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세계에서는 마법이 모든 것이다.
마법 한 스푼이면 그릇에 음식이 가득 차고, 주문 한 번에 통째로 사라지기도 한다.
막 짜낸 실크 천에 마법을 걸면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되고, 가볍게 바디를 터치하며 주문 몇 마디 외우면 곧바로 여신과 같은 자태를 연출해 준다.
마법이 동원된 장난은 때때로 마을과 마을의 다툼이 되고, 골목의 패싸움은 마법자랑 끝에 일어나고, 피 터지는 결투도 마법 경쟁에서 비롯되기 마련이었다.
마법은 운송 수단의 윤활유이며, 생활의 편리에 편리를 더하는 것이며, 완벽하게 판타스틱한 축제다.
어디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마법이 활용된다. 손가락만 놀려도 펑, 펑, 마법이 피어오른다.
다만……’
미래의 눈이 스르르 감겼고, 꾸벅, 고개가 떨어졌다. 스마트 폰으로 ‘마법, 그 오묘한 라이프’란 글을 읽다 깜박 졸았는데, 문제는 낯선 것에 이마가 부딪친 것이었다. 난데없는 피부의 감촉을 느낀 미래는 눈을 번쩍 떴다. 의자 등받이를 잡고 있던 어떤 남자의 손등에 이마를 박은 것이다.
‘아우, 어떻게 해?’
수치심으로 대번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미래는 남자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습니다.”
라고 남자가 말했다. 창문에 비친 젊은 남자는 여전히 한 손으로는 등받이를 잡고 한 손으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창피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미래는 남자가 자리를 이동하든지 빨리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이번 정류장은 “도린 공원 앞, 도린 공원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안내방송을 들으며 굳건히도 서있는 남자를 흘깃 보고는 휴대폰을 가방 속에 넣었다. 이내 정류장이 가까워졌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남자가 몸을 돌려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미래는 몇 사람이 더 남자의 뒤에 붙는 걸 보며 걸음을 옮겼다.
9시가 다 된 시간인데도 내리는 사람이 꽤 많았다. 모두 미래처럼 야근을 하느라 퇴근이 늦은 건 아닐 것이다. 미래는 야근만 하면 버스에서 졸았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해일처럼 몰려드는 졸음을 피할 수 없었다. “퇴근 한 두 시간 늦었다고 죽진 않아.”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팀장은 은근슬쩍 업무 끼어 넣기의 달인이었다. 점심시간 다 되어 가는데, “이거 10분짜리인데 빨리 해치우고 식당으로 달리는 거 어때? 운동 삼아 뛰면 좋지.”라며 대답도 듣기 전에 떠넘겨 버리곤 했다. 퇴근 시간 임박해서는 “이런 건 삼십분이면 껌이다. 총알 속도로는 딱 15분. 내일 아침에 올릴 거니까 좀 빨리 해줘.” 라며 일거리 던져주는데 하다 보면 한 두 시간이 훌쩍이었다.
오늘은 퇴근 직전에 침구업체 광고 시안이 개판 오 분 전이라고 트집을 잡더니, 회의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가방을 챙기다 말고 원위치 했다. 그래도 팀원들의 눈치는 좀 보였는지 딱 한 시간만 야근하자고 서두르긴 했다. 그렇다고 그 말을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아무리 못해도 두 시간짜리였다. 소소한 주간 행사로 불금 치맥 타임을 약속했지만, 그런 건 정상적인 상관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치맥 약속을 미루자는 미래의 한숨 섞인 카톡에 영서의 답톡이 잽싸게 뛰어왔다.
[퇴근 시간 잡아먹는 놈 퇴치법 ]
1. 놈의 아구지를 날린다.
2. 사타구니를 불이 나게 걷어찬다.
3. 등짝을 팔꿈치로 쾅쾅 내리찍는다. 두 번 , 세 번 연속으로 가격해 병원으로 보내버리고 유유히 퇴근한다.’
[ㅋㅋㅋㅋㅋ 이런 배짱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답톡을 보낸 미래는 다시 컴퓨터를 켰다.
“퇴근들 안 해?”
화장실에서 화장을 새로 했는지 발그레한 얼굴로 돌아온 미스 황이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야근이래요.”
미래가 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미스 황이 “또?” 라고 대꾸하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35살 미스황이 슬리퍼를 탁탁, 소리가 나게 끌고는 팀장 앞에 섰다.
