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J시의 번화가인 상업 지구의 중심상가 거리에 있었다. 네온 싸인 요란한 클럽과 대형 음식점과 호프집과 눈부시게 반짝이는 주얼리 등의 휘황한 거리를 지나 갑자기 무대가 바뀐 것 같은 작고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선 끄트머리에.
치기어린 십대들은 그 일대를 ‘회색지대J’ 라고 불렀다. 화려한 풍경이 끝나면 갑자기 모래바람 불어오는 황야처럼 바뀌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 곳은 닳고 닳은 낡은 건물 사이의 골목에 숨어 있어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다만 간판을 대신한 안내판에 적힌 오글거리는 문구와 컵 그림과 위치를 가리키는 붉은 화살표가 궁금증을 자아낼 뿐이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골목 입구의 허름한 문이었고 그곳에도 똑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간판 역할보다는 광고에 가까웠다. 어쨌든 새로운 상점이 들어 온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있었는데 모르고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그 곳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축축하고 어두운데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갈 정도로 좁았기 때문에 눈여겨 보지 않았으니까.
치기어린 십대였던 나와 친구들은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뒤에 15분 거리인 상업지구까지 뛰어가 불야성의 거리를 서성이거나 작은 광장에서 한바탕 소리를 지르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심 상가 끝에서 우회전을 한 뒤 보건소 앞 대로에서 버스를 타야했다. 그런데 오글대는 문구가 뇌리에 박힌 뒤로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붉은 화살표가 그려진 안내판이 제 자리에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확인하게 되면 다소 안심하며 빠른 걸음으로 우회전을 하곤 했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다니던 수학 학원을 그만두고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유명한 학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중상위권은 3개월에서 5개월 만에 상위권으로 뛰어 오르게 만든다나 뭐라나~. 내 성향은 문과가 분명한데 부모님의 권유로 이과를 선택했고 엄마는 수학 성적이 모든 걸 가른다며 올인하다시피 했다. (내가 제일 버벅대는 과목이 수학이었다.)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은 공부라서 그런지 수학모의고사 성적은 항상 상위권 턱밑에서 대롱대롱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부모님의 압박이 날로 거세졌다. 고 3이 코앞인데 무사태평이라는 잔소리부터 재수하는 즉시 족보에서 파버린다는 협박이 이어졌다. 나는 성적도 올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거칠게 저항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경제적인 지원으로 몰아붙이며 의대를 목표로 했지만 내 성적은 전교 45등 내외를 오락가락했다.
2학년 2학기 중간고사는 그야말로 넌센스였다. 새벽까지 시험공부를 한 날은 죽을 쑤고, 졸음을 못 이겨 일찍 고꾸라진 날은 점수가 그런대로 나왔다. 그러니까 결국 총점은 변함이 없었다. 제일 마지막 날은 수학과 화학이었다. 가장 부담스러운 과목들이었다. J시 내에서 가장 조용하다는 독서실 칸에 머리를 박고 있었지만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문제의 질문만 계속 읽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속이 울렁 울렁거리고 두통이 몰려왔다. 그때 문득 그 안내판이 떠올랐고 짧고 간결한 메시지가 전광판의 광고 문구처럼 스쳐지나갔다.
[한 잔의 행복한 여정]
나는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이 암울하고 불안한 기분을 떨쳐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 잡혔다. 행복이라는 것은 불안의 반대였으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단어가 아니던가? 그곳에서 성적을 쑥쑥 올려주지는 않겠지만 울렁증 정도는 가라앉혀줄지 모른다. 라는 기대감이 억누를 수 없이 솟아올랐다. 나는 총무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곤 중심상가로 뛰어 갔다. 회색지대J까지 한 달음에 달려가 먼지가 덕지덕지 내려앉은 낡은 건물 벽에 붙은 안내판을 확인했다. 우중충하고 냄새나는 골목 입구의 허름한 문에도 똑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한 잔의 행복한 여정]
어쩌면 마약을 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컵 그림이 내 등을 떠밀었다. 허브 향 가득한 차 한 잔이 긴장을 이완시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문을 열자 풍경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만으로도 짐짓 안심이었는데 입구의 카운터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재빨리 일어나며 반겼다.
“어서 오세요.”
짧은 머리에 밝은 네이비 계열의 캐주얼 차림인 그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너무 깍듯한 인사에 나는 머뭇대다 고개를 까닥여 답을 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내에는 퇴폐적이거나 종교색 짙은 포스터가 붙어있지 않았고 촛대 등의 의식기구도 없었다. 야릇한 냄새의 진원지 같은 작은 구닥다리 진열장에 책과 향초, 말린 허브와 아로마 병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옆의 조금 더 큰 진열장에는 탄산음료와 과즙음료, 상표가 없는 병에 여러 가지 액체가 담긴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카페인데 여느 카페와는 다르게 홀이 없고 손님도 없고 커피냄새나 허브냄새가 진동하지 않는 모호한 곳이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음악적으로 비벼놓은 것 같은 맑고 잔잔한 리듬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마치 냇가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중에 나는 ‘이 곳은 아는 사람만 오는 그렇고 그런 곳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남자가 또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면 지금 나가라는 듯이. 그러자 나갈 용기가 사라져버렸고 이왕 왔으니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나는 남자를 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쪽으로 오실까요?”
그가 진열장 맞은편의 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은은한 주백색 조명의 룸에는 아이보리 색상의 벽지 아래 작은 테이블과 붉은 계열의 소파가 3세트 놓여 있었다.
“앉으세요.”
남자가 소파를 가리켰지만 나는 망설였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앉으시면 좀 피로가 풀릴 거예요. 보는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소파거든요.”
남자가 거듭 권하자 나는 가까운 소파에 앉았다.
“어떤 문제가 있으신가요?”
내가 온 몸을 끌어안는 것 같은 소파의 기묘한 푹신함에 놀라고 있는데 남자가 물었다.
아, 문제? 문제야 많지만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몰라 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통 학생 분들은 성적이나 진로, 그리고 연애 문제로 찾아오시곤 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가요?”
“네 조금.”
