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독이라고 불리는 마을 첫 집의 오부녕은 초록대문 집 홍맹기가 눈엣가시였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놈을 처치해버리고 싶도록 꼴불견이었다. 느닷없이 귀농인가 뭔가를 했다고 깝신대는 녀석의 꼬라지도 그렇지만, 겁대가리도 없이 불독의 고명딸이자 한 점 혈육인 문이를 넘보고 있는 거 같아 쌍심지를 돋우고 있는 판이었다.
부녕은 홀로 문이를 키웠다. 문이가 어렸을 때, 아내는 소위 스캔들이라는 걸 일으키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그런 아내를 미워하고 증오하다 모든 여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버린 부녕은 오로지 문이 만을 의지한 채 살아왔다. 문이를 바라보며 갈기갈기 찢어진 가슴을 움켜쥐었으며, 문이가 자라는 것을 보며 아내라는 여자를 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작고 야리야리한 문이는 체신은 엄마를 닮았지만 심지는 부녕처럼 단단하고 야무졌다. 오히려 아비보다 이해심이 깊어 부녕이 외고집을 부리고 때로 지나치게 간섭하고 들 때도 정면에 대고 반박하지 않았다. 시간이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아비의 터무니없는 고집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유아교육전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부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직장을 구한 갸륵한 딸이었다. 이런 문이한테 언 놈이 걸치려 들어!
문이의 나이 서른을 넘자 부녕은 초조하고 안타까웠다. 결혼은 시켜야겠는데, 결혼이라는 그 말이 사뭇 두려웠다. 문이와 떨어져 살 일이 막막했고, 세상에 믿고 맡길만한 놈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부모의 도리로 고액의 회비를 내고 문이를 결혼정보회사에 가입시켰다. 허나 부녕이 내건 사위의 조건은 까다롭기 짝이 없어 커플 매니저는 열성을 다하지 않았다. 규정에 따라 몇 번 맞선 상대자의 신상을 보내왔고, 맞선을 주선했지만 문이 또한 시큰둥해 했다. 부녕 또한 안달복달하다 마는 중에 맹기가 등장했다.
지난 해 삼복염천에 사륜구동 지프가 경적을 울리며 마을로 들어섰다. 지프에는 서른여섯살 총각의 후줄근한 살림살이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른바 맹기의 귀향이었다. 집을 떠난 뒤론 제 부모 생일이나 명절 때 외에는 온 적이 없던 작자가 아니, 때로는 그런 기념일에도 전화 한통으로 끝내고 말던 위인이 작심하고 내려왔단다. 부모의 전답을 활용하여 신세계를 구축하겠다는 말에 마을 사람 모두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맹기는 몇 달이 지나도록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지프는 마당에 처박아 둔 채 시커먼 고무장화를 신고 물찬 논에 들어가 쓰러진 벼를 일으키고,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산비탈에 엉거주춤 달라붙어 고춧대를 묶었다. 때로는 남의 일을 거들며 농사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맹기를 의심 반 긍정 반으로 바라보았지만 부녕의 눈은 나날이 뾰족해졌다. 만약에라도 문이가 맹기와 어찌어찌할까봐 모든 촉수를 세우고 총력을 기울여 감시했다. 문이가 시내에 있는 유치원으로 아이들을 돌보러 갈 때는 눈조리개를 맹기에게로 돌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날건달 같은 녀석이 앞뒤로 설쳐대고 다니는 통에 마을 안팎에서 종일토록 녀석의 꼬라지를 볼 수 있었다.
맹기녀석, 서울에서 회사인사 뭔가를 다니다 영농 창업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라는데, 그건 핑계일 뿐이고 한 건 저지르고 도망쳐 온 건 아닌가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말썽이란 말썽은 도맡아 부렸고, 어느 해 대보름에는 친구 놈들과 거창하게 불놀이를 하다 부녕의 헛간을 홀라당 태워 먹어버렸지 않은가. 그 애비 홍가는 애들 장난에 너무 야박스럽게 군다며 사죄도 하는 둥 마는 둥 보상을 해주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때부터 녀석이나 녀석의 아비 홍가가 꼴도 보기 싫었다.
뒷들의 논에 가던 부녕은 어깨를 출렁이며 앞서 걷고 있는 맹기를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이 딴 녀석에게 문이를 주느니 독신으로 살게 하는 게 낫겠다고 코웃음을 쳤다. 걷는 것조차 듬직하지 못하고 오도 방정을 떨고 있었다. 그런데 부녕의 속엣말을 들었는지 맹기가 대뜸 뒤돌아보고는 얼른 부동자세로 허리를 꺾었다.
“문이 아버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문이도 잘 지내고 있지요?”
“자네가 왜 우리 문이 안부를 묻고 그려?”
부녕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손사래를 치고는 재빨리 맹기를 지나쳐갔다. 미친 놈, 어따 대고 우리 문이 안부를 물어. 부녕은 목울대 저 아래의 가래침까지 끌어올려 퉤, 뱉고는 논둑길로 내려갔다.
그나저나 녀석이 아예 작정을 했는지 농협으로, 농업기술 센터로, 시청으로 뻔질나게 드나들며 기능성종자다, 슈퍼 과일 묘목이다, 농자금 지원이다 하며 마을 사람들 정신까지 쏙 빼놓고 있었다. 게다가 매일 아침이면 중풍 맞은 제 아비 팔을 붙잡고 마을을 한 바퀴씩 돌며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었는데, 어쨌든 녀석이 별 오만 짓을 한다 해도 결코 사윗감은 아니었다. 설사 문이가 맹기한테 들떠 있어도 땅이나 파는 농사꾼한테는 절대로 시집보낼 수 없었다.