“팀장니임, 6시 30분에 소개팅 있거든요. 저 결혼하는 게 올해 소원이시라고 하셔서 또 소개팅 잡았단 말이에요오~~”
언제나 그렇듯 미스 황의 콧소리는 이번에도 프리패스였다. 맞은편의 미스 공이 눈꼴시럽게 흘겨댔지만 일찍 퇴근하는 게 장땡이지 뭐.
외근 나간 장대리와 김대리는 그대로 퇴근해버렸고, 남은 건 팀장과 미스공과 미래뿐이었다. 저녁 먹고 들어온 팀장은 갑자기 끄윽, 끅, 헛트림을 하더니 체한 것 같다며, 이건 이렇게, 요건 요렇게 바꿔보라고 몇 마디 조언하고는 퇴장해버렸다. 결국 둘이 남았다.
앞에서 속시원히 하지 못한 말, 뒤에서라도 쏟아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유형의 미스공이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좀 닥치라고, 귓구멍 터질 것 같다고 콧김 뿜어봤자 들어 먹히지도 않고 그럴 배짱도 없어 미래는 미스공을 끌고 분식집으로 내려가 떡볶이와 김밥을 쐈다. 밥 앞에서 욕하는 인간은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한 마디는 잊지 않고서. 밥 먹고 일하다 보니 퇴근이 더 늦었던 것이고 또 버스에서 꾸벅 졸았다.
구름이 잔뜩 낀 밤이었다. 미래는 대로를 따라 걸었다. 누군가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미래와 똑같은 보폭으로. 뒤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던 미래는 겁만 잔뜩 집어먹고는 한 커플이 도린공원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 붙었다. 공원 입구 가로등이 대낮처럼 환했고,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5분 정도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조금 더 빨리 걸으면 8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러면 됐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미래는 속도를 내 걸었다.
얼마가지 않아 커플들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어디 으슥한 곳을 찾아갔겠지. 미래는 걸음을 빨리해 앞서 걷던 몸집 좋은 여자의 뒤를 좆았다. 시간이 꽤 되어서인지 산책객이 별로 없었다. 잘못 들어왔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데 눈앞의 여자가 어느 사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거의 같은 보폭이었는데 갑자기 어디로 간 거야? 미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뛰었다. 어쩌면 이 넓은 공원에 혼자 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위협한다면?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쿵쾅거렸고, 자신의 섣부른 판단에 한숨이 나왔다. 땀나게 뛰었을 때 저 앞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니까. 나도 잘 모르…지만…” 띄엄띄엄 들리는 목소리를 좆아 미래는 달렸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교목과 관목이 빽빽이 우거져 있고, 높이 벋은 나뭇가지에 가려 가로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어둠이 동굴처럼 아가리를 벌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빨리 가자. 빨리. 스스로를 재촉하는데, 파박! 소리와 함께 앞에 있던 가로등이 꺼져버렸다. 어헉, 뭐야! 아니, 어떻게 가로등이 나가냐? 어쩌지? 어쩌지?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해댔다.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이었다. 뭔 일이 나도 감쪽같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피하려면 무작정 뛰는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려고?”
쇠를 긁는 듯한 쉰 소리에 소름이 좍 돋았고, 시커먼 덩어리 둘이 미래의 앞을 가로 막았다.
‘죽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벌벌벌 떨려 몸이 굳어갔지만 살기 위해 움직였다. 미래가 눈앞의 검은 물체를 피해 걸음을 옮기자, 큰 덩치가 한 걸음 옮겨 미래의 앞을 다시 막았다.
“비 비켜주세요.”
미래가 더듬대며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못 비키겠는데.”
“흐흐흐, 우리랑 놀자. 좋은 거 구경 시켜줄게.”
멀대처럼 키가 큰 놈이 질질 웃으며 말을 흘렸다.
“안 돼요! 놓아주세요. 놓아 달라고요!”
미래의 울음 섞인 애원에 덩치 큰 놈이 픽, 웃었다.
“우리가 언제 너 잡았냐? 뭐, 잡아 달라면 잡아 줘야지.”
놈이 미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놈의 힘이 어찌나 완강한지 손목을 쇠사슬로 묶는 것 같았다.
“사사사 살려주세요!. 어흐흑, 놓아주세요. 제발요.”
미래가 울음을 터트리며 빌었다.
카아아아… 비쩍 마른 놈이 괴상한 목소리로 웃었다. “왜 울지? 우리가 무섭냐? 뭐가 무서워? 이렇게 잘 생겼는데.” 놈이 계속 떠들어대며 미래의 턱을 잡아 올렸다.