내 대답에 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 더 말하지 않아도 연애문제인지 성적문제인지 다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 알아챘다는 듯. 남자가 한쪽 입 꼬리만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격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듯도 해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래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더 말하는 대신 내 앞에 앉았다. 내 귓전에 찰랑찰랑 음악 소리가 부딪치다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물결과 같은 음악이 조금 더 세차게 부딪치다 깨지기를 기다렸다.
“자, 마음을 모으고 나를 봐요.”
마음을 모으는 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슨 중차대한 말이 나올까 싶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모두 크고 작은 문제 앞에서, 갈팡질팡 거리게 되죠. 그 불안과 두려움이, 사람의 원초적 갈망인, 행복의 그림자마저 지워버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란, 단어조차 버거워 하지요.”
한 마디 한 마디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을 것처럼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던 남자가 잠깐 텀을 두었다 덧붙여 말했다.
“안정을 잃어버렸으니까요.”
안정을 잃어버렸다는 남자의 말에 서글픔 같은 게 밀려들었다. 불안의 포로였고 따라서 늘 초조한 나는 언제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안정을 찾아왔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기대했다. 어쩌면 이 남자가 내게 특별한 것을 주지 않을까 하고. 내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는지 남자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잃어버린 거 맞아요?”
난데없는 질문에 놀랐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랬으니까 행복의 문을 밀고 들어왔겠지요. 좋아요.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남자의 말에 ‘그럼 여긴 상담카페 같은 곳인가?’ 싶어 상담사자격증 같은 게 있나 싶어 훑어보았지만 없었다. 어쨌든 나는 눈을 깜박이며 내가 할 말이 있을까 더듬어보았다. 그때 당시 나는 마치 우리에 웅크린 숫양처럼 늘 우울했고, 그저 등을 활처럼 휜 채 어서 빨리 입시의 과정이 끝나기만을 빌고 있었다. 그런 내 심정적인 말을 남자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안정은 여유 속에서 생긴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요. 아, 그런데 여유와 바쁜 건 완전 반대가 아니랍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안정된 상태에서 바쁘게 일을 하는 거, 불안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거, 이런 건 여유라는 카펫 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일이잖아요. 현재 성적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지만 불안한 상태로는 확 올리기 어렵다는 거 잘 아시지요? 무엇보다도 심리적인 안정부터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 문제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답은 내놓지도 않은 채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기분 충분히 안다는 듯 남자는 목소리를 낮췄다.
“자, 만성적인 불안은 잠깐 뒤로 밀어놓고 지구 전체를 보도록 해요. 지구의 페달은 성적순으로 밟는 게 아닌 거 맞지요? 학교 성적은 별로였지만 자신이 가진 재능을 제대로 살려낸 사람들이 지구를 움직이는 큰일을 하고 있어요. 내 말은 시선을 좁은 한반도에만 머물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가슴을 펴고 넓게 보면 여유도 생겨요. 세상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내 밥그릇은 사방에 있구나. 라는 배짱도 가지게 되지요. 그 다음에 나는 무슨 일을 하며 내 밥그릇을 가득 채울까? 고민해야 해요. 고민 없이 성적만 파는 건 목표 없이 항해하는 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니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알고 목표를 설정해서 공부를 하는 게 중요해요. 그럴 때 심리적인 안정도 찾아온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요.”
갑자기 헛소리를 열 바가지나 들은 것처럼 어깨가 축 처졌다. 남자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지만 내가 활용할 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적성을 따지기 전에 부모님의 욕망부터 충족시켜야 하고, 그러지 못할 바에는 이 지리멸렬한 과정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의 욕망을 충족시킬 능력도, 배 째라는 배짱도, 달아날 파격도 없었다. 암울하고 괴로운 고딩에게 고작 하는 말이 여유의 카펫이 어쩌구 지구의 페달이 저쩌구라는 개똥같은 소리나 해대고 있었다. 잘못 찾아왔다는 후회가 일었다. 빨리 이 방에서 나가는 게 유일한 위로라는 깨달음도 왔다. 나는 궁둥이를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소파만은 마음에 들었는데 이제 그만 일어서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내 엉거주춤한 자세가 어필했는지, 남자가 손짓을 하며 잠깐 멈추라고 했다. 남자는 의자 옆의 다탁에 놓인 검은빛의 뚜껑을 열었다. 와인 잔에 검붉은 액체가 반쯤 채워졌다.
“자, 이것을 마셔 봐요.”
남자가 잔을 내밀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있고,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 밝히지도 않고 불쑥 내미는 것도 못마땅했다.
“위험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레드와인에 여러 가지 허브와 약초를 넣어 끓인 거예요. 비법은 비밀이라서 알려줄 수 없지만 판매허가를 받은 것이랍니다.”
남자가 말을 하며 내 뒤쪽을 가리켰다. 내 뒤쪽 벽에는 식품 허가증이 아니라 사업자등록증이 붙어 있었다. 그가 내민 잔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오늘 특별히 무료로 드릴게요. 드셔 보세요. 괜찮은 맛이에요.”
무료? 그렇지. 만약 돈을 받는다면 욕부터 나왔을 텐데 그래도 남자가 눈치는 있었다. 남자의 손이 무색해질 즈음 나는 잔을 받아들었다. 여전히 온갖 의심이 들끓었다. 여러 가지 허브와 약초 중에 독초가 있는 건 아닌지, 식약처 몰래 양귀비를 넣은 건 아닌지, 중독성이 있어 한번 마셨다간 끊을 수 없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걱정 속에서 달콤한 내음이 콧속으로 들어와 마구 춤을 추었다. 뭐, 먹을 만한 거니까 주었겠지. 계속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문제 될 것은 넣지 않았겠지. 라고 생각을 바꿔먹고 나는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천천히 마시면 훨씬 효과가 좋아요.”