부녕은 문이가 농사일을 거드는 것은 물론이고, 손가락에 흙을 찍기만 해도 기겁을 했다. 일손이 필요하면 사람을 부르고 정히 손이 딸리면 일거리를 미루어두었다. 비록 제때 곡식을 거둬들이지 못해 문제가 생긴다 해도 문이 손은 빌리지 않았다. 부녕의 아내, 문이 엄마는 혼약을 해놓고도 시골이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녀가 그럴 때마다 부녕은 아가씨의 투정이려니 여기고 결혼하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문이를 낳고 난 뒤에도, 그녀는 농사짓기 싫다며 시내로 나가살자고 졸랐다. 부녕은 들은 척도 안 하거나 화를 냈고 그녀는 앙탈을 부리고 울었다. 그런 아내를 끌고 밭으로 가면 흙 묻을까봐 엉거주춤 앉아 있거나, 신발에 달라붙은 흙을 똥덩이 떨구듯 흔들어 대다 핑계를 대고 집으로 들어가 소곤소곤 전화질이더니 이웃 마을의 노총각과 야반도주 해버렸다. 물론 시골생활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자식을 놔두고 도망친 것은 아닐 테지만 손톱 밑에 더께처럼 끼어드는 흙이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었다. 벌써 삼십년 전 일이지만 부녕은 여전히 치를 떨었다.
아버지의 속내를 익히 안다는 듯 문이는 부녕 앞에서는 맹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길을 가다 맹기와 마주쳐도 눈인사 정도로 그쳤다. 저녁을 먹고 제 방으로 들어가서도 소근 대며 전화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통화를 할 때는 부러 큰 소리로 떠들었는데, 대부분 유치원생들의 학부모이거나 친구들이었다. 부녕은 한편으로 안심을 하고 한편으로는 문이의 혼사를 서둘렀다. 마을 사람들한테도 선언하듯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문이 올 해 안으로 시집보낼 것이여. 그런데 이 마을 총각은 필요없응께 추천하지들 말고!”
집으로 돌아온 부녕은 문이에게도 분명하게 뜻을 전했다. 문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부녕은 그것이 살짝 불안했다. 문이의 속내가 꽤나 복잡하다고 느낀 부녕은 다시 한번 다짐하듯이 말했다.
“공무원은 어떠냐? 가까운 시청이나 관공서에 괜찮은 인물이 있는지 알아봐야겄다.”
“아직은 ……”
“아직이 뭐여? 서른이 넘었으니 이른 나이는 아니잖여. 손 놓고 있다간 훌쩍 마흔 줄에 다가서고 말 거여. 어쨌든 적당한 상대가 나타나면 뒷걸음질 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선 보도록 혀.”
부녕의 작정한 말에 문이는 더는 대꾸 하지 못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에게 있어 맹기는 초등학교 삼 년 선배였으며, 똑같은 버스를 타고 시내의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통학 멤버였다. 때로는 버스를 기다리며 농담 따먹기를 하던 패거리였으며, “오빠, 어디가?”하며 지나가는 맹기를 불러 세우던 이웃 동생이었다. 어쩌다 보니 서로 잘 알게 되었고, 서로를 잘 알다보니 사랑의 신비라는 게 미처 움트지 못한 사이였다.
마을 안팎으로 돌며 농사준비를 하는 동안 맹기는 문이와 자주 마주쳤다. 붉은 저녁놀에 물든 문이의 얼굴은 예전의 풋풋함 그대로였다. 맹기의 눈길이 민망해진 문이는 맹기의 진흙 더께인 바지를 보고 입 꼬리를 올렸는데, 그 웃음이 새삼스레 맹기의 새파란 청춘을 상기시켰다. 문이의 매력은 살짝이 웃는 모습이라고 열 일 곱, 여덟 때 또래들과 적잖이 시시덕거렸던 것이다. 문이 또한 친구들과 둘러앉아 맹기의 주먹만한 코며 거침없던 말 빨을 두고 깔깔거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오롯한 기억들이 서로의 마음에 붉은 빛으로 번졌고, 부녕의 창끝 같은 눈을 피해 웃음을 참고 말을 삼킬 때마다 천 볼트의 전율이 두 사람의 핏줄을 타고 달렸다.
두 사람의 뜨거운 감정은 화살처럼 부녕의 겨드랑이를 빠져나가 서로에게 닿아 찌르고 스며들었다. 부녕이 온 촉각을 열어놓고 앞뒤로 날뛰었지만 디지털이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었다. 수없이 문이에게 톡을 보내며 맹기는 사랑의 신비는 새로운 것만이 아니라 기존의 기억을 모체 삼아 싹트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맹기와 문이가 소리도 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뜨겁게 살을 비비는 동안 겨울이 지나갔다.
봄이 종종 걸음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포근해지고 있었는데, 맹기에게는 무언의 재촉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반년 동안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무엇을 어떻게 해볼 것인지 고민해왔는데, 삼천여 평의 적은 전답에서 대박을 터트리기 위해서는 수익 구조가 큰 작물 선택이 관건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과 여기저기서 얻어온 자료와 실제 경험 사례와 기술센터의 보급용 책자들을 읽고 머리를 굴려보지만 한 번에 대박 나는 건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맹기는 쓴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 앉았다.
별 볼일 없는 촌구석이 싫어 지방 대학을 졸업하는 것과 동시에 서울로 입성했다. 화려한 외양만큼 뒷골목이 많은 서울은 아무나 받아들였지만, 누구나 중심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중심은커녕, 휘어진 골목도 바위주먹이든 쇠좆이든 뭐든 가진 놈들 차지이고, 그럭저럭한 놈은 십년이고 이십 년이고 그럭저럭한 자리를 뱅뱅 돌 뿐이었다.