까아아아악! 미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미래의 손목을 잡은 놈이 을러댔다.
“야, 소리 질러서 사람 부르면 우리가 쫄 거 같냐? 입 다물어! 열 받으면 확 죽여버릴 수 있으니까.”
으으으으, 미래는 죽을힘을 다해 따닥거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다리까지 풀려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차렷! 덩치 큰 놈이 미래의 두 팔을 잡아 옆구리에 딱 세웠다. “죽지 싫으면 가만히 있어!” 다시 한번 엄포를 놓았다. 두 팔에 가해지는 힘이 금방이라도 팔뼈를 아작 낼 것처럼 단단했다. 미래는 아아아아으, 고통에 찬 비명을 턱 밑으로 흘렸다.
스물여섯, 가녀린 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내 맘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생,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항상 웅크려 살았다. 그래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계획도 줄줄이 세워놨는데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하고…… 나 좋아하는 것도 마음껏 해보지 못하고……. 으흐흐흐흐흑, 눈물이 쏟아졌다. 놈들이 무서워 소리도 마음대로 못 내고 미래는 꺼윽꺼윽 울었다.
“가자.”
놈이 미래의 손목을 확 끌어당겼다.
“안돼요. 안돼요. 도와주세요. 도와줘요!”
미래는 울부짖으며 버팅겼다. 그렇지만 놈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딸려갔다. 그때였다.
“자기야! 자기야!”
어디선지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미래를 잡으며 놈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당신들 뭐야!”
“…… 너는 뭔데?”
뜻밖의 불청객에 당황했는지 약간의 텀을 둔 뒤 덩치 큰 놈이 물었다.
“나 말이야? 당연히 남친이지. 이제 그만 그 손 놓지!”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다는 듯, 한판 붙어보겠냐는 듯, 확 조저버릴 수 있다는 듯, 허세가 풍선처럼 부풀어 있고 부러 목에 힘을 팍 주고 있다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목소리가 광광거렸기 때문인지 놈이 주춤했다.
“자기야! 화난다고 혼자 가면 어떻게 해! 그러다 큰 일 난다니까!”
“…… 으어어어,”
미래의 입에서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낯선 사람이지만 너무 반갑기도 했고, 그러다 곧 남자의 정체가 의심스러웠고, 불안이 가중되자 맞장구칠 말이 나와 주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 자기 손을 왜 그쪽이 잡고 있어? 이거 실례잖아!”
남자가 왈칵 미래를 끌어 당겼고, 미래는 남자 옆구리에 찰싹 붙었다.
“하, X발, 진짜 열 벋치게 하네. 아우, 어디서 X같은 것이 튀어 나와서는!”
놈이 졸지에 먹잇감을 놓친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렸다.
“뭐라고? 해보자는 거야!”
남자가 고개를 들이밀며 응수했고, 놈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제스처로 카아악 가래침을 끌어올려 타악, 뱉었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겁을 주었으면 쏘리로 방석을 깔아줘도 부족한 건데, 맞짱 뜨자 이거야? 좋아. 들어와!”
남자가 그 즉시 파이터의 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놈보다 훨씬 슬림한 스타일로 정강이뼈라도 가격을 당하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싸움은 스타일로 하는 게 아니었다. 가로등 불마저 나가버리고 겨우 달빛에 의지해 있었지만 남자의 기개는 날카롭고 민첩하고도 완연해보였다. 그 때문인지 놈은 즉시 태세를 취하지 못하고 침을 찍 찍 내뱉으며 빈정거렸다.
“자기 좋아하고 앉았네. 너 이 여자 어떻게 해보려고 선수 치는 거지? 생긴 것부터 쪽 빠져서 아주 잘 놀겠어.”
“뭐라고? 와, 개차반으로 살다보니 모든 인간이 개차반 짓만 하면서 사는 것 같지? 너 아무리 철면피라고 해도 말이다. 너 처음 보는 여자한테 자기라고 부르면서 생쇼할 수 있어? 레디 고가 없다면 명배우도 못하는 짓이야.”
“당연 나는 못해. 너는 개쓰레기니까 하는 거고.”
“맞아. 이 여자 니 이름 한번도 부르지 않던데? 너한테 달라붙지도 않고. 너희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지?”
멀대같은 놈이 정곡을 찌르며 거들었다.
“똥덩어리들 앞에서 우리 이름을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지. 생각 없이 막 부르다 똥 묻으면 어떡하냐? 니가 책임질래?”