내가 어른 앞에서 못 마시는 술을 마시는 것처럼 한 모금, 한 모금 마시자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다 마시기 전에 임무를 마쳐야 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고딩의 어두컴컴한 터널을 받아들여라. 걷다보면 빛이 보이고 환한 입구가 나올 것이다. 힘들고 지치면 허리를 쭉 펴고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천천히 내뱉어라. 호흡은 만사의 기본이다. 불안감이 마음을 짓누를 때는 눈을 감고 청명한 하늘이나 푸른 나무 한 그루 등을 마음속으로 불러들이는 짧은 명상을 하라는 등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와인보다 진하고 스프보다 묽은 그것의 맛은 아주 나쁘지 않았다. 끝 맛이 약간 시큼했는데 꿀을 넣은 발사믹 식초처럼 알고 있는 듯 낯선 맛이었다. 내가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병을 제자리에 놓고 잔은 손에 든 채 말했다.
“차츰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물론 행복감도 밀려들 거고요. 자 이제 일어설까요?”
“…… 행복요?”
나는 내가 무엇을 찾아 이곳에 왔는지 상기하며 되물었다.
“우리 카페는 일반 카페와는 달라요. 여기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행복을 선물하지요.”
몇 방울의 알콜이 경직된 감정을 잡고 흔들었는지 살풋 몽롱해진 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왕 행복을 주려면 반잔이 아니라 한 잔 가득 채워 주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항변이 담겨 있었지만 남자는 무시하고 그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입맛을 다시고 유순한 새끼 양처럼 몸을 일으켜 남자를 따라 방을 나갔다.
남자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위약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보세요.”
얼마나요? 라고 물어보려는데 문이 닫혔다.
입안에서 묘한 액체의 맛이 다 사라졌는데도 행복감은커녕, 기분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몽롱하던 취기 같은 것도 없어져버렸다. 괜히 찾아가서 입맛만 버렸다. 행복카페에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건 고딩 내내 검고 우울한 터널 속에서 사방을 더듬다 끝날 거라는 뜻이었다. 짜증이 확 일었다. 나는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힘껏 차버리고, 괴상한 문구와 함께 나뒹굴고 있는 명함들을 발로 짓이겼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잔뜩 움츠러든 채 불안한 마음을 안고 독서실로 돌아갔다
중간고사에 비해 기말고사 성적이 조금 올랐다. 엄마는 K학원 덕분이라며 학원에 감사 전화를 했고, 나는 [행복여정] 때문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몹시 실망했지만 주인의 말은 자주 상기했다. 안정적이지 않으면, 즉 심리적인 여유가 없으면 더 우거지가 되고 그러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생각을 내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압박감에서 조금 풀려난 것 같기도 했고, 그 자유로운 기분이 공부에 몰두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나는 불행이라는 괴로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면 [행복여정]를 찾았다. 수능의 불안감으로 집중력도 성적도 뚝뚝 떨어져 부모님과 대판 싸우고 난 뒤 슬리퍼를 찍찍 끌며 갔다. 재수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또 갔다. 대학을 다니고 소개팅으로 연애를 하고 결별을 하게 되자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행복여정]으로 달려갔고, 군 입대를 앞두고 지나치게 예민해져 발작적인 신경증을 보였을 때에도 [행복여정]로부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한 뒤에 불안감이 치밀거나 회의에 빠져 의욕을 잃을 때도 행복 판매를 떠올렸고, 취업 때문에 멘붕을 겪게 되자 [행복여정]에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베프는 행복여정의 광신도라며 나를 조롱했다. 행복이라는 건 자기 만족으로부터 발로하는 고유의 감정인데, 값을 지불하고 얻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콩알만큼 얻은 기분 좋은 감정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혀를 찼다. 행복음료인지 뭔지를 마시고 헤롱거리는 건 행복이라는 아름다운 감정이 아니라 현실도피성 위안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녀석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옳다고 맞장구칠 생각도 없었다. 녀석이 정신 승리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고, 돈 주고 산 애착인형을 껴안고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것도 행복을 구매한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였다. 내 의견에 녀석은 어떻게 대가리가 그렇게 돌아가느냐고 화를 냈고, 행복음료는 향정신성 약물과 다름없는 것이며, 그 주인이란 놈은 교묘히 수작을 부려 법망을 피하고 고객을 현혹시키는 양심 없는 업자라며 분개했다.
그래, 나도 안다. 알고 있지만 그곳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간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불행의 아수라장에 빠지지 않고 불행의 언저리를 돌고 있어도 행복한 것이다. 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소용없다. 나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고 빨아들이는 것처럼, 스케줄을 확인하고 적당한 시간을 골라 재킷을 입고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고 신발을 신고 어느 사이 [행복여정]의 문을 열었다. 최고의 마케팅은 소비의 습관화란 말이 있는데, 주기적인 행복여정 방문은 이제 나의 습관이 되었다.
좁은 골목의 골방에서 시작한 행복여정은 도로 앞 넓은 매장으로 옮겼다. 주인의 부드러운 조언이 동반된 행복음료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편백나무 룸에서 명상도 할 수 있고, 안마의자를 이용해 릴렉싱을 즐길 수 있게 했다. 행복음료는 물가지수보다 빠르게 인상되었고 종류도 수 십 가지로 늘어났다. 사람마다 기분의 양상이 다르고 상황에 따라 불안과 우울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에 행복음료 또한 비법을 달리 했다는 주인의 구구절절한 설명은 차치하고, 어떤 맛이며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도록 병의 모양과 색깔이 다양하고 아름다웠다. 내 궁금증을 눈치 챈 주인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짧지만 행복의 느낌은 수 백 수천가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가? 행복은 단일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음료수의 다양한 맛처럼 달고, 상큼하고, 톡 쏘고, 사르르 녹고, 부르르 떨리고, 달큼 짭짤하고, 청량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희희 천천의 행복한 감정들을 느껴보고 싶어 괴로움을 다양하게 만들어 내버릴까, 하는 충동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그만큼 나는 행복여정의 핵심단골이었다. 주인과는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되었고 입대를 앞두었을 때 그가 술을 사주기도 했다. 그때 성공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는 단번의 성공은 스릴이 없어 사양하겠다며,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때로는 숨 막히게 초조하고 때로는 절망적인 그런 과정을 통해 성공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20년 안에 중심상가에 있는 노른자 거리의 건물을 전부 사버리겠다는 야망을 펼쳤다. 나는 성공을 돈으로 직결해버리는 것에 놀랐지만 그가 자신의 야심대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대중의 갈망과 충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대중의 고통과 기쁨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사로잡아야하는지 그 방법에 있어서 몹시 탁월하니 성공의 시곗바늘이 개울에 처박혀 허우적거릴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가 계획한 것보다 빠르게 이 일대를 넘어 수도권 전역의 돈을 성능 좋은 청소기처럼 세차게 빨아들일게 틀림없었다. 그는 개업 6년 만에 대출을 끼긴 했지만 처음 세 들었던 좁은 골목의 낡은 건물을 매입했다.