그런 구조가 고깝고 열불이 나 다 때려 치고 내려온 건 아니었다. 과장이란 작자의 대박론에 홀린 게 문제였다. 과장은 입만 열었다하면 뭐가 시세보다 헐값이라느니, 어디 어디가 개발지로 떠오를 것이라느니, 지방 땅 값이 약보합세에서 벗어나 일약 약진하고 있다느니…… 등등 오만가지 대박 정보를 들춰 듣는 사람 오줌보를 벌렁거리게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오늘은 어떤 대박론이 펼쳐질까, 귀를 쫑긋거리게 됐고 점심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빼들고 과장의 코앞에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과장은 맹기를 끌고 신사동의 한 빌딩으로 들어갔다. 6층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긴 생머리의 아가씨들이 생긋 웃으며 맞아주었다. 사무실로 안내된 맹기는 의아해하며 금장가죽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도대체 뭐하는 곳이기에 대리석으로 마감한 프런트며 최고급 자재로 치장한 사무실이며~~. 아무래도 미심쩍어 바짝 마음을 다잡았는데, 매끈하게 생긴 과장의 친구가 들어와 이빨을 활짝 드러내며 악수를 청해왔다. 그가 테이블에 용인의 상세 지도를 펴놓았다. 그는 한 곳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보물이 드디어 얼굴을 내밀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맹기의 표정을 살피던 과장은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다며 맞장구쳤다. 먼저 잡는 게 임자고, 일 년도 안 돼 값이 훌쩍 뛸 것이고, 만약에 길이라도 나면 대박 터지는 것이라고 바람을 잡았다. 더는 알아보고 말 것도 없다. 미적 미적거리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기회를 잡으라고 자꾸만 부추켰다. 겨자소스에 버무린 보들보들한 양장피를 우겨 넣으며 부동산업자인 친구보다는 사년 째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을 믿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로부터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맹기는 과장의 멱살을 쥐었다. 정작 과장도 당했다고 이를 갈아붙였지만 짜고 치는 고스톱에 벙찐 연기는 당연한 옵션 아닌가. 그건 번듯한 오피스텔을 장만하려고 모아둔 돈이었다. 어쩌면 신혼집이 될지도 몰라 기를 쓰고 모으고 있었는데, 뻑적지근한 사무실에 앉아 요리 한 접시 얻어먹고는 한 방에 날리고 말았다. 용인의 마지막 보물이라던 곳은 투자가치가 전혀 없는 야산으로, 개발되려면 수세기를 기다려야 할 판이고 가등기 된 땅인데다 과장의 친구라는 작자가 잠적해버려서 소유권 주장도 할 수 없었다. 맹기는 욕을 퍼부으며 과장의 사타구니를 미친듯이 걷어찼다.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피 같은 돈은 돌아오지 않았고 폭행죄로 고소만 당했다.
정나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곧장 내려와 버린 게 문제인지도 모른다. 흙에 대한 공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흙이 생산해 내는 것을 익숙하게 봐왔기 때문인지 어떻게든 수를 낼 거란 생각으로 무작정 내려와 버렸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결정이었는지 요즘에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수가 훤했다면 농촌이 이렇게 텅텅 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모두 농촌을 버려두고 방벽 높은 대도시로 몰려간단 말인가.
문이가 곁에 있어 그나마 견디고 있는데, 만약 부녕이 안다면 게거품을 물고 다 뒤집어 엎어버릴 것이다. 아니다. 부녕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맹기 같은 자에게 애지중지하는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량주에 짱 박아놓은 것도 없고, 닳아빠지게 써먹을 기술도 없고, 통장도 두둑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 맹기는 몹시 우울했다.
아직 밤바람이 차가웠다. 마루 밑의 강아지들이 낑낑거리고 있었다. 맹기는 낡은 이불을 들고 나가 강아지들 잠자리에 한 겹 더 깔아주었다. 밤하늘 늦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별빛의 위로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농협에서 무상으로 영농기계를 대여해 주는 것이고, 고품종 묘목 값들이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봄밤이 소리 없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문이는 잠들지 못했다. 며칠 전에 맞선 본 상대가 뻔질나게 연락을 해오는데, 매번 거절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시계를 본 문이는 망설였다. 열두 시 25분 전. 부녕은 깊이 잠들어 있었고 맹기는 5분 거리에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그녀는 맹기에게 톡을 보냈다. 맹기를 만난다고 무슨 수가 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문이의 톡을 보자마자 맹기는 패딩을 걸치고는 빠른 걸음으로 고샅길을 돌아 나갔다. 문이네 집 앞에 도착해 꽁지발로 건너다보자 문이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왔다. 맹기는 손을 흔들어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렸다. 문이는 입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고 조바심을 친 후 마루를 내려서서 신발을 집어 들었다. 맨발로 가만가만 걸어 나와 대문 옆 채마밭 옆의 담장 위로 올라섰다. 문이가 밖으로 다리를 내밀자 맹기가 안아 내렸다. 두 사람은 고양이 걸음으로 재빨리 집을 벗어났다.
마을은 조용하다 못해 괴괴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오르는 한편 말할 수 없는 흥분이 물감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맹기는 문이의 손을 잡고 집 앞의 구릉으로 올라갔다. 잔디에 앉자마자 문이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우리도 참 한심하다. 그치?”
문이가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인 건 아니고?”
맹기가 딱 붙어 앉으며 대꾸했다.
“이렇게 초라하게 아빠를 속이는 게 퍽도 다행이다.”
자기모멸이 힘든 상황을 지우는 지우개라도 되는 것처럼 문이가 말했다.
“네가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난 어쩌지도 못하고 네 뜻에 따르고 말거야. 언제든지 결정해.”
맹기가 퉁명스레 말했고, 문이는 눈을 흘기며 맹기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맹기는 간지럽다는 듯 큭큭거리며 패딩을 벗어 문이 어깨에 둘러 주었다. 패딩을 당겨 목을 여민 문이가 말했다.
