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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ef Oct 27. 2024

그녀의 뒷모습

 그녀는 현타(현자타임)가 와서 더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며 텀을 갖자고 했다. 처음에 선택한 단어는 분명히 ‘텀’이었다. 나는 그럼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만나는 것을 보류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현타를 극복해 내자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발음도 정확하게 그만 헤어지자고 했다. 

 왜? 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건데!”라며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녀가 미간을 확 구겼다. 내가 등록금까지 코인에 몰아넣었다 쫄딱 말아먹었을 때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때 그녀가 나지막하게 읊조렸었지. “무모하려면 그만한 배경이라도 있든지.” 

 그 말에 벌컥 해서 나는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라며 따졌고,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다투었다. 그 뒤로 작은 모래알갱이 같은 게 우리 사이에 끼어 서걱거린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여겼다.  

 나는 그것을 연인들 사이에 흔히 일어나는 권태기 정도로 생각했고, 그녀는 그때부터 내가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냐고 따져 물어봤자 다시 되돌려질 것 같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붙잡고 매달리는 등의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잠긴 목을 가다듬고 쿨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의 흔적들이 나를 반겼다. 방에서 주방, 그리고 욕실까지 내가 눈을 돌리는 곳곳에서 그녀를 부각시켰다. 그녀가 사용했던 엔젤펭수 머그컵과 그녀의 부드러운 수면양말, 그녀의 항균칫솔과 티아라 머리띠와 1m타올과 헤어밴드와 매니큐어와 언제든 편하게 입으라고 내가 인터넷으로 구매한 스커트까지.  

 빨리 잊기 위해선 빨리 버려야했다. 그녀와 내가 함께 버튼을 쥐고 당기고 밀며 뽑은 인형들은 그녀의 환호와 함께 모두 쓰레기봉투 속으로 들어갔다. 옷장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그녀의 반바지와 티셔츠도 퇴출되었다. 컵과 양말과 칫솔과 비비크림과 화장품 샘플 파우치와 다이어트 음료수와 여드름 압출기도 다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물건과 내 물건의 경계에 선 녀석들은 쉽게 쓰레기봉투 속으로 던져 넣질 못했다. 그것은 이성과 감정의 줄다리기가 되었고 계속 나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그녀와 함께 서점에 갔다 구매한 요리책은 나보다 그녀의 손때가 더 묻어 있었다. 그녀와 내가 바닷가에 놀러가서 주웠던 커다란 소리껍데기도 난처한 품목이었다. 그것들을 쓰레기봉투 속으로 처박았다 다시 꺼내길 수십 번 후에 결국은 내 손을 떠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스커트는 버리지 못했다. 그건 내가 그녀를 위해 구매한 것이었다. 난생처음 여성 의류 사이트에 입장해 스커트를 고르는 데 생각보다 어려워 애를 먹었다. 소재와 스타일도 문제였고 사이즈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만 둘 수도 없었다. 그녀가 딱 달라붙는 스키니를 입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거나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다리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는 무수한 클릭질로 그녀에게 어울릴 것 같은 스커트를 찾아냈다. 그 과정이 그녀에 대한 애정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는 건 과장이 아니다. 여성의 스커트는 종류도 많고 디자인도 색상도 다양했다. 선택의 범위가 넓다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동을 요구했다. 그녀의 구매 여정이 이해되었고 도와주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스커트를 버리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스커트에는 우리의 사랑과 그 사랑의 열기가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 원룸에 세 번째 왔을 때, 나는 머뭇머뭇 스커트를 꺼내놓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무척이나 조바심을 내며 멋쩍게 말했다. 

 “꽉 끼는 바지가 건강에 별로라고 해서, 여기 있을 때 편하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구매해봤는데 맞을지 모르겠어……”

 어? 라고 내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그녀를 보며 나는 빨리 입어보라는 손짓을 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외쳤다.

 “이거 좀 봐! 딱 맞아. 질감도 죽여준다.”

 그녀가 무릎 위까지 오는 쉬폰스커트를 살랑살랑 흔들다 빙그르르 돌았다. 그녀의 눈웃음처럼 사르르한 소재와 스윗핑크 컬러의 스커트는 그녀의 뽀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녀는 어쩜 이렇게 잘 맞느냐고 손으로 더듬더듬 사이즈 다 잰 거라고 눈을 흘기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스커트를 잡고 캉캉춤을 추듯 앞뒤로 흔들다 나를 끌어 당겨 막춤을 추었다. 몸치인 나는 막대인형처럼 그녀가 당기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녔지만 구름 위에 붕붕 뜬 기분이었다.