행복 여정이 몇 채의 건물주가 되었을 때 회색지대J에도 신축 바람이 불었다. 낡은 건물들은 모조리 철거되고 외장부터 화려하게 치장한 빌딩들이 속속 들어섰다. 독특한 디자인에 블랙 대리석으로 외벽을 치장한 새로운 [행복 여정]은 주변을 압도했다. 우아한 발코니로 눈길을 끄는 4, 5, 6층까지는 세무사와 변호사 사무실, 영어 스피치 학원, 보험회사 지점 등이 들어섰고, 둥글게 휘어지는 푸른 빛 통유리로 안의 전경이 판타스틱하게 보이는 3층까지는 [행복 여정]의 룸이었고, 예약제로 전환이 되었다. 예약은 편리한 시간에 찾아갈 수 있다는 이점보다는 꽤 오래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후 나는 한동안 행복여정에 가지 못했다. 업무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고 일을 배울수록 적성에 맞아 불만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행복 여정의 주인인 홍명서가 전화를 했다. 내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무슨 심각한 일이 생겼나 몹시 걱정을 했다며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아주 좋다고, 즐겁게 지낸다니 덩달아 행복하다는 말에 나는 감동했다. 우리는 그저 그런 고객과 오너의 관계가 아니라 형님과 동생, 또는 삼촌과 조카처럼 밀접하다는 느낌에 뭉클하기까지 했다. 그는 상담만 받으러 오지 말고 그냥 놀러 좀 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나면 자기도 좀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가 내게 도움을 청할 일은 없었다. 그는 상류층으로 입성한지 꽤 되었고, 자본과 힘은 비례하는 법이니 나 같은 샐러리맨이 무엇을 도와주겠는가?
“하하하, 제가 그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 사장님께서 도와 달라는 농담을 다 하시네요.”
“아니야.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 뭐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후, 진상 중 진상이네.”
“진상이요?”
“그러다니까. 아주 교묘하게 치고 들어오는데 힘으로 막아내자니 처 맞은 코스프레로 한 술 더 뜰 거 같고, 달래자니 끝도 없을 거 같고……. 증인 좀 돼줄 수 있을까 해서 전화해봤지.”
“증인라니요? 소송 들어갔어요?”
“그건 아닌데, 고발하겠다고 난리를 쳐 대서 말이야. 돈 달라는 소리인데, 터무니없는 액수를 불러대니 나 참.”
“사장님 편하실 때 갈게요. 언제가 좋으세요?”
“오늘 퇴근 후 약속 없으면 나랑 저녁 어때?”
술을 즐기는 나와 달리 그는 술을 즐기지 않았고, 나는 참치횟집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지만 그는 한식 레스토랑 같은 고즈넉한 곳을 선호했다.
“얼굴 좋네. 일이 재밌나봐.”
자리에 앉자 홍명서가 미소 띤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무실 근무보다 영업이 제 체질이었나 봐요. 밖으로만 나도는데도 할 만해요.”
“다행이긴 하지만 내 서포트 없이도 잘 사니까 좀 배 아픈데?”
“언제나 제 뒷심은 사장님이십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쭈욱요.”
진심이었다. 힘들 때마다 달려갈 곳이 있다는 게 퍽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비록 값을 지불하긴 했지만, 값을 치른다고 해서 모두 제 값하는 위안을 얻는 건 아닌데 행복음료는 어느 정도 제 값을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우리 앞으로도 변치 말자고.”
“당연하지요. 근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궁금하기 짝이 없어 서둘러 물었다.
“대단한 진상이 납시셨어.”
“매장에서 깽판 부리고 그랬어요?”
“유리 몇 장 깨부수는 깽판 정도면 별 것도 아니야. 아주 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너무 피곤해..”
“아니, 어떻게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정말로 감이 잡히지 않아 물었는데,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른 중반쯤 된 여성이 혼자서 두세 번 오더니 어느 날부터 남자친구라는 사람을 달고 왔더라고. 뭐 그런 일이야 흔하니까 그런가보다 했는데, 음료를 한 잔만 주문하더니 둘이 나눠 마시대.”
“생맥주도 아니고 그 적은 걸 어떻게 나눠 마셔요? 그리고 그건 수분 보충 음료가 아니잖아요.”
홍명서가 이마를 긁으며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행복 음료는 약과 음료의 중간 이었다. 그래서인지 한번 마시는 양이 180ml에서 250ml 내외였다. 행복 음료의 원재료도 전부 공개되지 않았다. 행복 음료는 시중에 유통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개할 의무가 없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꼼꼼한 고객이 원재료 공개를 요구하면 홍명서는 행복 음료의 제조법과 효과에 대한 적어놓은 대형 비법서 앞으로 정중히 모셔갔다.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행복 음료와 함께 주요 원재료가 간단히 소개되어 있었다.
* 행복 몽게주- 뭉게구름 타고 둥둥 떠다니다 보면 졸릴 거예요. 너무나 편안해서 말이지요. 그 몽게몽게한 세계로의 여행을 도와줄 행복 음료랍니다.
주요 원재료- 화이트 와인, 레몬밤, 애플민트 외 국산 약초.
