달려가 버린 것이다.
명주는 매상장부를 들여다본다. 매출이 신통치 않다. 그런데 신상과 설명은 화려하다. 명주가 매장에 나오면서 극구 우겨 실행한 것 중 한 가지는 상품 판매 후, 판매한 물품과 고객의 성별과 연령대 등을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귀찮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놓으면 그 고객이 다시 매장에 들렸을 때, 알아보기도 쉽고 교환이나 반품이 들어왔을 때 훨씬 수월하게 응대할 수 있다. 그런데 봉식은 여성 고객들의 신체 사이즈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데 재미를 붙여 어제의 미니스커트를 쭉빵으로 그려 놓았다.
명주가 아니꼬운 눈길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자 봉식이 멋쩍게 웃는다.
“역시 미스터 정은 그림을 잘 그린다니까. 나 그 손님과 한 마디도 안 섞었다는 거 알지?”
그리고는 증명하듯이 손바닥까지 탁탁 턴다.
“이제 미스터 정까지 팔아먹어요? 그 시간에 미스터 정은 식사하러 내려갔잖아요! 듣고 있는 내 귀까지 지저분해지니까 그만 해요.”
명주는 그만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봉식은 쏟아져 나오는 말을 멈추지 못하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당신은 나의 서비스 정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판매자의 서비스는 곧 구매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바뀌는 게 없어. 어디 서비스학교라도 보내든지 해야지. 고객의 니즈를 파악할 줄도 모르고 만날 트집만 잡아대니…….”
거기까지 말하다 명주의 도끼눈에 슬쩍 말꼬리를 흐린다.
“배 안 고파? 저녁 먹으러 안 가면 나 집에 들어갈 테니 당신이 마감해요.”
그렇게 말하며 명주가 가방을 챙기자 봉식이 질겁을 한다.
“뭐야,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 했는데 저녁까지 쫄쫄 굶으라고? 그건 안 되지. 나 밥 느리게 먹는 거 알지? 늦으면 당신이 마감하고 들어가.”
“또? 어디 가려는 건…”
명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봉식은 코트를 집어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매장을 나가버린다. 봉식이 나가자 맞은편 주얼리 매장의 미세스 황이 시급한 보고가 있는 것처럼 쪼르르 달려온다.
“그 미니스커트 오늘 또 왔잖아. 괜히 이거 저거 신어보면서 김사장님 얼을 쏙 빼놓고 갔으니까 잘 감시해.”
명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꽃이 목을 빼고 앉아서 나비를 기다렸지만 요즘 꽃들은 신기술을 차용해 직접 찾아다닌다. 그 여자의 치켜 올라간 눈매로 미루어 보건데, 마음에 드는 남자를 그냥 놔둘 리 없다. 몇 번 건드려 무장해제 시켜놓고 직접 요리해 먹을 스타일이다.
“그 여자 다리 하난 끝내주더라. 그 다리로 남자께나 낚아 먹었을 걸.”
황은 퉁퉁 부어 풍선만 해진 제 다리를 한쪽 발로 비비며 두꺼운 모직바지에 싸인 명주의 다리를 쳐다본다. 명주는 그 눈길을 못 본 척, 틀어져 있는 스웨이드 구두를 바로 놓는다.
“냅둬, 낚아채서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게. 아유, 그래주면 내가 열 번이라도 절을 하겠다.”
명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여 본다.
“오죽 화가 나면 그런 말을 다 하겠니. 내가 네 맘 다 안다.”
황은 그녀 대신 한숨을 내쉬고 혀까지 찬다.
“맞아. 김봉식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지구에서 사라지는 느낌이야. 머리 아파 죽겠어. 아니, 근데 얘가 재고 파악도 안 해놓고!”
명주는 부러 딸깍, 딸깍 소리 나게 마우스를 누르며 바쁜 척을 한다. 황은 모니터를 힐끔 본다. 모니터에 반사된 황의 표정이 밝다. 황은 명퇴를 당해 빈둥거리는 남편이 그래도 꽃밭만 탐하는 김봉식보다 훨씬 낫다는 확신을 그렇게 얻고 있는 것이다.
