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숟가락을 놓은 남자는 거실로 나가 리모컨을 눌렀다. 75인치 TV가 켜지고 하반기의 수출부진으로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채널을 돌렸다. 몇 개의 프로그램을 거쳐 개그프로가 나오자 남자는 리모컨을 탁자에 내려놓고 소파에 깊숙이 눌러앉았다. 옛날 노비 분장을 한 개그맨이 상전 위에 노비라며 상전의 밥상 앞에 철푸덕 주저앉는 장면에서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남자도 따라서 껄껄 웃었다.
왕왕 울리는 거실 TV 소리가 여자가 보고 있던 드라마를 집어 삼켰다. 여자는 이어폰을 끼고 조금 더 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판토마임 같은 장면을 몇 번 쳐다보다 꺼버리고 설거지를 했다. 수도꼭지를 최대한 열어 접시를 앞뒤로 헹구자 물이 사정없이 튀었다.
빠르고 격렬한 최신 힙합이 울리고 휴대폰을 힐긋 본 남자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오랜만이다.”
남자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TV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리자 손가락으로 한쪽 귀를 막고 소리를 높였다.
“뭐라고? 크게 말해봐.”
여자는 목을 길게 빼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거래처는 아니고, 후배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친구인 모양인데 누굴까? 요즘 하는 일이 지지부진해지자 부쩍 신경이 예민해진 남자는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 시간 잘 가네.”
조금 놀랍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는지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여자는 설거지를 멈추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 앞에서 짜증난 것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없을 때 남자는 너털웃음으로 슬쩍 비켜갔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 여자는 남자의 눈이 살짝 접혀져 있는 것을 알았다. 오늘의 너털웃음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 만에 남자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여자를 다소 안심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남자가 예전의 너그럽던 연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행복한 한 때였던 그 시절로. 설거지를 마친 여자는 남자 옆에 앉았다.
“누군데 그렇게 재밌게 전화해?”
남자는 여전히 TV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정석이 자식 애기가 벌써 돌이란다.”
“아, 그래. 근데 왜 그렇게 웃었어?”
“그 새끼가 나 닮은 놈 말고 너 닮은 딸 빨리 낳으란다. 애새끼를 낳더니 아주 미쳐간다.”
그렇게 말한 남자가 소파 위로 휴대폰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톡이 날아왔다. 톡을 열어 힐긋 본 남자의 한쪽 입술이 일그러졌다. 미친 놈, 누가 보고 싶다고 안달을 부렸냐?
“…… 애기가 아주 예쁘네.”
두 뺨이 보름달 같은 아기가 벙싯거리며 장난감을 흔들고 있는 사진을 본 여자의 입이 개화하는 꽃잎처럼 살그머니 벙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면 죄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는 아이를 원했다. 아주 절실히 원했다. 그래서 남자 몰래 피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 1년이 다 되어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며칠 전, 여자가 조심스럽게 불임병원에 가야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남자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여자는 하는 수 없이 혼자서 불임여부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왜? 혼자서 조바심을 치던 여자는 남자가 만취했을 때 슬쩍 찔러보았다.
“나 정상인데 왜 우리에겐 아기가 생기지 않을까?”
그 말에 남자가 눈을 치떴다.
“그래서 내가 무정자증인지 확인해봐야겠다 이거냐?”
술 냄새를 훅훅 끼치면서 싸늘하게 내뱉는 남자의 말에 위협을 느낀 여자는 입을 다물었고, 동시에 남자가 입대 기념으로 정자기증을 한 적이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 때는 농담이라고 여기고 흘려들었는데, 어쩌면 이미 검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도 문제가 없다면 어째서 임신이 되지 않는지, 여자는 산부인과 의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의사는 난자와 정자 문제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며 정밀검사를 권했다.
여자의 입에서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남자는 벌컥 화를 냈다.
“정밀검사 같은 소리 집어 치우고, 애기는 너 혼자 낳아서 키워!”
“혼자서 어떻게…”
여자가 난색을 표하자 남자는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흥,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빙신이 바라는 것만 많아!”