“아니, 긴장을 이완하고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음료 인데 뭘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나는 행복 음료의 재료와 효과를 의심한 적이 없었고, 마시고 나면 긴장이 풀리면서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시키는 음료라고 생각해왔다.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시키기 보다는 코르티솔 분비를 억제해 줄 거야. 스트레스 호르몬이 줄어들면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어? 그런 거예요? 어쨌든 행복이 마시고 나면 기분이 진짜 좋아져요. 걱정거리도 쫄아드는 것 같고요. 굉장히 좋은 상품이에요. 근데 항상 궁금했는데요, 어떻게 그런 비법을 알아내신 거예요? 혹시 특허 내셨어요? 수출품목으로도 아주 좋을 거 같던데요.”
“특허는 뭐… 특허 내는 게 쉬운 게 아니더라고. 서류도 복잡하고. 특허를 내지 않아도 잘 팔려서 그만두었어.”
“그렇군요. 정말 세상에 다시없는 비법을 알아내신 거예요. 저도 사장님처럼 일치감치 비법이나 연구할 걸 그랬어요.”
내 말에 홍명서가 낄낄 웃었다.
“내 비법이 아니라 우리 집 비법이야.”
“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었어요? 혹시 조선시대부터 그러니까 가업 150년 이런 거예요?”
“흐흐흐, 그건 아니고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알아주는 약초꾼이었다더군. 근데 술을 너무 좋아해서 버는 것 족족 술값으로 나가버렸다는 거야.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는 것에 지쳐 우리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렸대. 그때 할아버지가 뭔 풀에대 약초를 넣어 다리더니 마시라고 주었는데, 그걸 마시면 기분이 좋아서 나물 캐서 밥도 해주고 그랬다는 거야. 약발 떨어지면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서 울기만 하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예 그 풀을 캐다 뒤꼍에 심었대. 그 풀이 깽끼풀인데, 아마 우리할아버지가 붙인 이름일거야. 그 풀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어쨌든 우리 아버지도 그 풀에 이런저런 약초를 넣고 다려서 마셨고, 나도 그 풀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며 놀았어. 배고플 때 그거라도 마시면 힘이 좀 났으니까. 깽끼풀 덕분인지 우린 가난하게 살면서도 싸우고 그러지 않았어. 그냥 가난하구나. 하면서 살아왔지. 할아버지는 술 맛이 나야 먹을 만 하다고 막걸리를 넣어서 다려 마셨다고 하고. 내가 실직하고 우울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깽끼풀이 생각나더라고. 그거라도 마시면 기운을 낼 것 같았어. 생각난 김에 바로 시골집으로 내려가서 확인했는데 뒤꼍이 아예 깽끼풀밭으로 변했더라고.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가신지 세 달 쯤 지난 뒤였는데 집을 팔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엄마 요양원비 내고 나면 내 밥값과 월세 낼 돈이 모자랐으니까. 우거진 깽끼풀밭을 보고 있는데, 이게 괜찮은 아이템이 될 거 같더라고. 음료를 만들어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막걸리 대신 와인을 넣으면 풍미도 더 좋고 현대인들의 입맛에도 맞을 것 같았고.”
“와, 히스토리 대단하네요. 프롤로그가 그야말로 압권이에요.”
즐기던 음료에 담긴 스토리가 극적이라는 사실에 나는 감격했다.
“그러게 말이야. 가난뱅이 청년을 사업가로 변신시켜준 셈이지.”
“깽끼풀의 어떤 성분이 긴장을 이완시키는걸까요? 혹시 성분 분석은 해보셨어요?”
“분석 의뢰는 안 해봤어. 삼대에 걸쳐 부작용 없고 과한 반응 보이지 않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
“깽끼풀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거예요? 사진 있으면 한번 보여주세요.”
“당연 없지. 깽끼풀이 비법인데 아무도 모르게 감춰둬야지. 안 그래? 깽끼풀이란 이름도 우리 집에서만 통용되고 있는 거 같아. 인터넷 검색도 안 되고 책자나 그 어디에서도 본 적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걸 보면.”
“와, 인생이 이렇게 풀려야 하는 건데…. 우리증조할아버지는 왜 약초 캐러 안 가신 거야?”
그 말에 홍명서가 또 웃음을 흘렸다. 그는 호방한 스타일이라기 보단 서생 같은 타입으로 잘 웃지 않았는데 와인 때문인지 스스럼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홍명서는 행복 음료의 맛과 효과에 대한 내 의견을 경청하며 메모했고, 나는 영업 활동을 온갖 제스처를 동원해가며 들려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에야 진상 퇴치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협의의 자리를 마련할 때 나도 합석하기로 했다.
진상고객이라는 커플은 나긋나긋하고 잘 웃어서 사장인 홍명서가 지나치게 경계한 아닐까 했다가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남자의 말은 정중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이었다.
“왜 제가 행복매장을 방문한지 아세요? 민이가 여길 다녀온 후 심하게 복통을 겪었기 때문이에요. 극심한 복통은 해독주스 500ml을 두 번이나 복용한 뒤에야 조금 가라앉았답니다. 민이가 복통을 호소할 때 너무 화가 나서 식품안전정보원에 곧바로 신고할 생각을 했지만 사장님께서 입을 타격도 염려되고 문제의 음료에 대한 정보도 미미해서 미루기로 했어요. 일단 민이가 3개월 방문권을 결재한 상태이니 제가 한번 방문해 본 뒤에 결론을 내리려고요. 그런데 음료를 마셔보니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겠더군요.”
“무슨 문제가 있던가요?”
홍명서가 남자를 보며 물었다.
“음료가 혀에 닿자 찌르르 아리더군요.”
“아려요?”
내가 되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셔왔지만 한번도 느끼지 못했는데, 내 혀가 그렇게 둔탱이였나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네. 맞아요. 제 미각이 아주 예민하거든요. 예를 들면 과일엑기스가 첨가된 음료는 원재료를 보지 않아도 뭐가 들어갔는지 알 정도거든요.”
“그야 과일마다 독특한 향이 있어서 대부분 알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 민이만 해도 내가 산수유 맛이 나는데 라고 말하면, 끝 맛이 좀 시고 텁텁한데 그게 산수유 맛이야 라고 묻거든요.”