화장대 앞에 선 명주는 바짝 말라붙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주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다 로션병을 기울여 얼굴에 듬뿍 바른다. 보습크림도 푹 찍어 이마와 볼과 턱에 올려놓고 꼼꼼히 바른다. 선크림은 유효기간이 지나 있어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던진다. 김봉식은 김봉식이고, 양명주는 양명주다. 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혼잣말을 해가며 서랍을 뒤지자 비비크림 샘플이 몇 개 나온다. 한 개를 뜯어 남김없이 다 바른다. 얼굴빛이 보얗다 못해 창백해 보인다. 미스트를 뿌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흡수시킨다. 볼터치를 하고 립스틱을 바른다. 명주는 두꺼운 모직 바지를 던져버리고 스커트를 꺼낸다. 팬티만 입고 거울 앞에 선다. 탄력을 잃은 두 다리가 새의 것처럼 가냘프다.
매장에 나가자 미스터 정이 놀란 눈으로 묻는다.
“사모님 오늘 왜 이렇게 멋지세요?”
변죽이 좋은 편이 아닌데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변화가 크긴 큰 모양이다. 명주는 저도 모르게 우쭐해진다. 명주는 고맙다고 미스터 정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공연히 앞뒤로 왔다 갔다 한다.
화장실에 다녀오는지 손을 비비며 오던 봉식의 눈도 둥그레진다. 명주의 위아래를 훑더니 어디 가냐고, 오늘 본사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미스터정은 누가 교대해주냐고 목소리부터 높인다. 명주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똑떨어지게 말한다.
“가긴 어딜 가요. 꼼짝없이 매장에 붙어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차림이 그래?”
“뭐가요? 미스터 정은 멋지다고 감탄까지 하던데. 하긴 다 늙은 당신의 관심보다야 젊은 총각의 눈길이 훨씬 기분 좋지.”
그렇게 말한 명주는 바람을 일으키며 휙 돌아서다 잡화 매장의 박사장과 눈이 마주친다. 박사장이 웃음 띤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준다. 기대 이상의 관심을 받아 부담스럽지만 명주는 활기차게 매장 안팎을 들락거린다.
일주일 동안의 ‘겨울 빅 세일’이 끝나자 손님이 반으로 줄어든다. 미스터 정은 휴일을 당겨쓰고, 저녁을 먹으러 간 김봉식은 두 시간이 지나도 안 온다. 명주가 카드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남자 고객이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라며 명주가 다가서자, 그녀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고객이 살짝 미소 지으며 여성용 구두 진열대 앞에 선다.
“가죽이 좋군요.”
분위기 있는 저음으로 남자가 말한다.
“네. 품질은 문제가 없을 거예요. 어떤 디자인을 찾으시는지요?”
한참 동안 상품을 둘러보던 그가 양가죽으로 만든 브라운 플랫슈즈와 블랙 앵글부츠를 가리킨다. 명주가 사이즈를 묻는다. 그는 명주와 비슷한 체구라고 말한다.
“이 사이즈가 맞을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체구와 발의 비율은 비슷한데, 제가 이 사이즈를 신거든요.”
명주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주를 본다. 아무래도 직접 신어보는 것과는 다르다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손님이 신기도 전에 신어보는 건 실례라서 명주는 망설인다.
명주는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후, 재빨리 창고에 다녀온다.
“제가 한번 신어볼게요. 맞으면 여기 새로 가지고 온 상품으로 포장해 드릴게요.”
명주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새 구두를 신으려고 허리를 굽힌다. 그는 그녀를 가볍게 저지한 뒤,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으며 말한다.
“크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신겨드려도 될까요?”
“네?” 무슨 말인지 납득이 되지 않아 명주가 되묻는다.
“사장님은 하루 종일 고객들에게 신발을 신겨주시지만, 사장님의 신발은 직접 허리를 굽혀 신어보셔야 하는 것 같아서요.”
“아,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건 제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요.”
명주가 목례로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제가 젊었을 때 작은 제화공장을 물려받았답니다. 그 때 매장도 가지고 있었는데, 매장을 관리하던 분은 손님들이 고른 구두를 정성껏 신겨주고 발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지요. 연세 많으신 분이나 젊은 분이나 모두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발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였는데, 옆에서 보는 저까지 행복했어요. 제화 일이 적성이 맞지 않아 곧 넘기고 말았지만, 그 모습만은 잊히지 않았어요. 어떠십니까? 괜찮으시면 제가 사장님께 신발을 신겨드리고 싶군요.”