“오빠, 그런 말로 내 마음 흔들지 마. 난 공중 곡예를 하는 기분이라고. 연습 한번 해보지도 않고 외줄을 타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우리 연애가 공중 곡예란 말이지. 아주 위험천만한 스릴이다. 내가 무능해서 너를 공중 곡예나 태우고……”
맹기의 자조에 문이는 입을 다물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한 마디 더했다간 아예 서커스단을 끌어오게 생겼다. 이런 식으로 투닥거리다 결별의 기로에 선 적이 한 두 번이었던가.
맹기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가장 열렬히 맞이한 사람은 아마 문이 자신일 것이다. 문이를 발견한 맹기가 경적소리와 함께 창문을 내리고 씩 웃던 그 순간, 문이는 어이없게도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기다려왔던 것처럼 어금니까지 드러내놓고 마주 웃을 때, 어쩌면 더는 맞선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이가 없어 노처녀 노망이라고 자조하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그 날부터 퇴근길이 그렇게 허전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맞선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을 맹기에게로 떠밀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문이는 고개를 빼고 집을 건너다보았다. 초저녁잠이 많은 부녕은 9시 뉴스가 끝나기도 전에 코를 골곤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부녕의 기척이 있는지 살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양양한 달빛 속에서 집의 윤곽만 목탄으로 그린 듯 단정히 떠올라 있었다.
아빠의 닦달에 떠밀려 맞선자리에 나가기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아무도 모른다. 낯선 얼굴과 마주앉아 의례적인 말을 주고받다 순서에 따라 부모의 근황을 말할 때가 되면 문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둘이 살아왔다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는 불편 때문은 아니었다. 엄마라는 단어에 붙어있는 증오에 찬 아빠의 얼굴이 두렵고, 엄마와 딸’이라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관계가 숨통을 조였다.
흙에 대한 아빠의 강박적인 개념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흙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모든 것에 친밀감을 느꼈다. 이른 아침이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짙푸른 들녘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출근길이라는 것도 잊고 운전을 멈추고 들녘을 바라보며 어떤 위안을 얻고는 했다. 흙의 그 부드러운 감촉, 그것은 좋다는 단순한 감정만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나도 흙의 일부라는 것을 일깨워주곤 했다. 그러나 그녀가 흙에 발을 대는 순간, 아빠가 질겁을 하는 통에 마음 놓고 다가가지도 못했다. 농사일만 힘든 게 아니었다. 유치원 원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몹시 지치고 고달픈 일이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은 만만한 게 없는 법인데, 아빠는 결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안정적인 미래를 보여주면 아버지도 조금 더 마음을 여시겠지. 내가 더욱 분투해야지. 그러니 걱정에 싸여 있지 좀 마.”
맹기가 문이를 그러안으며 말했다. 맹기의 뜨겁고 큰 손은 문이의 좁은 등짝을 덮고도 남았다.
“너무 힘들어. 아빠가 계속 고집을 부리시면 난 그냥 이대로 살 거야.”
“그냥 이대로? 그게 참……”
문이의 말에 맹기는 딱히 반박 하지 못했다. 부녕의 쇠고집이 엔간해야 찔러라도 보고 비틀어라도 보겠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하니…… 흐유.
맹기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줄도 모르고 문이는 말을 이었다.
“난 아빠 못 이겨. 한번도 아빠 말을 거역해 본 적이 없어서 엄두도 나지 않아.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
“그래. 그래. 아예 여기다 굴이나 파자. 춥고 비 오는 날에도 아무 걱정 없이 들어앉아 있게. 야, 야, 새로운 스타일의 신혼 방 같겠다.”
“뭐? 땅굴이 신혼집? 오빠!”
문이가 사납게 눈을 흘기자 맹기는 웃으며 “두 채 지을까?”라며 한 술 더 떴다. “뭐야! 또 장난, 또 장난이나 치고” 라며 문이가 맹기의 옆구리를 꼬집어대자, 맹기는 킬킬 웃으며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봄이 활짝 날개를 펴자 마을도 부산해졌다. 딸기 하우스마다 옆구리를 걷어 올렸고 모두 붉게 익은 딸기를 따느라 바빴고, 강아지까지 밭으로 달려가 흙을 고르고 풀을 뽑고 모판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맹기는 집 앞의 800여 평의 밭에 생산주기가 짧은데다 연중 생산이 가능한 레디쉬를 파종했고, 쌈 싸먹기도 좋고 샐러드로도 각광받는 로메인과 치커리와 루꼴라와 케일 등도 심었다. 마을 뒤의 논에서는 쌀알이 크고 밥맛이 좋은 신동진과 쌀알이 고르고 흰 백옥 찹쌀과 기능성 쌀인 토종 야생 벼로 키가 큰 적토미와 가바 쌀의 한 종자인 금탑 모종이 자라고 있었다. 농사 첫 해인 만큼 수익보다는 재배 품목들의 특성과 수익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심은 것이었다.
그 동안 농촌진흥청 문턱이 닳아지게 드나들며 연구원들의 어깨 너머로 배우고, 줄창나게 도서관을 들랑거리며 책을 파고, 마을 사람들 틈에 끼어 한 마디라도 얻어 듣고 메모하고 흙속으로 뛰어들어 몸으로 체득하려고 애를 썼는데, 보유한 땅이 너무 적었다. 3000여 평으로는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고민하던 맹기는 모정 옆의 미나리꽝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만해도 봄이면 미나리가 무성했고, 겨울엔 썰매장으로 그만이었는데 점점 물이 말라붙더니 풀숲이 되고 만 곳이었다. 풀이 사람 키를 넘는다 해도 개간만 하면 쓸 만할 것 같은데 문제는 임대료였다.
맹기는 땅 임자인 대나무집 황노인을 찾아가 사정했다. 노인은 버려진 땅을 개간해 주겠다는데도 임대료를 깎아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황노인이 버스에서 내리다 넘어져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맹기는 매일 병문안을 갔고 심부름을 해주고 산책을 시켜주면서도 임대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맹기가 임대 때문에 정성을 들이고 있지만 아픈 사람 심기를 거스를까봐 입 다물고 있다는 걸 황노인도 잘 알았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황노인은 거저나 다름없이 미나리꽝을 임대해주었다.