“………”
여자는 입을 벌린 채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이 적나라한 말이 어떻게 남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그녀의 최대 약점이자 치부였다. 치부가 느닷없이 폭발적으로 까발려지자 마침내 주술이 풀려버렸고 더는 주술의 힘에 기댈 수 없기라도 하는 듯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여자는 어디든 매달려야 살아가는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새끼발가락이라도 걸쳐야 제대로 숨을 쉬고 안심을 했다. 모질게 학대하던 계모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괴물 취급을 받았고, 내던져진 보육원에서는 누군가에게 엉겨 붙어야만 잠들 수 있어 모두를 기겁하게 했다. 자립할 나이가 되는 것이 두려워 그녀는 매일 밤 울었다. 밤 귀신이냐? 왜 밤만 되면 우냐는 핀잔과 함께 선생은 혼자라는 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도약이라고 달래기도 했지만, 그 말이 얼마나 허풍인지 설명할 수 없어 그녀는 몸부림을 쳤다.
여자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혼자 남겨질 때마다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혼자라는 공포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 칠흑 속에 혼자 남겨졌던 그 두려움, 처절한 비명 속에서 혼자 울어대던 그 무지막지한 두려움 속으로 또 다시 던져지는 것만 같아 누구에게든 달라붙어야만 했다. 그런데 여자의 절박한 심정을 알아챘다 싶으면 모두 떠나갔다. 친구도 남자도. 만나고 버려지고, 또 만나고 버려질 때마다 여자는 초강력접착제가 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정신과에서는 여자의 유아기적 트라우마가 원인이라는 추측을 했지만 구체적인 것은 알아내지 못했다. 어린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도 증언해 줄 수 없었고, 여자 또한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자 울었다. 혼자가 무섭다. 혼자 살수는 없다.’ 는 말 외에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의사는 여자를 ‘의존성 인격장애’로 분류했고, 여자는 ‘의존성’은 인정했지만 ‘인격장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가 상대의 목이 부러져라 기대고 눌러 앉는 건 아니었다. 돈을 갈취하는 것도 아니었다. 고의적으로 상대를 괴롭히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손톱만 걸쳐져도 다행으로 여겼다. 그녀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함께’ 라는 시그널이 분명하다면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그녀를 부담스러워했고, 남친이라는 작자들도 여자를 거머리 떼 듯 떼어내려고 안달을 했다.
남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에 만났다. 어스름이 짙어지던 초저녁에 담배를 사러 온 남자는 여자를 위해 초코바 한 박스를 계산했다. 여자가 너무 많다고 한 개만 빼내자 남자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 남자는 삼사일에 한번 씩 늦은 밤에 와서 담배와 맥주와 소세지 3개와 삼각 김밥 4개를 계산하고, 소시지 한 개와 김밥 두 개를 여자 앞으로 밀어놓고 나갔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올 때마다 계속 자신을 위해 소시지와 김밥을 계산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여자는 목이 메었다. 그 당시 여자는 친구도 변변하지 않았고 남자친구도 없었다. 편의점 사장의 친절에 기대어 혼자라는 두려움을 견디고 있었다. 사장은 유부남이었고 가끔 사장의 아내가 편의점에 나타나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했는데, 그 싸늘한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장과의 친교는 위태위태했다.
여자가 남자의 옷을 끌어당기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사정없이 뿌리쳐버린 뒤 쿵쾅쿵쾅 방으로 들어갔다. TV를 틀고 볼륨을 높였다.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다섯 명의 남녀 연예인들이 왁자지껄 농담따기를 하고 있었다. 한적한 강변에서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올리며. 여자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 남자는 그때 여자에게 낚였다. 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친절과 그녀의 위태로운 몸매에.
날씨가 몹시 궂은 퇴근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남자는 중식당을 찾아 신호등을 건넌 후 자신의 원룸이 있는 주택가를 지나 골목시장 입구에 있는 중식당에서 매짬탕(매운짬뽕+탕수육) 세트를 먹었다. 얼얼한 입도 달랠 겸 담배를 피려고 찾으니 없었다. 남자는 시장 건너편 도로가에 있는 편의점을 떠올렸다.