“하, 진짜 주댕이가 개시궁창이네.”
“누가 할 소리”
“허이구, 주둥이만 씨불거리지 말고 그 여자와 찐하게 키스해봐. 연인처럼 아주 찐하게 딥키스 말이야. 아주 물고 빨으라고. 그럼 암말도 안하고 그냥 보내줄게.”
그 말에 미래의 심장이 쿵쾅쿵쾅 자지러졌다. 이 미친놈들! 미친놈들! 이 상황에서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입 맞추다 심장마비 오면 어떻게 하라고! 심장마비 걸려 죽으라고 고사지내는 거냐! 이 주둥이 뻘건 놈들아! 미래는 부들부들 떨다 더는 참을 수 없어 폭발했다.
“흐흐흑, 너희들 같으면 이 뭣 같은 상황에서 입 맞추고 지랄할 수 있어!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없는 짓을 하라고 하는 너희는 사람 새끼도 아니야! 그냥 죽여! 아주 깨끗하게 죽여 버리란 말이야!”
미래는 펑펑 울면서 악을 썼다. 왜 공원길로 들어서서 이 수모를 견디고 있는지, 한번 새겨진 수모는 뼈에 스며들어 지워지지도 않는 건데, 그러면 평생 고통이 되는 건데. 차라리 죽어버리면 아무 것도 모를 텐데…….
“아씨, 너 왜 우리 자기 울리고 그래! 너 진짜 죽었어!”
남자가 서럽게 울고 있는 미래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놈을 향해 소리쳤다.
“너부터 죽어야지! 이 새끼야, 순서나 지켜!”
일갈한 놈이 남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미래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 시키던 남자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놈의 주먹이 남자의 귓바퀴를 스치다 말았다. 놈이 다시 주먹을 내질렀지만 남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 까닥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이 X벌 새끼가!” 놈의 뚜껑이 열렸고 화를 참지 못해 발까지 동원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는 풍선인형처럼 이리저리 피할 뿐이었다.
“너 살리려고 피했다는 거나 알아둬라. 그래도 한 대는 갚아줘야지.”
남자가 손가락을 쭉 내밀어 놈의 목젖 께를 찌르는가 싶었는데 놈이 헉,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헉, 소리는 미래 입에서도 나왔다. 리얼 공포가 바로 옆에 있는 남자가 아닌가? 이건 싸움의 고수 따위를 가리고 말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싸움 귀신이었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아닌지도. 어쩌면 이 남자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지금까지 개드립를 친 것인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질척거리지 말고 착하게 살아. 이 찌끄래기 같은 새끼들아.”
남자가 야멸치게 내뱉고는 미래의 어깨를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미래는 거부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당장 죽음이라는 살벌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남자를 따라 걸음을 뗐다.
“아씨, 거기 서. 주 죽여 버릴랑게.”
멀대같은 놈이 쭈볏대며 목청을 높였지만 좆아올 배짱은 이미 밥 말아 먹어 버린 지 오래. 두 놈은 합심해서 쌍욕만 한 바가지 내질렀다.
“쓰레기들이 잘도 조잘거리네. 대갈통 깨버리기 전에 빨리 꺼져!”
걸음을 멈춘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벽력같은 고함이었다. 미래는 오금이 저려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진정한 두려움이 바로 옆에 있었다.
“왜 그러세요? 긴장이 풀리니까 다리까지 풀리지요?”
“아, 아니요. 좀 힘들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미래는 굳은 어깨를 풀기 위한 것처럼 움직여 남자의 손에서 벗어났고 우물대며 말했다.
“저, 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아, 뭘요. 저기……”
“네!!?”
“아니, 왜 놀라세요? 뭐 있어요?”
남자가 한 발 물러서서 미래의 뒤를 살펴보았지만 당연히 아무 것도 없었다. 민망해진 미래가 말끝을 흐렸다.
”좀 전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한 것 같았……”
“아아, 매일 이 시간에 이 길로 지나다니세요?”
“아니에요. 오늘 처음이에요.”
“그렇구나…….”
뭔가 아쉬운 걸까?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는데, 뒤이어 시이플, 이라는 말이 남자 입에서 흘러나왔다. 흠칫 놀란 미래가 남자를 흘깃 보는데, 그때 바로 옆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미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환한 가로등 빛을 피해 남자는 걷고 있었다. 미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남자와의 거리를 벌렸다.