가슴 한 쪽이 열린 것 같은 시원한 기분 속에서 맹기는 농기계를 동원하여 미나리꽝의 풀을 베어내고 포크레인으로 흙을 뒤집어엎고 골랐다. 기술센터 직원의 충고대로 당도가 높고 육질이 단단한 대추방울토마토를 심을 작정이었다. 토마토 외에도 특수작물 몇 가지를 시험재배해 볼 계획도 세웠다.
마침내 땅고르기를 마치고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는 날이었다. 맹기는 서둘러 인부들과 함께 자재를 옮기고 미리 표시해 놓은 설치 장소에 인발 파이프를 박고, 그 위에 곡선 파이프를 연결했다. 파이프가 구형을 이루어 도열하자 맹기의 심장이 뛰었다. 그것은 원대한 계획의 뼈대였다. 서른여섯의 새로운 전진기지를 세운 것 같아 뿌듯해 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 그렇게 높이 세우면 답답해서 어쩌란 거여!”
부녕이었다. 언제 나타나서 얼마나 쳐다보고 있었는지 눈자위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온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맹기는 넙죽 인사부터 올렸다.
“안녕하세요. 여기다 대추방울토마토를 심을 건데요, 키가 좀 커서 이 정도 높이는 되어야 한대서요.”
“그건 자네 사정이고. 모정을 가로막을 작정을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여. 바람이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힐 텐데, 그러면 여그 사람들이 숨이나 쉬겄어? 모정에 쉬러 왔다 숨 막혀 나자빠지라는 거여 뭐여! 자네 제 정신이 아니고만!”
부녕의 닦달에 맹기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만 비비고 있을 때 이장이 왔다.
“아, 그 대신 겨울에는 따습잖여.”
파이프를 흔들어 단단히 박혔는지 확인해 보며 이장이 말했다.
“뭐여?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여? 누가 추운 겨울에 모정에 와서 덜덜 떨고 지랄을 떤다는 거여?”
부녕이 시뻘개진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그냥 냅둬. 젊은 사람이 뭔가 시도해 본다는데 응원해줘야지 잔소리만 하면 어쩌자는 거여. 이걸 다 뽑아다 자네네 밭에다 설치해 주려는 의도였다면 몰라도.”
이장의 말에 부녕은 폭발 직전이었고, 다급해진 건 맹기였다.
“아, 죄송합니다. 좀 낮춰서 지을 걸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하우스를 공개할 테니 토마토도 따 드시고, 한쪽에다 뭐도 좀 심어 실험도 해보시고 또 조언도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호오, 농사 초보가 토마토 한 대접 내놓고 공개적으로다 조언을 구하겠다 이거잖여. 부녕이 어뗘? 타협할 만 하잖여?”
이장이 맹기의 등을 치며 떠들어대자 인부들까지 웃고 부녕은 세모눈으로 침을 탁, 뱉고는 휘적휘적 가버렸다.
그 뒤로 부녕은 틈만 나면 맹기를 걸고 넘어졌다. 그러나 이장은 맹기의 서포트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고, 또 맹기의 변죽도 만만치 않아 부녕의 심사는 꼬일 대로 꼬여갔다.
모정 옆 하우스 안의 대추방울 토마토는 무럭무럭 자랐다. 밥티처럼 작은 열매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 길쭉한 모양새를 잡더니 붉게 익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맹기네 하우스를 들랑거리며 대추방울토마토에 맛을 들였고, 내년에 시도해 볼 것인지 말 것인지로 고민을 했다. 사람들 몇이 모여 판로를 놓고 이런 저런 말을 나눌 때였다. 이장이 부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이 부녕이, 문이 신랑감으로 맹기 어뗘? 맹기 저것이 생각보다 야무지더…”
이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녕이 벌컥 화를 냈다.
“뭐여? 우리 문이를 아무데나 줘버리란 말이여?”
부녕이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싶어 이장이 턱을 치켜들었다.
“어째서 맹기가 아무데나여? 청년 창업자지. 영농창업자도 모르남? 그거 앞으로 전도가 유망한 직종이여. 지난번 농업 비즈니스 회의 때도 거론이 되었는디 이제 농사도 기술이고 브랜드라 이 말이여. 여그 방울토마토를 홍맹기 달달토마토라고 브랜드화 할 거란 말이여. 작물이든 상품이든 브랜드화 하는 게 바로 창업이지 뭐여.”
“창업이고 나발이고 간에 어쨌든 농사꾼 놈한테는 문이 못 줘.”
“촌스럽게 농사꾼이 뭐여? 영농 비지니스 맨. 영농 비지니스 맨이 얼마나 유망한 직종인디. 자네 혼자서는 전답도 다 못 꾸려가고 있는디, 맹기랑 같이 하면 누이 좋고, 아니지. 장인 좋고 사위 좋고 좀 좋아? 딸을 결혼시키자마자 아들을 얻는 초대박이 터지는구만. 안 그려?”
이장의 일장연설에 부녕의 눈이 시뻘개졌다. 부녕은 두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맹기가 그렇게 좋으면 지금이라도 딸 낳아서 결혼시키랑게!”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부녕은 곧바로 커플 매니저에게 전화를 넣어 번갯불에 콩이라도 구울 듯 재촉했다. 매니저는 바로 리스트를 보냈고, 보낸 리스트 안에 부녕의 마음에 딱 드는 총각이 있었다. 부녕은 안달을 하며 문이를 맞선자리에 내보냈는데, 그가 문이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문이는 펄쩍 뛰며 싫다고 했지만 부녕은 사귀어보면 생각이 바뀔 거라며 설득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사윗감을 집으로 초대했다.