편의점 문을 열자마자 “어서 오세요.” 라는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카운터 앞에 서자 여자는 “안녕하세요.” 라고 또 인사를 했다. 남자는 작게 미소 짓고 있는 여자를 보며 담배를 주문했다. 여자가 “찾으시는 담배는 어떤 것일까요?” 라고 물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종알대기 좋아하는 앵무새와 닮아 있었다. 남자가 던힐이라고 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대꾸 같았다. 여자는 몸을 돌려 선반 위로 두 팔을 올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따라 그녀의 목도 함께 늘어났다. 그녀가 제일 위에 있던 던힐을 찾아 까치발을 들자 그녀의 가느다란 목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자지러지며 헐떡헐떡 격하게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남자는 순간 마른 침을 삼켰고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계산을 끝낸 던힐(dunhill)이 남자 앞으로 밀어졌다. 그녀의 목뼈를 생각나게 하는, 그녀 손가락뼈와 닮은, 그녀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큼 가느다란 그녀의 척추뼈 모양의 hill이란 글자를 바라보며 남자는 또 다시 마른 침을 삼켰다. 자꾸 침이 고이는 게 못마땅했지만 생리현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찌릿한 흥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뭉글뭉글 작은 구름덩어리가 떠다니고 있는 마음이 당혹스럽다 못해 짜증이 났다. 너무 낯선 느낌이었고 화를 내며 도망쳐야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쿵쾅쿵쾅 편의점을 나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던 남자는 눈에 뜨는 초코바 박스를 집어 들었고, 계산을 마친 후 그녀 앞으로 밀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 해보는 머쓱한 짓이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씩 편의점을 드나들다 남자는 여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밥 한번 먹자며 휴대폰을 내밀어 전화번호를 요구했다.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다 남자의 휴대폰에 꾹꾹 제 번호를 찍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밤을 보냈다. 격렬하게 일을 마친 뒤 남자는 자신의 심장을 쫄리게 하던 여자의 목뼈를 손가락이 닳도록 매만졌다. 여자는 신음 소리 대신 명랑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마치 오랜만에 사람 꼴을 본 것처럼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 흔들었다. 여자는 조울증환자처럼 침울해지다 곧 자지러지게 웃었다.
남자는 무척이나 헷갈렸다. 여자가 순진무구한 건지 무뇌적 사고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또 앞으로 다시 여자를 만나야 할지 여기서 그만 두어야 할지 판단도 되지 않았다.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가 얼마나 단단한지 꾹꾹 눌러보았고, 남자의 완강한 뼈와 탄탄한 근육에 감탄했다. 또한 남자의 짝 찢어진 눈 꼬리를 위로 길게 밀어 올리며 말했다. “눈매가 매처럼 날렵해서 누구든 함부로 하지 못하겠어요.”
남자는 되물었다.
“살기등등한 게 아니고?”
이전의 여자들이 헤어질 때마다 한 말이었다. 눈빛이 너무 살벌해서 무서워. 눈빛 좀 가라앉혀. 눈에 힘 좀 주지 마. 싸우려고 덤벼드는 것 같잖아. 라고. 남자도 자신의 눈빛이 사납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는데. 남자가 뭐라고 변명하기 전에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안 무서운데요? 든든해 보이고 좋잖아요.”
사귀기로 한 두 사람은 이내 함께 살기로 했다. 결혼식은 하지 않았다. 결혼식비용으로 아파트 보증금을 내야 했다. 남자는 시골에 계신 노모에게 여자를 데리고 가서 인사 시킨 후 곧바로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즐거움에 기댄 대부분의 것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러웠지만 차츰 서로의 내밀한 것이 드러나고 그것들에 놀랄 때마다 기대치가 영하권의 수은주처럼 곤두박질쳤다. 두 사람은 그럴수록 서로의 살을 부비고 비벼 온도를 올려야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고, 불이 나도록 서로의 살을 비볐는데 약효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도 여자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불만도 섭섭함도 상쇄시켜주었다. 그녀는 남자가 벌어온 건 모조리 저축하고 이런저런 부업으로 생활을 했는데, 그녀의 야무진 손은 무엇을 하든지 빛이 났다. 하루라도 빨리 월세 집에서 벗어나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그녀의 목적에 남자는 동조하여 앞발가락이 빠져 나오는 양말을 던져주며 원상복구 하라고 요구했다. 남자의 험악한 말을 견디지 못해 때때로 여자의 마음에 구멍이 숭숭 나지만 누군가에게 몸이 닿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해 여자는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았다.