 그녀는 연신 허리를 틀다 다리를 위로 쭉쭉 벋었다. 우유에 담근 것처럼 희고 탄력 있는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당장 침이 고이고 소리도 요란하게 꼴딱 넘어갔다. 눈치 없는 감정이 멋대로 수선을 떨고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속셈이 따로 있었던 거라고 오해할까봐 고개를 쳐들어 천장을 보고 발로 바닥을 차며 뛰었다. 스커트가 스키니보다 속살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걸 간과했던 것인데, 그것을 설명하는 건 구차한 짓이었다. 

 그녀는 스커트는 몸을 구속하지 않아 좋다고 했다. 그녀는 살랑살랑 사라랄라~~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신체는 구속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자유야 말로 최고의 누림이다. 기회가 왔을 때 누려라. 샤라랄라~ 춤을 추며, 엉덩이도 팔랑, 다리도 팔랑, 좋다. 좋아!를 연발하다 선언이라도 하듯이 외쳤다. 그래도, 외출할 때만큼은 스키니가 최고야! 왜? 나를 구속할 필요가 있으니까. 무엇 때문에 구속을 하냐고? 몸매를 살리기 위해선 불편한 것쯤 참는다 이 말이야. 흥이 오른 그녀는 혼자 묻고 답하며 나를 웃겼다. 사실 그녀에게 스키니보다 더 잘 어울리는 건 없었다. 그것은 불변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내 원룸에 오면 들어서기가 바쁘게 스커트로 갈아입었다. 내가 깨끗이 빨아 사프란 향이 나는 유연제에 담갔다가 말린 스커트는 그녀의 하체에 착 감겨들었다. 그녀는 스커트 끝을 들어 올려 흠흠 냄새를 맡으며 부르르르 진저리를 치기도 했는데, 향긋한 냄새가 비강에서부터 롤러브레이크를 타고 전신으로 달린다며 나를 행복하게 했다. 한번 편한 맛을 본 그녀는 이내 다른 것에도 눈독을 들였는데, 내 팬츠였다. 실험 삼아 내 팬츠를 입어본 그녀는 달라붙는 게 없어 아주 그만이라며 벗으려 들지 않았다. 나와 체격이 비슷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굴곡 때문에 팬츠는 골반에 걸쳐졌다. 오, 그 모습이 얼마나 섹시한 지,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차마 그녀를 마주보지 못했고 묻는 말에도 버벅거렸다. 

 그녀는 점차 내 팬츠를 점령해 나갔다. 슬림핏은 물론이고 카고팬츠와 조거팬츠도 그녀가 입으면 예술이 되었다. 때로는 내가 이미 입은 팬츠를 욕심내 빨리 벗으라고 성화를 부렸는데, 지난번엔 아주 실랑이를 하게 되었다. 그녀가 내가 입고 있던 베이지색 치노 팬츠를 보며 콧소리로 명령했다. 

 “벗어!”

 “싫어.”

 “벗으라니까!”

 “싫은데요.”

 “이리와, 내가 확 벗겨 버릴 테니까.”

 “뭐야, 뭐야. 우왁, 내 바지! 내 바지!”

 내가 안 벗으려고 바지춤을 움켜쥐자 그녀는 양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 흔들며 재촉했다. 그래도 나는 벗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에 잠식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녀의 교태 어린 목소리와 거친 숨결에 흥분이 끓어올랐고, 그녀가 내 허리띠를 풀고 팬츠를 끌어내리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야수처럼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야수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우리는 외출 하려던 것도 잊고 찰흙처럼 엉겨 붙어 땀을 흘리고 헐떡거리며 지치도록 뒹굴었다. 그날 우리는 무인도의 커플처럼, 오직 우리 둘만이 세상을 차지한 것처럼, 오로지 우리의 사랑만이 유일한 것인 것처럼 오래도록 서로를 탐했다.

 연애의 실패가 처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담담했다. 몇 번 만나지 않고 헤어졌기 때문인지, 게임 몇 판하고 나자 어느 사이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덕분에 나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무미하고 건조했다. 그것이 억울해서 그랬는지 그래서 만회할 작정으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연애를 하고 헤어질수록 후유증이 심각해져 갔다.  

 누가 시간이 약이라고 했는지, 아, 약은 약이다. 점점 미쳐버리게 만드는 약. 그녀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처음으로 불면증을 겪고 중요한 약속을 잊고 아르바이트에 늦어 욕을 열두 바가지나 얻어들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만 돌아와 준다면, 그녀만 돌아와 준다면, 그녀만 돌아와 준다면……. 쏟아지는 욕을 뒤집어쓰며 나는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연인과 헤어지고 난 뒤엔 술기운에 전화를 하고 매달리고 울고 갖은 추태를 부린다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개또라이 짓이냐고 경멸의 시선을 보냈지만, 이제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술기운에 기댈 수 있다면 나도 백번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술에 취하면 그대로 나동그라져 골아 떨어져 버리는 유형이었다. 그곳이 술집이든 도로가든 상관없이 뻗어버렸다. 나는 술 대신 게임에 빠져들었고 길고 긴 레이드를 도는 동안은 정상적으로 머리가 돌았다. 그러나 게임이 끝나는 순간 또 다시 그녀 생각으로 미쳐갔다.