부녕의 사윗감이 동정 마을에 나타난 것은 햇살이 유난하던 날이었다. 오르막길을 올라온 신형 아반떼가 마을 앞에서 멈추어 섰고,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삽 십 대 중반의 청년이 내렸다. 그는 쏟아지는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잔뜩 찌푸리고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때 마침 맹기가 지나가고 있었고, 청년은 맹기를 불러 세우고는 오문이씨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맹기가 청년의 위아래를 훑으며 물었다.
“우리 문이는 왜요?”
마뜩찮아 하는 맹기의 말에 청년이 머쓱해하며 다시 물었다.
“아, 문이씨 오빠입니까? 외동딸이라고 하던데 오빠가 있었나 보군요?”
“오빠라고요? 내가요? 아니요. 문이 애인인데요?”
맹기의 말에 청년의 표정이 싹 변했다. 맹기가 실실 웃으며 농담이라고 했지만 청년은 송곳 같은 눈으로 맹기를 노려보았다. 슬그머니 부아가 난 맹기는 한 마디 더 얹었다.
“사실은 말이에요, 우린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사이였어요.”
그 말에 얼굴이 새파래진 청년은 곧바로 차에 올라타더니 거칠게 유턴을 하고는 시내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리고 일 분도 되지 않아 부녕이 게거품을 물고 나타났다.
“야이, X가지 없는 놈아. 네 놈이 어떻게 우리 문이 애인이여? 애인이!”
“죄송합니다. 장난으로 그런 건데, 그 친구가 좀 예민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뭣이여? 장난이라고? 남의 혼삿길을 막아놓고 장난이라고 둘러댄단 말이여!” 부녕이 바위 같은 주먹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부녕의 주먹맛은 유명한데, 한 대만으로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빨 몇 대는 우습게 날아갔다. 부녕의 주먹이 현란하게 위아래로 춤을 추자 혼비백산한 맹기는 냅다 줄행랑을 놓았다. 껑충거리며 뛰는 맹기의 등짝에 부녕의 악다구니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잡아 죽이기 전에는 분이 안 풀릴 놈이여! 야 이놈아! 내 앞에서 얼쩡거렸다간 살아나지 못할 줄 알어!”
바락바락 악을 쓰던 부녕은 그 길로 맹기네 집으로 쫒아가 절대로 이 집과 혼사 맺을 일은 없을 테니 그리 알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날 이후로 길에서 맹기를 만나면 뿌득 뿌득 이를 갈고, 심사가 뒤틀리는 날에는 서슴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는 통에 마을까지 통째로 뒤집어졌다. 곧잘 말리던 사람들도 이제는 진력이 나 더는 상관하려 들지 않았다.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고 햇살의 기세가 하루가 다르게 등등해지고 있었다. 세계 자유무역협정으로 수입 작물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수입산은 값으로 선방을 쳤다. 심지어는 농사꾼마저 수입산을 집어 들고 그 저렴한 값에 탄복을 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흙의 정직성과 뼈가 녹는 노고를 훼방한다 하더라도 핏대만으로는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백 살 먹은 노인도 알았다. 두 세 명만 모여도 머리를 맞대고 타개책을 모색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한숨 속에서도 들녘은 눈물나게 푸르렀고, 잘 자란 벼들은 벌써 이삭을 올리고 바람을 따라 쏴르르 쓸려갔다 쓸려왔다.
맹기는 텃밭에 문이가 좋아하는 참외를 몇 주 심었다. 딸기도 심고 블루베리 성목도 심어 열매가 한창인데, 한 번씩 따다 주려면 첩보작전이 필요했다. 저녁이 되자 참외 냄새가 더욱 진해졌고,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일으켰다. 맹기는 참외 몇 개를 따놓고 문이에게 톡을 보냈다. 아홉 시 삼 십 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라 부녕이 깊은 잠에 빠져들지 않았을까 싶어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한밤중에 참외를 먹일 수도 없었다.
맹기의 톡을 본 문이는 당장에 오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두 사람은 소리죽여 고샅을 돌아나갔다. 비닐하우스로 들어가려다 문이의 폐소공포증이 떠올라 모정 뒤의 으슥한 곳으로 갔다. 어둠이 깊이 둘레를 쳐 몇 발짝 거리에서도 못 알아 볼 장소였다. 맹기는 주머니에서 접이칼을 꺼내 참외를 깎았다. 문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속살 하얀 참외를 받아 덥석 물어 아작아작 깨물어 먹는 그녀의 어디에도 부녕의 모습은 없었다. 맹기는 가만히 문이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문이는 맹기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참외 한 개를 다 먹었다.
두 사람이 가만가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소리 없이 그림자가 스며들었고, 어떤 기척에 고개를 든 맹기의 눈에 잘 벼린 낫날이 들어왔다. 날이 반 뼘이나 될까한 버들낫이었지만 쇠붙이의 날카로움은 어둠을 확 베고도 남았다. 화들짝 놀라 튕겨 일어난 맹기는 그대로 내달렸다. 부녕은 소리를 지르며 맹기를 좆아 갔고, 깜짝 놀란 문이가 허겁지겁 따라 달리며 부녕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거기 서! 야 이놈아, 거기 서란 말이여! 아주 목을 따버릴 테니께!”
부녕이 부드득 이를 갈며 맹기를 좆았다. 맹기는 이웃 마을까지 달려갔다. 부녕은 쌍욕을 퍼부으며 쫒아갔다. 이웃 마을을 돌아 다시 동정 마을로 돌아온 맹기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부녕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었다.