온순하고 순종적인 여자의 성정은 남자도 인정했다. 부지런하고 알뜰하여 15평 아파트는 언제나 말끔했다. 음식솜씨도 좋아 여자 덕분에 거북하던 아침 식사가 자연스런 습관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살림 솜씨와 검소한 생활은 트집 잡을 여지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혼자 있는 걸 보지 못하고 달라붙는 것도 좋았다. 막 깎은 배처럼 사근사근하고 별 볼일 없는 농담에도 나긋나긋 휘어지는 여자에게 어떻게 진절머리가 나는 것인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숨통을 조이듯이 막무가내로 엉겨 붙고, 무엇이든 함께 하기를 바라고, 끈질기게 물으며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길을 요구하는 횟수가 쌓여 키를 넘자 알뜰이고 나발이고 간에 불만이 폭발했고 남자는 살벌한 눈초리로 여자를 꿰뚫어 버렸다.
여자는 억울하고 억울했다. 남자가 내뱉은 ‘혼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말은 머저리 등신 바보 천지이며 남의 피나 빨아먹고 연명하는 기생충이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절대로 천지 짓을 하지 않았고 남의 등에 빨대를 꽂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혼자서’가 미치게 싫을 뿐이었다. 그래서 좀 안달했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 그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신병자로는 납득하지만 따뜻하게 품어준다는 건 똑같은 정신질환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따갑고도 야멸찬 시선을 당당하게 온 몸에 박을 배짱도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비밀이자 치부가 새나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손톱 밑이 까지도록 무리하게 일을 했고 누굴 만나든 깍듯이 대했다. 덕분에 그녀는 부지런한 아르바이트 아가씨, 남자의 착한 아내, 싹싹한 우리 동네 젊은 여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부지런하고 싹싹해 보였던 건 거짓이었다고, 위장이었다고, 지독한 의존증을 감추려는 제스처였다고 남자가 나발을 불었다. 그건 지금까지 남자가 그렇게 생각해왔다는 뜻이기도 했고, 더는 위선 떨지 마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나아가서는 너 따위 필요 없으니 알아서 꺼져달라는 주문이었다. 이제 남자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귀찮게 달라붙는 찐득이 취급을 할 것이고, 경멸의 눈길만을 던질 것이고, 잡아 떼어내다 안 되면 끝장을 내버릴 것이다. 그 동안 여자가 수도 없이 겪어 왔던 그 수순대로.
그래도 결혼까지 했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그럴 수 없는 거 아니냐고, 여자는 애처로이 남자를 올려다보았지만, 남자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이 여자를 삼켜 흔적도 없이 태워버릴 것 같았다. 데이트 할 때는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고, 간혹 다툴 때에도 드러내지 않던 어떤 결심이었다. 남자의 결심을 읽은 여자의 마음에 분기가 탱천했다.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여자는 그런 생각만으로도 죄를 지은 양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여자는 목을 쭉 뽑아 남자의 얼굴에 닿으려 했다. 두 눈에 애원을 가득 담은 채. 실수였다고, 잘못 말한 거라고, 미안하다고, 남자가 말해주기를 바랬다.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잡았다. 잡고 흔들었다. 제발, 아니라고……, 라는 말이 여자의 입에서 나가기도 전에 남자는 사정없이 여자를 뿌리쳤다. 쿵쾅쿵쾅 발소리도 요란하게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남자가 사라진 텅 빈 공간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끝이야. 끝이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기가 있다면……. 아기가 있었다면! 남자가 그녀를 버려도 그녀를 지탱해줄 아기, 그렇다. 그녀는 더 이상 남자(남자들)에게 기대지 않고 아기에게 끈을 이어 살아가고 싶었다. 남자의 매몰찬 등짝을 보면서 살그머니 웃는 것도 아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아기를 낳을 생각이 아예 없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기, 아기가 있다면! 어떻게든 아기를 낳을 수 있다면! 아기를 낳아서 아기와만 살고 싶었다.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고 오직 아기와 둘이서 살고 싶었다. 아기를 기대할 수 없다면 끝나는 게 나았다. 그래. 맞아. 누가 또 날 품어 주겠어. 아니,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야. 여자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결이 일어난 손톱을 이빨로 당겼다. 손톱밑살까지 쭉 찢어졌다. 입이 떡 벌어졌다. 찢어진 손톱 살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새빨간 피가 그녀의 심장에서 콸콸 쏟아지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여자는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삶이 모든 의미를 잃었다. 그래, 죽어야겠어. 그길 밖에 없어. 좋아. 죽어버리자. 그렇게 결심을 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여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혼자서 숨이 끊어지고 뻣뻣하게 굳어갈 생각을 하면 몸서리치게 무서웠다. 그렇지만 죽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남자와 함께 있는 지금이 죽어야 할 때였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난 여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움직였다. 부지런히 남자의 식사를 준비하고 여기저기 깨끗하게 닦고 정리했다. 남자와 함께 밥을 먹으며 언제나처럼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전날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남자의 외출복을 꺼내서 건네주었고, 문밖까지 나가 출근하는 남자를 배웅해주었다. 혼자 남게 된 여자는 그 즉시 몇 군데 병원에 들러 불면증을 호소하고 수면제를 처방받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독극물 또한 알아보았다. 청명한 날씨가 이어졌다. 화사하기 짝이 없는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지만 어떤 떨림도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 어떤 의미도 없이 그녀와 함께 사라질 것들이었다.