 내 귓가에서 뜨겁게 부서지던 그녀의 가뿐 숨소리,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 그녀의 까르륵 대는 웃음소리, 그녀의 입 안에서 바사사삭 부서지던 비스킷 소리, 곡선을 따라 흔들리던 그녀의 춤……. 그녀의 모든 것들이 홀로그램처럼 내 눈앞에서 떠돌았다. 나는 자조에 빠져 울다 웃다 전화기를 열었다 닫았다 던져버렸다 도로 끌어 당겨 그녀의 사진을 클릭해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 발광을 했다. 그녀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데 그녀와 다시는 서툰 솜씨로 음식을 하다 난장판을 만들고,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설거지를 미루고,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입술을 부비며 서로를 갈구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렇게 미칠 듯이 그녀를 원하는데, 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인지, 머리로는 받아들이겠는데 감정이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날뛰었다. 그녀는 왜 나에게 문자 한번 안하는 것일까? 벌써 나를 잊은 것이냐고,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이냐고, 나는 동서남북 아무 데나 대고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발작적으로 일어난 나는 그녀가 입었던 내 바지들을 뚤뚤 말아 옷장에 처넣었다. 이대로 가다간 구제 불능의 미친놈이 될 것 같았다. 사랑이란 감정은 속수무책이라는 게 문제였다. 연애의 감정이 발화하는 순간의 그 통제할 수 없는 뜨거움과 마찬가지로 실연의 고통도 속수무책이었다. 설렘과 기대, 경계와 조바심을 넘어 차츰 안정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연애처럼 실연도 처음에는 지옥으로 떨어진 양 몸부림을 치다 차차 마음을 추스르고 단단해지는 것이라는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실연의 블랙홀에 빠져 있었다.       

 휑하게 빈 원목자바라, 내 마음 보다 훨씬 덜 썰렁한 그것을 바라보다 의자에 주저앉았다. 습관적으로 인터넷을 열었다. 배너광고에 뜬 남자 바지를 클릭했다. 스타일이든 핏이든 상관하지 않고 사이즈만 보고 다섯 개를 구매했다. 사이트를 닫으려는 순간, 탁 붙는 민소매 셔츠를 입은 근육질의 남자 사진에 눈이 꽂혔다. 실타래처럼 촘촘하면서 완강하고 매끈한 근육이 남자의 고통스런 시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저런 근육을 만들기 위해선 운동에 미쳐야만 했을 것이다. 미친다는 건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밀어내는 능동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그렇다. 내 몸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려야 했다. 마음도 정신도 아주 맥을 못 추게. 

 나는 실연의 쇼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운동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친구들이 들으면 얘가 아예 빡 돌아버렸나, 라고 내 머리 위에서 손가락 팽이를 돌리겠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이 나를 구제해 줄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헬스장은 태생적으로 나와 맞지 않았다. 달리기도 딸리니까 구기 종목 패스, 치고받는 것 싫어하니까 복싱 종류 제외, 상념에 들었다가 그녀 생각으로 빠지면 안 되니까 등산 빼고, 자전거도 빼고, 수영은 자신 없고……. 나는 온갖 이유를 들어 이것 빼고 저것 빼고 헤매고 헤매다 결국 한 클라이밍동호회에 가입했다. 

 클라이밍이라니!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며 아연해 했다. 긴장과 집중의 운동이라는 것에 홀려서 가입을 한 것인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스키장 리프트도 못타는 위인이 바로 나였다. 10m가 훌쩍 넘는 암벽에 달라붙는다는 상상을 하자 오금이 저려왔다. 그렇다고 가입한지 오 분 만에 탈퇴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만만하게 도전해 볼 운동도 없는데, 구경이라도 하러 가자.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나는 클라이밍 용어를 숙지하기 위해 다시 클릭 했다. 

 정모는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였다. 신촌에 있는 암장까지 1시간 정도 걸리지만 20분 일찍 출발했다. 암벽이 얼마나 아찔한 지 미리 살펴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첫 시간부터 열성을 보이고 싶기도 했다. 신입 회원은 나 혼자뿐이었고, 회원들은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이미 클라이밍용어와 볼더링 요령 등을 충분히 숙지했지만 그들의 친절하고도 지루한 설명을 고개를 주억거려가며 끝까지 들었다. 빨리 이들 속으로 섞이고 싶었고 소속감에 빠져 그녀 생각으로부터 달아나야 했다. 