오늘 아주 끝장을 낼 모양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은 맞붙어 피 터져야 할 판인데, 지금이 그 때인지도 모른다고 맹기는 생각했다. 하지만 전세는 맹기에게 백번 불리했다. 무엇보다도 맹기는 부녕과 맞장을 뜰 군번은 아니었다. 부녕이 낫을 휘두르고 맹기가 정당방어로 발차기를 시전하는 것도 그랬다. 만약 맹기의 발이 부녕의 사타구니나 젖가슴이라도 건드렸다간 천하의 싸가지 없는 놈이 될 터였다. 그렇다고 죄송하다며 머리 조아리고 빌면 부녕의 성질에 낫 춤을 출 게 분명했다. 낫 춤을 추다 만약 맹기의 어깨 힘줄이라도 찢어져 응급실로 내달린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한 팔을 못 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이후 부녕과의 관계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36계를 다 동원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을 앞 논둑을 몇 바퀴나 돌며 머리를 쥐어짰지만, 걍 통발에 갇힌 미꾸라지 꼴이었다. 일단, 맹기는 바지춤을 똥구멍까지 추켜올린 후 마을을 향해 외쳤다.
“으악! 으아악!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으아아아! 사, 사람 살려요!”
“오빠! 오빠!”
당장에 문이가 기겁을 했다. 그러자 부녕은 더욱 열을 받았고, 게거품을 무는 것으로도 모자랐고, 눈을 뒤집어까며 쌍욕을 쏘아댔다.
“야이, 싹퉁바리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놈아! 이 지랄 맞은 놈아! 죽여 달라고 꽥꽥 거리는 거냐! 이 개밥통에 나자빠진 자식아, 거기 서! 거기 서란 말이다! 단번에 목을 꿰버릴테니께에!”
부녕이 고함을 질렀고, 그 바톤을 이어받듯 맹기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요! 살려줘요! 낫 들고 쫒아오고 있어요! 빨리요! 빨리 나오세요! 사람 살려요!”
목숨이 촌각에 달린 듯, 매우 위급한 목소리에 집집마다 문이 벌컥벌컥 열렸다. 겉옷을 입는 둥 마는 둥, 신발을 꿰는 둥 마는 둥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은 한 밤의 살벌한 추격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객이 몰려들어 더 기운이 나는 것인지, 화가 솟아 꼭대기를 넘어버린 것인지, 부녕은 악을 쓰며 욕을 퍼부어댔다.
“야이 자식아! 사람 모아놓으면 수가 생길 줄 알았더냐! 이 자식이 대가리 굴리고 지랄을 하네. 이리 와! 이리 오란 말이여! 주둥이부터 짝 찢어부릴랑게.”
마을 앞 논둑길을 뱅뱅 돌아 달리며 맹기가 외쳤다.
“야밤에 낫 들고 뛰는 퍼포먼스부터 찍으시고요! 여차해서 낫으로 찍으면 실시간 중계 부탁드립니다!”
맹기의 이기죽거림에 부녕은 정신이라는 것 자체를 패대기쳐버렸다.
“이런 개 쓸개만도 못한 자식아!! 거기 서! 네 놈 낯짝이 중계고 지랄이고 분간할 겨를도 없이 찍어버릴랑게. 거기 서란 말이닷!
부녕은 낫자루를 휘두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부녕이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여!”
“미쳤네. 미쳤어!”
“그러다 일내면 어떻게 하려고 시방 그러는 거여!
이장뿐 아니라 모두 발을 굴렀지만 막상 다가서지는 못했다. 부녕이 홧김에 낫을 휘둘러버린다면 적어도 대가리든 모가지든 찍혀나가거나 짝 찢어져버릴 테니까.
“신고해야하는 거 아녀?”
탱자나무집 양판식이 가래침을 퉤, 뱉어내며 말했다.
“내가 당장 신고 할겨!”
맹기의 오촌 당숙인 홍상기가 버럭 소리치며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아, 안돼요! 당숙, 신고는 하지 마요! 신고하면 안, 안돼요!…… 경찰은 부르지 마…시고, 차라리…….”
맹기의 끝말을 부녕이 넙죽 받아쳤다.
“차라리 네 놈이 죽어야지! 그려! 긍게, 일루와! 뱅뱅 바퀴만 돌리지 말고 이리 오란 말이여!”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본다고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일단 쌈부터 말려야 한다며 이장이 부녕의 꼬리에 붙어 뛰자 양판식도 따라 뛰었다. 오밤중에 아주 줄줄이 뜀박질 시합이 벌어졌다.
“부녕이 그만 좀 혀! 그만 좀 하랑게!”
“그려. 좋게 좋게 말로 하란 말이여!”
“그렇겐 못혀! 이 자식이 죽든 내가 죽든 해야 끝날 일잉게 간섭하지들 말고 쳐들어가랑게!”
모두 말렸지만 부녕은 기세 등등 외칠 뿐이었다.
흥, 말로는 태산이라도 쌓겠지. 지금 30대인 자신도 숨이 차 죽을 지경이니 오부녕씨도 기절 직전일 것이다. 라고 맹기는 생각했다. 낫을 휘둘러봤자 가벼운 열상이나 입힐까? 어쨌든 치명상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노는 임계치를 훌떡 넘어가고 있겠지. 조금 더 지나면 아예 눈엔 뵈는 게 없을 거고, 뭔 사단을 일으킬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이다. 라고 맹기는 판단했다. 관객이자 증인이며 여차하면 119를 불러줄 사람들은 충분했다. 어느 사이 쪽달이 나와 어둠의 밀도를 낮춰주고 있었고 밤바람도 꽤 시원했다.
맹기는 좁은 논둑길을 돌아 널찍한 길가로 나왔다. 부녕이 바로 쫒아나왔고 마을 사람들도 이열 종대로 나뉘어 두 사람 옆으로 늘어섰다. 맹기는 땀으로 범벅이 된 셔츠를 잡아 당겨 바람 좀 넣어주고, 사색이 된 채 울고 있는 문이의 손을 꽉 잡았다 놓았다.