“맞아요. 전 맛에 예민하지 않지만 오빠는 굉장히 날카로워서 뭐든 다 알아요. 사장님도 이 점을 알고 협의에 임해주셔야 해요.”
여자가 남자 팔짱을 끼며 거들었지만 홍명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 건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그를 위해 총대를 메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오, 대단하시네요!”
내가 감탄을 하자 홍명서가 테이블 밑으로 나를 쿡 찔렀다. 나는 잠깐 기다려보시라고 눈짓을 한 뒤 한 마디 더 했다.
“그 정도의 미각을 가지신 분이라서 얼얼함도 금방 느꼈나보네요.”
“그렇죠. 근데 여기 직원이세요?”
“아니요. 행복 여정의 고객이에요.”
“고객이 왜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사장님 방패막이는 아니시죠?”
남자의 표정이 대번에 까칠해졌다.
“당근이죠. 행복 여정의 오너보다는 고객이 훨씬 더 객관적인 판단을 할 것 같다며 참석을 부탁하신 거예요.”
“아, 그럼 이제야 객관적인 판단 아래 저희 말을 좀 들어주실 의향이 있군요. 자, 제대로 얘기해보도록 해요.”
남자는 원군이라도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음료에 독초가 들어갔는지 혀가 아리더군요. 몇 번이나 와서 종류를 바꿔가며 마셨지만 똑같은 느낌이었어요. 아마 어떤 독초를 베이스로 해서 허브나 과일 향을 첨가해 여러 종류로 나눠 판매하는 것 같더군요. 맞나요?”
남자가 홍명서를 보며 물었지만 그는 빨리 말이나 이어가라고 손짓했고, 남자는 호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잠깐 불쾌감을 드러내더니 곧 표정을 풀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 몸이란 게 그렇잖아요. 처음에는 별 반응 없다가 일정량이 축적되거나 하면 질병으로 나타나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자칫 행복음료가 독소로 작용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흰 그 문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만약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여기 음료를 계속 마시고 실려 가거나 심한 경우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그렇게 될 때까지 놔두어선 안 되잖아요. 하이클래스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건 무책임한 행동이죠. 그래서 사장님 입장과 고객의 입장을 헤아려서 저희가 나선 거예요.”
말이란 참 묘한 것이었다. 틀린 말이 없는 말은 사람을 혹하게 하고 의구심을 모락모락 키워내기도 한다. 교묘한 말의 힘이었다. 광고, 설명, 뉴스 등등 등의 홍수 속에서 나는 헷갈리지 않고 객관적인 분별력을 유지하며 살아왔을까?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남자가 재촉하듯이 말했다.
“제 말에 수긍하시죠?”
“보상 없이 말이죠?”
네? 남자의 눈빛이 서늘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나는 말을 덧붙였다.
“순수한 의협심을 누가 불량하게 보겠어요?”
“……… ”
“어쨌든 몹시 예민한 미각 때문 혀가 아린 느낌은 받았지만 별 탈이 없었나 봐요. 복통으로 나뒹굴었다든가, 혀를 잡아 뽑아야 할 것처럼 통증이 몰려왔다든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든가, 아니면 통원치료도 받지 않은 거예요? 에이, 좀 아린 맛은 사람마다 다른 미각의 문제지 품질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네요. 제가 16년 째 단골인데 그 동안 어떤 문제도 없었던 것이 제가 튼튼해서라기 보다는 행복음료에 아무 문제도 없어서 그런거였네요.”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커플의 표정이 확 변했고, 남자가 대번에 삿대질을 하며 나를 몰아세웠다.
“너! 얼마 받았어? 얼마 받고 사장 똥구멍을 핥는 거냐? 이 개새X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 난동을 부리는 거야!”
“사장님 이 담소룸에 CCTV 설치되어 있어요?”
남자의 말에 대답하기 전에 홍명서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했다.
“CCTV 신경 쓰지 말고 막말하세요. 녹음이 거슬리면 자제하시고요.”
“야, 이! 양아치새끼야! 녹음 기능 꺼! 너 그거 불법인 거 몰라?”
“본인 참여 녹음은 합법입니다.”
“하, 진짜 개 미친놈이 나타나서 난장판을 만들어버리네!”
“고함지르고 쌍욕 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 정 못 참겠으면 소송거세요. 사장님도 차라리 소송 진행하세요. 제가 16년 동안 기록한 행복여정 방문 기록 증거물로 사용하시고요.”
커플의 거액의 보상요구는 없던 일이 되었고, 2인 외식상품권 1매 지급이냐, 2매 지급이냐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2매를 받고 돌아갔다.
VIP룸으로 들어가자마자 홍명서가 나를 덥석 껴안더니 등을 두들겨댔다.
“고마워. 덕분에 골치 아픈 일이 해결되었어.”
“뭘요.”
“아니야. 교묘하게 치고 들어오는데 정면 승부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자네 말대로 오너가 주관적인 견해를 내보이면 어떤 꼬투리든 잡고 날뛸 게 뻔해서 말이야.”
우리는 소파에 깊숙이 눌러 앉았고, 그가 벨을 눌러 신제품 두 잔과 간식거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영업 실적 좋지?”
“그냥 그래요.”
“조만간 탑 찍겠던데. 이전보다 훨씬 침착하게 상황을 꿰뚫어보더라고. 역시 현장이 제일 빠른 지름길이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현장은 치열한 곳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것을 경험하고 습득할 수 있었다.
“나이 들어가니까 그런지 머리 아픈 일이 아주 스트레스더라고. 만약 우리 매장에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면 자네 영입하고 싶었을 거야.”
그 말에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그 동안 사장님이 제게 혜택 많이 주셨잖아요. 아주 조금 빚을 갚은 거예요.”
어쩌면 덕심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대어 온 것이 불안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내게 계속 기댈 등을 내주어야 한다는 바람, 그런 마음과 바람이 한데 모여 이룬 덕심이 그를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만든 것일 게다.