 곧 회장의 주도로 입문자 강습이 시작되었다. 손에 초크가루를 묻힌 뒤 회장의 시범을 따라 맨 아래의 홀드에 두 발을 올리고 무릎을 굽힌 뒤 어깨 높이의 홀드를 두 손으로 각각 잡았다. 가장 기본인 머리를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 자세였다. 암벽화의 쪼이는 힘이 엄지발가락에 쏠렸고 그 쏠린 힘으로 홀드를 밟자 안정적인 자세가 유지되었다. 회장이 가리키는 홀드를 따라 발을 옮기고 손으로 잡는 동작이 반복되었다. 한 시간정도 하자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혼자서도 기어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긴장을 한데다 손과 발에 너무 힘을 꽉 줘 후들후들 떨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한 시간 만의 다운은 나를 만족시켰다. 야호! 아예 녹초가 되어 버리자!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는 곧 힘을 추슬러 또다시 암벽에 붙었다. 모두 입을 모아 날씬한 체격과 길쭉한 손가락이 클라이밍에 적합하다고 했는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할 것처럼 세 시간 내내 암벽에 매달려 있었다.  

  체력만 고갈된 것이 아니라 뇌까지 기진맥진해져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원룸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어버렸다. 오랜 만의 숙면이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운동 못한 걸 벌충이라도 하는 것처럼 클라이밍에 빠져들었다. 아르바이트까지 그만두고 암장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곧 9월 개학이었고 4학년 마지막 학기인 만큼 취업 준비에 매달려야 했는데, 오늘만, 한 시간만, 잠깐만 하다 밤늦은 시간에야 암장을 나서곤 했다. 동호회 회장이 선수로 나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속도를 내 암벽을 오르고 스파이더처럼 벽면을 훑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볼더링의 짜릿함에 매료된 것뿐이었다. 때문에 나는 매일 지쳐 있었다. 몸도 마음도 오로지 잠을 원했다. 그녀가 살랑살랑 흔들던 스커트를 봐도, 그녀가 치골이 보이도록 걸쳐 입은 내 팬츠를 봐도 격정이 일지 않았다. 쓰리고 아린 기억에 잠깐 흔들렸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입었던 내 팬츠는 다시 제자리에 걸어놓고 그녀의 스커트는 버렸다.     

 빈 자루가 되어 축 늘어져 있던 기운도 다시 회복되었다. 친구들 앞에서 더는 징징거리지 않았고, 동호회 회원들과도 친해져 호프집을 지나 노래방까지 진출했다. 낯가림이 꽤 오래가는 성향이었는데, 다급한 상황이 등을 민 것 같았다. 대담하게도 스타일리쉬한 여자에게 다가가 멋지다는 찬사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소개팅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것만은 아직 무리였다. 홀드를 움켜쥐고 다른 홀드로 이동을 하는 동안 온 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치며 단련되어 갔는데, 그 덕분에 웬만큼 부딪쳐도 아무렇지도 않듯이 심리적인 근육도 강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보다 더 날라리가 되어야 했다. 정말이지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동호회의 여자 회원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등짝을 뚜드려 맞아도 헤벌쭉 웃으며 윙크까지 하는 기쁜 웬수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어느 사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내 기억 속의 또로로로롱 우는 방울새로 남았고, 방울새는 여전히 귀엽고 발랄했다. 다정한 연인들을 보며 그녀를 떠올렸고, 그녀가 지금도 꽉 끼는 스키니에 연연해하는지 궁금해 할뿐이었다. 이성을 만나고 헤어지는 건 감정의 작동이고 그 작동은 이성적 논리를 벗어난 것이고 조절 버튼 자체가 없다. 때문에 방도라는 것도 없지만 다행히 판단은 한다. 나는 실연으로 인해 미친놈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점점 미쳐가는 게 두려웠다. 극복해 내지 못하면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냐고? 전전긍긍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는데, 몸을 혹사시켜야한다는데 동의했고 곧바로 실행한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햇살이 유리구슬처럼 팡팡 쏟아져 내리는 주말이었다. 암장에 가기 전에 대출한 책을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맞은편 횡단보도 앞에 그녀가 있었다. 긴 머리를 자르고 새 남자 친구와 팔짱을 낀 그녀가 신호가 바뀌자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신이 나서 웃던 그녀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는지, 보조개를 패며 살짝 웃었는지, 내게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건넸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예전의 내 팬츠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녀가 유독 좋아해서 주었지만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뒤돌아보며 확인까지 했는데, 구멍 난 왼쪽 뒷주머니, 그것은 빈티지한 분위기를 내려고 내가 사포로 문질러 놓은 것이었다. 그 팬츠는 그녀와 나에게 꽤 의미가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그녀가 받아들인 후, 1일을 찍은 날 입었던 크롭 데님팬츠였다. 우리가 네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그녀는 내게 고백했었다. 

 “우리가 1일 찍었던 날, 네가 입었던 크롭 팬츠, 그 깡총한 팬츠 아래로 드러난 네 발목이 미치게 섹시했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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