맹기가 부녕 앞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번득거리는 낫을 맞이하는 자세로 두 팔을 들고 섰다. 달빛 아래 맹기의 표정은 의연했고, 마지막 투지를 불태우는 병사의 그것처럼 결연했다. 그것이 부녕의 눈에 스파크를 일으켰고 마침내 폭발을 불러왔다.
“에라이, 이 찢어죽일 놈!”
눈자위가 허옇게 뒤집혀진 부녕은 축지법을 쓰듯 단번에 날아가 낫을 휘둘렀다.
“아빠! 안돼요!”
문이가 비명을 지르며 덤벼들자 맹기가 문이를 잡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곤 다시 제자리에 서서 두 팔을 치켜 올리는 것과 동시에 부녕의 눈이 파랗게 불을 뿜으며 다시 한 번 낫을 휘둘렀다. 맹기의 비명과 함께 남방셔츠가 펄럭였다. 맹기는 그대로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오빠! 오빠! 안 돼! 안 돼애!”
문이가 맹기를 끌어안으며 자지러졌다. 그 모습을 본 부녕은 피를 토했다.
“너 너 너, 너, 문이 너!….”
부녕은 말도 맺지도 못했다. 맹기는 문이의 가슴에 머리를 박았고, 문이는 두 팔로 맹기를 감싸 안은 채 덜덜 떨었다. 낫을 치켜든 부녕의 팔이 허망하게 허공을 긋다 아래로 떨어졌다.
맹기를 끌어안은 채 그렁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문이를 향해 부녕이 종주먹을 흔들었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냐!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러나 문이는 맹기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 아빠, 하마터면 이 사람……”
“뭐, 뭐가 어째? 이 사람!”
부녕은 거품을 물고 펄쩍펄쩍 뛰었다. 문이의 입에서 차마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부 부녕이 이제 그만하지. 그만하면 분이 풀릴 때도….”
언제 나왔는지 맹기의 부친인 중풍 맞은 홍씨가 부녕의 팔에 매달렸다. 흐억, 흐억, 가쁜 숨을 몰아쉬는 뼈다귀만 남은 노인을 부녕은 거칠게 뿌리쳤다. 종잇장처럼 쓰러지는 홍씨를 이장이 붙잡았다.
“자네 도대체 뭐하자는 거여? 자네는 농사꾼 아니여? 엉? 농사꾼은 결혼도 하지 말란 말이여! 농사꾼이 없었으면 사람 주둥이로 밥이 어떻게 들어가는디? 자넨 똥만 퍼 먹고 살은 겨? 아니잖여? 근디 왜 농사꾼을 무시하고 못 잡아먹어 안달이냔 말이여!”
이장이 손아래 동생을 나무라듯 통박을 주자 부녕의 꼿꼿한 눈이 이장의 면상에 꽂혔다. 낫만 없으면 이빨 빠진 불독이 참말로. 이장은 입엣 말로 꿍얼거리고는 홍씨를 끌고 뒤로 물러났다.
“그려, 이제 좀 그만 혀. 그 놈의 낫부터 내려놓고 말이시.”
양판식이 부녕의 낫자루를 잡아 비틀었다. 고래 적에 씨름판을 주름잡았다는 이력만큼 팔 힘은 아직 짱짱했다. 부녕이 움찔했을 때 그는 재빨리 낫을 빼냈다.
“너희들 뭐하는 거냐? 빨리 일어나지 않고.”
“긍게 말이여.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도장 콱 찍어버려서 물리지도 못하겄네.”
얼굴 불콰한 이왕금이 맹기를 툭 쳤고, 그의 아내가 거하게 양념을 올렸다.
문이는 맹기를 부축해서 일어나 앉았다. 맹기의 셔츠가 주욱 찢어져 있었다. 낫날이 조금만 더 파고들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모두 혀를 찼다. 그 말에 힘을 얻은 양 맹기는 비틀거리며 문이의 어깨에 기댔고, 문이는 맹기의 앞자락을 여며주었다.
부녕은 잡아먹을 듯이 맹기를 노려보았다. 다리몽댕이를 분질러버려도 분이 안 풀릴 놈한테 어쩌다 문이가 마음을 빼앗겼는지, 애지중지 끼고돌다 또랑에 빠뜨린 꼴이 되었다고 부녕은 뿌드득 이빨을 갈아붙이며 돌아섰다.
“결혼 좀 할라고 아주 활극을 찍냐? 이 놈아, 몸 간수 잘 혀!”
홍상기가 맹기의 등짝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불독은 노났고만. 이 오밤중에 그렇게나 싫어하는 이 마을 사위를 얻게 생겼응게 말이여,”
“사위 술 얻어먹기도 전에 사위후보 대가리부터 쪼갤 뻔 했잖여. 야가 겁도 없이 팔을 들고 영접하는 자세를 취하드랑게.”
“그깟 반 뼘도 안 되는 버들낫으로 뭔 대가리를 쪼개. 부녕의 성질이 괄괄하긴 해도 그냥 확 찍어버릴 의도는 없었을 거여. 겁만 줄라고 한 거지.”
“그려도 말이여. 무기 들고 겁을 주면 안 되는 거여. 딱 철창감인디, 맹기 니가 잘 막아주었다이.”
“어쨌든 말이여요. 해피엔딩 해서 아주 좋구만요.”
사람들은 염려와 격려를 번갈아 쏟아놓았다. 맹기는 마을 사람들까지 동원해버린 것이 열없어서 죄송하다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 법석을 떨지 않고 문이와 무난 무난 맺어졌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쯤에서 얼추 결론이 난 것도 다행 중 다행이었다.
때 아닌 난리 법석 때문에 단잠은 능선을 넘어가버렸지만, 그래도 올해 안에 국수 먹게 생겼다고 모두 한 마디씩 떠들며 집으로 돌아갔다. 맹기와 문이도 찰싹 붙어서 걸음을 옮겼다. 샛노란 쪽달이 휘휘~~ 휘파람을 불며 마을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