홍명서는 내게 6개월 방문권을 선물해 주었다. 한 달에 두 번 그러니까, 12잔의 행복음료와 함께 VIP고객으로서 오너인 홍명서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특별 선물이었다. 홍명서의 서비스는 고객 중 5% 만이 경험할 수 있었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11월의 이른 추위가 파고들던 금요일 오후에 행복 여정을 방문했다.
“출장 성과는 괜찮았어?”
“…네.”
“왜, 무슨 문제가 있는데?”
홍명서가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고, 나는 쉽게 대답 하지 못했다. 갑자기 울컥해진 것이다. 탁자 위의 아로마 디퓨저에서 흘러나오는 로즈 향이 그녀를 떠올리게 했고, 불현듯 이 아름다운 향기는 왜 지속되지 않는 걸까? 라는 감상에 빠졌던 것이다. 그녀가 즐겨 사용하는 로즈향은 그녀의 사랑처럼 달콤했고 나는 그녀의 품에 머리를 박고 장미꽃밭에서 뒹구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내게 품을 내주지 않았고 나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녀는 로즈향 대신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장착했던 것이다.
“가정문제?”
그가 다시 물었다.
“이혼을 할지도 몰라서……”
내가 말끝을 흐리자 홍명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순서처럼 침묵이 내려앉았고, 잠시 후에 그의 위로가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할지도 모른다는 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힐긋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내 몸은 소파 속으로 침몰해버렸고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엉덩이를 더욱 깊게 밀어 넣고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 두 페이지 분량의 대화를 유도할 것이고, 내 심드렁한 대답에도 주의 깊게 반응을 할 것이고, 그런데도 내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면 비법의 행복음료를 내 줄 것이다. 이 너무나 뻔한 수순을 나는 사랑했다. 그렇다고 믿었다.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이혼이란 말이 나왔다면 그 동안 꽤나 씁쓸하면서 살벌했겠군. 둘 다 몹시 힘들었을 거고. 짓이겨지고 상처 난 마음을 어떻게 봉합해야할지, 그 동안의 갈등을 이혼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전혀 생각나지도 않았을 테고. 그런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법원으로 직행해버리는데 그러기 전에 날 찾아온 건 아주 잘 한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갈 곳이 여기 말고 어디 있겠는가? 그녀와 사이가 틀어졌고, 살벌할 뿐 만 아니라 찢어발기기 전이라 해도 법원보다는 행복 여정 방문이 먼저다.
“일에 지치다 보면 다른 것까지 지겨워지는 건데, 그러다 보면 가까운 이들과 언성을 높이기도 하지. 그래. 모두 그러고 살아. 잘 넘기기도 하고 브레이크가 걸려 중도 하차하기도 하고. 아내분과 자주 다투었어?”
그는 계속 말을 했고, 나는 시선을 그의 날렵한 구두코에 던진 채 어서 향기 풍성한 음료가 목구멍을 넘어가고 모든 문제들이 뭉개져 보이는 몽롱한 기분에 싸이기만을 기다렸다. 희한하게도 그의 비음 섞인 목소리를 배경으로 행복음료를 마시면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을 다 뒤로 미뤄두고 한숨 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계속 반복적인지, 그것이 늘 의문이었지만 언제나 의문에서 끝났다.
“제가 야근이 잦고 풀장이 늘어나자 아내의 의심도 그에 비례하게 되었어요. 출장 중에는 한국과 낮밤이 달라 전화를 잘 안하게 되는데, 그런 것 등에 아내가 불만스러워 하면 짜증부터 일어요. 짜증을 내고 나면 곧 후회를 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싶으면 나도 모르면 벌컥 화를 내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싸우면서 부부라는 타이틀에 얽매여 억지로 살고 있었지요. 그 사람은 타이틀 아내는 싫다며 차라리 이혼을 하고 서로 자유롭게 살자고 해요. 일견 맞는 말이지만 어렵게 이룬 가정을 깨부순다는 게 쉽지 않아서……”
“부부라는 타이틀이 아니야.”
“아니, 뭐 무늬만 부부인거죠.”
“무늬만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이, 그러니까 전혀 다른 두 종의 생명체가 서로에게 스미는 과정인거야.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겠어? 그럴 수 없잖아. 그러니 충돌할 수밖에 없어. 아이러니하게도 부부는 충돌을 통해서 서로를 더 깊숙이 알아가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거야. 그러니까 충돌하되 박살나지 않을 정도로 해야지.”
“…… …… ……”
그건 나도 생각해 보았다. 다투기 싫어 양보도 하고 싸우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조정하고 말을 가려서 하고 선물도 챙기고……. 그런데 그런 걸 계속하다보면 더 화가 난다. 이게 무슨 뻘 짓인가 하고.
“한번 감정이 식으면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는 건 왜 일까?”
잠시 후에 내가 할 질문을 그가 했다. 정말이지 왜 건조해진 감정은 다시 촉촉해지지 않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나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고추가 콩알만 할 때부터 나를 알고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여지없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친구가 말하길 우리 부부의 갈등은 어쩔 수 없다네요. 사랑의 떨림이 마음 깊이깊이 파고들어 심연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래요. 연꽃은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흔들림 없이 꽃을 피우는 건 연못의 깊은 마음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래요. 우리 부부에겐 그것이 없고요. 미친놈이 미친 소리를 한다고 통박을 주었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친구 녀석이 덧붙였다.
“결혼은 사랑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 평생을 그 사랑에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몸짓이다. 처음 결심은 그랬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는 건 쉽지 않다. 비바람이 불어오고 물결이 높이 일어 연못도 연꽃도 괴로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거센 풍랑 앞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서로 깊이 껴안아야만 한다. 그것이 사랑의 뿌리가 깊어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너희 부부는 풍랑 앞에서 각자 꼿꼿이 서서 서로를 비난했을 뿐이다. 가정은 혼자서 지탱하는 곳이 아니다. 서로, 또 함께하는 것이다. 너희 부부는 그것이 부족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자존심을 접고 해결점을 찾아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넌 문제를 해결하는 의지를 잃었고, 행복 여정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나를 향해 사납게 눈을 찢던 녀석의 이 말은 홍명서에게 하지 못했다.