미래는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신경 쓰였다. 그런 말은 뭔가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든지, 화가 나든지 하면 뱉어내는 쌍욕이었다. 어금니를 아득 물고 이빨 사이로 뱉어내면 그렇게 발음할 수밖에 없는 욕 말이다.
한번 남자가 무서워지자 계속 무서웠고, 대로변까지는 아직 300여미도 더 남은 것 같았고, 마음 같아서는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 한번 더 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미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뒤돌아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착하게 생겼는지 안심해도 되는지, 아니면 겁을 먹고 달아나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가로등 빛을 벗어나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가로등 불빛도 좋지만 으슥한 것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에요.”
이게 뭔 소리? 속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남자가 덧붙였다.
“흐흐흐, 누군가는 그 으슥함을 즐기고 있을 테니까요.”
웃음소리가 까슬한 맹수의 혀처럼 미래를 등줄기를 훑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팔을 문지르지도 못하고 미래는 숨을 참았다. 숨결만 새어나가도 남자가 찍어 누를 것처럼 두려웠다.
도대체 어떤 또라이가 으슥함을 즐깁니까? 꼭 그래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그 어떤 인간도 으슥한 건 싫어해요. 제발 저 혼자 가게 해주세요. 라고 속으로 빌고 빌며 미래는 대로가 얼마나 남았는지 목을 빼고 봤지만 코빼기도 안 보였다.
“태풍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 같지만, 태풍을 잘 견디어내며 그만큼 단단해지지요. 사람이 단단해진다는 건 망치 한 자루 얻은 것만큼 든든한 일이에요. 그렇지요?”
망치? 전동 망치? 버튼을 누르면 따다다다닥 사람의 대갈통을 깨버릴 수도 있는 망치 말인가? 미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네. 모기만한 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미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려서인지, 아니면 맞다는 맞장구에 흥이 나서인지 남자가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언제 변해도 이상하지 않는 거예요. 사람은 말이에요. 변화의 물결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천변만화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요.”
“네.”
아니, 이 놈의 길은 왜 이리 천리만리 만만리로 멀기만 하고, 이 남자는 왜 계속 꿍꿍이 담긴 말을 던져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속시원하게 “너 잡아 먹을란다. 어디 한번 도망가 봐!” 라며 송곳니 드러내고 덤비든지! 이 속도로 140여 미터만 더 가면 말라죽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거리로 보아 300여 미터 앞이 안전한 대로 일 것 같은데 말이다. 미래는 바짝 타들어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혀를 내밀어 겨우 축이고 입을 열었다.
“저, 곧 대로이니까요. 지금부터는 혼, 혼자 가도 돼요. 정, 말 감사했어요.”
“아, 벌써 대로입니까? 음…… 흐읍…”
왜요?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입맛을 다시는 거예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미래는 속으로 싹싹 빌고 애원했다.
남자는 말없이 걸었다. 미래는 있는 대로 귀를 세우고 있는 대로 눈을 크게 뜨고 앞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자동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려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가로등이 없었고 어둠이 짙은 휘장처럼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너무 겁먹지 마세요.”
“뭐, 뭘요?”
“겁먹고 버벅대면 상대는 기세를 올리게 되거든요. 만만한 먹잇감을 만났으니 껌인 거예요. 껌이 되면 어떤 인간한테든 질겅질겅 씹히기 쉬워져요.”
“아, 네.”
“오늘 도끼 한 자루 얻었잖아요. 도끼자루 치켜든 기세로 팔팔하게 바뀌어도 좋을 것 같아요.”
“아,”
이건 감탄사가 아니었다. 갑자기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반딧불이들이, 무수히 많은 반딧불이들이 꽁무니에 불을 달고 아치를 그리며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기적과 같은 판타지가 눈앞에서 펼쳐지자 미래는 실감을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저 앞이 대로예요. 조심히 가세요.”
“네?”
“…면 아가씨, 그럼 또 봐요.”
“아, 여보세요. 잠깐만요.”
되돌아서 뚜벅뚜벅 걷는 남자를 따라 미래가 말했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했어요.”
“빨리, 조심히 들어가세요. 조금만 가면 대로예요.”
남자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더는 보이지 않았고, 미래는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지만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래는 대로를 향해 뛰었다. 반딧불이들이 미래를 따라 화르르르 몰려왔고, 마침내 환한 불빛이 꽃처럼 피어나는 대로에 다다르자 미래는 꿈에서 깨어난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서야 남자가 ‘구면 아가씨’라고 말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아, 미래는 비로소 진심으로 감탄하며 남자가 사라져 간 어둠의 저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