여자는 김정식의 아기 사진 위의 이물질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휴대폰 액정에 튄 음식물이 굳은 것인데, 마치 아기의 볼에 부스럼이 난 것처럼 보였다. 이물질을 다 닦아내자 아기는 볼 부스럼 한 점 없이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아기의 웃는 모습이 그녀의 심장에 부드러운 화살처럼 박혔다. 환상이 전개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고 눈가가 간지러웠다.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겁이 났고 흔들려선 안 된다는 의지가 작동했다. 내일은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난 의미 있는 날이었고, 여자가 사라져야 할 디데이였다. 여자는 남자의 휴대폰을 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여자의 뒷모습을 힐긋 본 남자의 미간이 접혔다. 요즘 여자의 생쇼가 많이 늘었다. 평소처럼 행동하다가 갑자기 귀신처럼 고요해졌다. 오싹해서 되돌아보면 핏기 없는 얼굴에 찬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어디가 아픈가 했다. 만약 어디가 아팠다면, 알아달라고 보채는 유형이라 벌써 입술이 부르트도록 떠들어댔을 거다. 그렇다면 아픈 건 아닌데……. 아기 문제로 크게 다툰 것 때문에 빈정 상했다는 거군. 시위하는 거냐? 아주 가지가지 해요. 남자는 흥, 코웃음을 쳤다.
남자는 아직 아기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너 닮으면 망하는 거고, 제수씨 닮으면 흥하는 거다. 라는 친구 놈들의 악의 섞인 농담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다. X같은 세상에선 우선 돈, 그리고 돈의 양과 함께 오는 힘이 갖춰져야 모가지 똑바로 세우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법이었다. 적어도 아이는 자신처럼 맨땅에 헤딩하고 헤딩하다 대가리 깨지고 쌍코피 흘리다 벅벅 기며 눈꼬리 찢는 악바리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정도 여건이 개선되고 또 자신도 쏙 빼닮지 않고 여자도 똑 닮지 않은 별개의 생명체라면 생각해 볼 의향은 있었다.
여자는 반듯한 침구를 다시 잡아당겨 빤빤하게 펴고 남자의 커다란 베개를 두드려 고루 편평하게 만들었다. 자리에 누운 여자는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벽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아무런 요구도 없이 그녀를 막아주는 보호막이었다. 벽으로 스며들 수 있다면 천 번이라도 그렇게 했으리라. 벽에 고개를 대는 것만으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증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 남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잠든 척 하는데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았다.