“어머,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제가 다시 배우고 마음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시네요. 그런데 고객님께 그런 죄송한 일을 하게 하실 수는 없어요.”
너무 난감한 제안에 명주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지만, 남자는 미소를 띤 얼굴로 명주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한다. 계속 사양하는 건 고객과의 실랑이가 될 것 같아 명주는 마지못해 소파에 앉는다.
남자는 명주의 작은 발을 살그머니 잡고 플랫슈즈 안으로 밀어 넣는다. 한 발, 또 한 발, 마치 솜병아리를 만지듯 부드럽다. 명주는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눈길을 떨군다. 민망하기 짝이 없고 발은 자꾸만 제 궤도를 벗어나려고 해 발가락에 힘을 준다.
“발가락을 움직여보시겠습니까?”
“네?”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으나 명주는 곧 말뜻을 알아차린다. 신발 안에서 발가락이 자유로워야 제대로 된 신발이다. 명주의 발가락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 남자가 슈즈의 앞 코를 가만히 눌러 본다.
“잘 맞는군요. 여동생에게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한번 신어 주시겠습니까? 앵글부츠는 여성의 발목을 강조한 신발이지요. 제 여동생도 퍽 가냘프답니다.”
명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가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가 부츠 안으로 명주의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다. 부드러운 털이 그녀의 발을 삼킨다.
“예쁘군요. 아주 예뻐요.”
감탄을 한 그가 말을 덧붙인다.
“여동생의 생일을 깜박 잊고 있다 구두를 보니 생각이 났습니다. 사장님께서 사이즈를 확인하시려고 허리를 굽히시는 모습에 예전의 그 따뜻한 직원분이 떠올랐고요. 제가 좀 오지랖을 부렸는데,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남자가 목례로 용서를 구한다. 명주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다 하마터면 감동 받았다고 울먹일 뻔했다. 이상한 낌새가 들어 고개를 돌리자 김봉식이 새빨개진 얼굴로 매장 입구에 서 있다. 미세스 황도, 피혁 잡화점 박사장도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할 일을 놓은 채 잔뜩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명주의 얼굴로 피가 몰려들고 부끄러움이 뒷덜미를 적신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저들의 눈이 무슨 상관이랴. 고객과의 입장이 잠깐 바뀐 거뿐인데. 명주는 곧 어깨를 세우고 앵글부츠를 포장한다. 남자에게서 카드를 받아든다. 단말기에 대고 긋자, 끼익끼익 영수증을 토해낸다. 남자가 총총히 매장을 나간다.
“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남자가 나가자마자 봉식이 한걸음에 뛰어들어 눈을 위아래로 휘둥글리며 다그친다. 명주는 기록 장부를 꺼내며 빤빤히 대답한다.
“고객과의 친교.”
“뭐, 뭐야!”
“고객과의 친교가 매출을 올리는 지름길이라며? 더 나아가 뭐라고? 했더라 뭔 시덥잖은 소리도 했는데……”
“아니, 이 여자가……”
“왜 그래? 친교의 범위, 딱 그 선에서 끝냈는데.”
“그게 어 어떻게 고객과의 친교냐고! 스킨쉽이지!.”
“그래? 스킨쉽은 감정이 실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감정이 없다면 단순한 서비스라는 건데, 당신은 그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거야? 아, 당신이 스킨쉽에 몰두했기 때문에 유사한 행동을 모두 스킨쉽으로 싸잡아버리는구나?”
“뭐?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봉식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눈을 부라린다. 잘하면 한 대 칠 기세다. 기가 막히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라서 명주는 한쪽 입 꼬리만 올린 채 봉식을 꼬나본다. 아참. 잊어버리기 전에 기재해야 한다.
명주는 장부를 열어 남자가 사간 앵글부츠의 사이즈와 색상, 가격 등을 기입한다. 기입란 한쪽에 남자의 얼굴을 그리려고 펜을 고쳐 잡았다가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정보라서 그만둔다. 봉식은 명주를 확 밀치고 괜히 서랍을 열었다 닫는다. 첫 번째 서랍이 드르륵 탁, 열렸다 닫힌다. 두 번째 서랍이 드르륵 탁,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면서도 경쾌하게 명주의 귀에 부딪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