홍명서는 행복의 이면은 피땀이라고 했다. 노력 없이 행복은 얻기 힘든 것이며 행복한 결혼 생활도 그만한 열성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복잡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 혼란스러운 머리부터 식히고 마음을 편하게 해야 한다며, 온갖 모양과 갖가지 색깔의 액체로 가득 찬 진열장을 열었다. 그의 손가락이 녹색 액체가 담긴 목이 짧은 병을 지나 화이트빛 470ml짜리 병을 지나 스카치위스키처럼 마개가 묵직한 병을 꺼내 와인 잔에 핏빛 액체를 따랐다.
“이것이 괜찮을 것 같네. 천천히 마시고 나면 한결 행복한 기분을 느낄 거야.”
나는 그가 내민 잔을 받아 눈높이까지 들고 돌려보았다. 농익은 붉은 포도의 짙은 빛깔 속에 실크처럼 농후한 물질 몇 가닥이 휘도는 것 같아 냄새를 맡아보았다.
“페퍼민트와 레몬그라스”
“맞아. 한 모금 맛보면 아주 지옥 길을 달릴 거야.”
그의 반어법은 바로 충동질이었다.
나는 잔을 입술에 대고 한 모금 빨아들였다.
“어때?”
이빨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홍명서가 자신 있는 어조로 물었다.
“오!……”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화악한 것이 입안을 점령하다 식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래, 그래. 나는 단번에 나머지를 마셔버렸다. 잠시 후에 강렬한 페퍼민트와 레몬과 포도 향이 한데 어울러져 온 몸을 두드리며 춤을 추었다. 팔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고 해면체처럼 늘어진 채 그것들이 이끄는 대로 축제를 즐겼다. 이혼 같은 골치 아픈 생각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이혼을 하게 되면 하는 거고, 좋게 결정 나면 그것대로 좋은 거고. 어차피 삶이란 뒤죽박죽 북치기 아닌가? 될 대로 되라지.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나는 자꾸만 감기려 드는 눈을 겨우 뜨고 홍명서를 보다 풉, 웃고 말았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끝내주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는 먼저 방을 나갔다. 나는 조금 더 머물러 온 몸을 맡긴 채 음료의 혜택을 고루고루 누렸다. 시간은 재깍재깍 달려가고 있었고 나는 소파 속으로 푹 잠겼다. 이 방을 나가는 순간 또 창끝처럼 한기가 파고드는 거리를 걸어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 잠깐 동안은 기분이 업되어 그녀에게 말을 걸고 팔꿈치를 건드리며 장난도 시도해 볼 것이다. 그녀는 또 그 놈의 여정에 갔다 왔냐고 가재 눈을 뜨겠지. 가재 눈을 뜰 게 아니라 같이 와서 함께 마시면 좋잖아. 나는 혼잣말을 하며 킬킬 웃었다. 그녀는 행복 여정을 신뢰하지 않았다. 알콜이라면 스왑도 거부하는 체질이라 더는 권할 수 없지만 그녀의 강고한 성격도 한 몫 했다.
창 밖에 어스름이 어렸다. 엷은 회색천 같은 어스름은 점점 짙어지며 내 우울한 문제도 감춰줄 것이다. 나는 불빛이 저녁 꽃처럼 밝혀진 거리를 지나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할 것이다. 그것이 싫든 좋든 내 생활 일정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된 시간은 한 시간이었지만 주인은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만큼 쉬라고 했다. 그러나 시간을 더 끄는 건 민폐여서 그만 소파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홍명서가 곧장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감정의 잔여물을 털어내듯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조만간 또 올 것 같은데……. 여길 왔다 가면 며칠은 잠을 잘 자거든요.”
조바심이 섞인 내 말에 홍명서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언제든지 환영해. 늦게라도 괜찮으니까 전화만 미리 주고.”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어려워요. 아주 미묘한 것이에요. 올 듯 올 듯 오지 않고, 왔다가도 금방 달아나버리고.”
“미묘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안 그래?”
“맞아요. 행복 여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버텨왔을지 생각하기도 싫어요.”
자조적인 내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절대적으로 맞다는 긍정의 의미인지 몰라도 홍명서가 소리 내어 웃었다. 행복한 웃음소리였다.
행복의 여정을 달리는 사람이니 당연히 행복하겠지. 행복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거리며 우울과 불안 사이에서 몸부림을 치다 행복음료에 매달리며 사는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럴까?
“항상… 행복, 하시지요?”
내 말에 그의 고른 치아가 다시 환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행복하다고 외치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는데, 내 기분까지 환해지게 만들진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에 충전한 한 줌의 내 행복을 움켜쥐는 듯한 불쾌감이 스며들었다.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거 같아요.”
약간의 빈정거림과 부러움이 섞인 내 말에 그는 멋쩍은 듯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살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심어린, 정말로 라는, 진짜 그렇다. 라는 예스, 예스였다.
“오, 그렇군요. 하루에 행복 음료를 몇 잔씩 마시는데요?”
“하루에 몇 잔씩? 오우, 그건 남용이야. 과유불급, 지나치게 마시면,”
그러니까 정도를 넘으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뒷말은 검지손가락을 세워 빙빙 돌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시음하거나 고객과의 친교를 위해 마시지 부러 그걸 마시진 않아.”
아까워서요? 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 짠돌이 기질이 상당하니 그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원래 파는 분들은 잘 안 드시더라고요. 그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매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요?”
“덕분에.”
“덕분에요?”
나는 되물었다. 내가 그를 위해 해준 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하고 안부를 묻고 위로해주었다. 내가 해주었다라고 굳이 말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 행복음료 값을 한번도 외상을 긁지 않았다는 것과 얼마 전에 진상을 물러나게 해주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는 내가 그의 행복 메신저라도 되는 것처럼 얼굴의 모든 근육을 활짝 펴며 말했다.
“그대와 또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 덕분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기쁨으로 흠뻑 물들었고, 행복에 벅찬 그의 눈동자가 회전렌즈처럼 고급 마감재와 최신식 장식 가구와 기자재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실내를 차르르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