한 마디 하려던 남자는 여자의 가늘고 긴 목을 보는 순간, 말이 증발해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의 가느다란 목뼈의 비명이 떠올랐고, 그 목뼈가 수직의 가파른 계단과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불안감 사이로 기묘한 흥분이 일었다. 그녀의 목뼈를 아니, 그녀 자체를 와르르 무너뜨려버리고 싶은 급격한 욕망에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여자는 눈도 뜨지 않고 잔뜩 움츠렸다. 그녀의 좁고 가느다란 목이 쇄골 사이로 파고들었다.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내리자, 그녀는 다리를 오므리고 그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아로마딜로처럼 둥글게 말린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화가 치밀었다. 그는 다짜고짜 그녀의 두 다리를 빼 벌리려했고 여자는 무릎을 딱 붙인 채 저항했다. 하, 싫다고? 처음으로 보인 여자의 행동에 남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남자의 웃음소리에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약점,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녀의 약점을 아는 모든 자는 때때로 그런 식으로 웃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거부의 몸짓을 보일 때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죽여 버릴 거야. 다 죽일 거야. 너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면 돼. 그러면 모든 게 끝나지.’ 라는 속엣 말로 자신을 달랬었다. 그 참담하던 기분을 남자의 품에 안기면서 거의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송곳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그래, 실컷 웃어라. 앞으로는 나를 보며 그렇게 웃을 수 없을 테니까.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멀거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손을 벋으려다 멈칫했다.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세상의 모든 것을 흘려내 버리는 듯한 그 공허한 눈이 무섭도록 서늘했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이 허공으로 들린 것처럼 위태로웠다. 남자는 여자를 달래듯 무릎을 살살 쓸어주었다. 여자는 남자의 의도를 헤아릴 수 없었다. 남자도 여자의 속을 알지 못했다. 남자는 살그머니 여자의 다리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사람의 생각은 각자의 섬으로 떠돌지만 몸은 서로에게 향하기도 하는 게 이율배반인건지, 당연한 이치인 것인지 그것을 누가 알까?
남자는 검지로 여자의 허벅지 안쪽에 동글동글 맴을 그리다 손가락 네 개를 벋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길고도 집요하게. 여자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열었고, 남자는 여자 위에 엎드려 젖가슴을 물었다. 여자의 목구멍에서 쇠판을 긁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남자의 엉치 뼈를 건드리더니 순식간에 척추 뼈를 타고 올라가 정수리를 강타했다. 흥분으로 뇌가 멈추어버리는 것 같았다. 남자는 애걸하듯이 여자에게 달라붙었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바람소리가 말울음소리처럼 거세게 몰아쳤다. 마치 먼 섬의 전설이 실현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 전설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고 누군가에게는 고통일 것이다. 그녀는 고통이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섬으로만 떠돌았는데 이제 끝낼 때가 된 것이다.
밤이 우물처럼 깊어졌고, 두 사람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공기가 거칠게 나뒹굴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퇴근할 때 비를 흠뻑 맞은 데다 급격히 기온이 내려갔던 게 이유일 것이다. 계속 되는 기침소리에 여자는 잠이 깼다. 그때 문득 몽롱한 정신이 소근 댔다. 남자에게 약을 먹여야 한다고. 그녀가 먹고 사라지려 했던 서랍 깊숙이 숨겨져 있는 약. 그 약은 이제 다른 주인을 찾아가야 한다고. 어쩌면 그녀는 새로운 희망을 싹 틔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당장 일어나라고 채근했다. 잠이 덜 깬 그녀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칠비칠 주방으로 간 그녀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물을 따르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무엇이었지? 아, 그녀는 서랍을 열어 위험물 봉인하듯 여러 번 접고 접은 약을 집어 들었다. 방으로 들어가 물과 약을 내려놓고 남자를 살그머니 두드려 깨웠다.
“약 먹어. 감기약.”
남자가 눈을 감은 채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여자는 남자의 입에 컵을 댔고, 남자가 입을 살짝 벌리자 가만히 기울여주었다.
“약 쏟아지니까 입 더 벌려야지.”
여자의 말에 남자가 실눈으로 여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 약 아니잖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한 여자는 남자의 입에 물 컵을 다시 대주었다. 갈증이 났는지 남자는 물 한 컵을 꿀떡꿀떡 다 마셔버렸다.
“물 좀 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불 위로 엎어졌다.
주방으로 나간 여자는 컵에 물을 따르고 약 봉지를 열어 쏟아 넣었다. 미세한 분말이 물에 뿌옇게 번졌다. 컵을 살짝 흔들어 제대로 섞이게 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의식을 거행 하듯 컵을 받쳐 들고 남자를 깨웠다. 완전히 잠이 깬 말끔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