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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Sep 06. 2024

<책> 구의 증명/최진영

믿어야 보이는 세계.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기이하고 섬뜩하다. ‘구’는 죽고, ‘담’은 죽은 ‘구’를 먹는다. ‘구’를 먹으면서 ‘담’은 ‘구’와 함께 했던 시간을 회상한다.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애도의 방식에 놀라 아직 몇 페이지 읽지도 못했는데 가슴이 쿵쾅 거렸다. 사람을 먹는다고? 도대체 왜? 놀란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를 끝냈을 때, 처음의 충격은 온데 없이 사라지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에 가슴이 아렸다. ‘구’를 먹는 ‘담’에게 왜?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건 옳고 그름이나 이해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담’에게 ‘구’의 죽음은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따위의 심리적 단계로 이겨내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실보단 재난에 가까웠고, 더 나아가자면 한 세기의 끝인 ‘종말’적 감각에 가까웠을 거다. 딛고 선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것도 길바닥에서 아주 처참하게.      

     

‘구’와 ‘담’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할아버지와 이모손에 자란 ‘담’과, 부모의 사채빛과 함께 혼자가 된 ‘구’의 삶은 일찍부터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집, 학교, 일터, 길, 어떤 공간도 두 사람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친구들의 놀림, 이모와 노마의 죽음, 몸을 팔아 값아야 하는 사채 빛처럼 불행의 더께만 나날이 늘어간다. 윤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난하고 외롭고 서글픈 삶은 ‘구’와 ‘담’의 관계마저 훼방을 놓는다. 기댈 곳 이라곤 서로가 전부인 두 사람을 떼어놓고 그리움에 몸서리치게 만든다. 더 나은 삶, 더 높은 곳, 행복에 겨운 미래 따윈 욕심도 내지 않는데 서로의 곁을 지키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어린 연인이 감당하기에 현실은 잔혹하고 냉담하기만 하다. 때문에 무엇이 구를 죽게 했냐는 ‘담’의 질문에 마음에 서늘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구’는 왜 죽었나(p174)?

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인가?

 ‘구’를 먹는 ‘담’과 ‘구’를 죽게 한 것 중 우리는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 걸까?. 



주머니에 지갑이나 핸드폰 대신 돌멩이 같은 주먹(p85)을 넣고 다니던 ‘구’가 말했다. 우리는 번개 맞아 죽은 고목 같은 집에서 까만 청설모처럼 살아야 한다고(p84). 그런 구에게 어른들은 말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냐고(p136). 하지만 ‘담’은 뻔한 말 대신 그러자고 한다. 기꺼이 그러자고(p84). ‘구’가 삼 년 만에 소고기가 든 검은 봉지를 들고 나타났을 때에도 왔어?라는 짧은 두 글자로 구의 손을 잡는다. 그 말이 너무 투명해서 눈물이 났다. 그건 올 줄 알았다는 말이었고, 잘 왔다는 말이었고, 와줘서 고맙다는 말이었고, 그걸로 충분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삶은 ‘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부모가 남긴 사채 빚 때문에 ‘구’는 사람이 아니라 몸뚱이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면서 빚을 갚아 보지만 돌아오는 건 폭력과 협박, 원금보다 불어나는 이자뿐이다. 그런 이유로 ‘담’을 밀어내는 ‘구’에게 ‘담’은 말한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p199)라고. 그렇게 라도 우린 같이 있어야 한다고(p160).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사랑하게 만들었을까. ‘구’와 ‘담’ 사이엔 무엇이 있기에 징그럽게 서로를 벗어나지 못할까. 변두리 밑바닥 같은 삶을 깨고 나오는 이 맹목적인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첫 키스를 하던 겨울밤을 떠올리며 ‘구’와 ‘담’의 몸이 하나로 얽혔을 때,‘구’의 몸 위에 앉아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담’을 보면서 ‘구’는 온몸으로‘담’을 다 받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내 위에서만 살게 하고 싶다고(p67). 나는, ‘구’와 ‘담’이 하나가 되던 순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들이 곧 갈라질 듯 자주 조급하게 서로를 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몸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서로의 삶까지 끌어안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어려서부터 함께 보낸 시간이 만들어낸 공통의 허기짐, 불안, 아픔, 좋고 슬프고 부끄러웠던 삶 모두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안았던 거라고.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p88) 라던 담이의 중얼거림은 그렇게 서로를 안던 순간, ‘구’와 ‘담’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내린 뜨겁고 절박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하지만 ‘구’는 죽고, ‘담’은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빛으로 변해가는 구의 몸을 보며(p38) 말한다.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그렇게 ‘담’은 ‘구’를 먹는다. 죽은 ‘구’를 먹으면서 ‘구’를 기다린다.   


나는 ‘담’의 말을 따라 내게 물었다. ‘담’은 흉악범인가, 사이코인가,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p173). 하지만 이중에 ‘담’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담’은 그저 죽어가면서도 ‘담’을 향하던 ‘구’의 서른 걸음과, 노마의 죽음과, 죽은 이모를 생각하다 슬픔에 빠지는 여리고 약한 아이일 뿐이다. 그런 ‘담’이가 ‘구’를 먹었다. 애무하듯 입술과 혀로 얼굴을 핥다가 조금씩 뜯어먹으며 운다(p176). 죽은 ‘구’가 우는 ‘담’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담아, 이 바보야... 담아, 이 멍청아(p181)하고. 

맞다. ‘담’은 바보다. 멍청이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연약하면서 맹목적인 바보 멍청이다. 그래서 ‘구’를 먹었을 거다. ‘구’를 먹음으로써 증명해 내고 싶었을 거다. 구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을. ‘담’은 ‘구’를 먹는 것으로 ‘구’에게 무구한 숨을 불어넣어 줬을 거다. 몸속으로 들어간 ‘구’에게 ‘담’은 분명 제 숨을 나누어 줬을 거다. 그렇게 ‘구’는‘담’의 몸속에서 구원받았을 거다. ‘구’를 죽게 한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가로등 불빛처럼 따뜻한 ‘담’ 안에서 ‘담’과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말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담’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믿고 싶어 졌다. 그것이 ‘구’를 향한 ‘담’이의 사랑이라고. 어떤 사랑은 그럴 수 있다고. ‘담’이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말이다. 어차피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고, 사랑이란 게 몇 가지 모양으로 수렴될 수 있는 간단한 것은 아닐 테니까.      


책을 읽으며 가장 속상했던 건, ‘구’가 본 마지막 세상이 ‘담’이 아니라는 것이다. ‘담’을 보지 못하고 ‘담’을 생각하다 죽은 ‘구’의 삶이 너무 아프다. ‘구’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째서 삶은 이렇게 대책 없이 불공평할까. 왜 어떤 삶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도 주지 않고 끝까지 뭉개지고 훼손되어야만 하나. 어쩌면 정말 기이하고 충격적인 건 이런 게 아닐까. 선택할 수도 없고, 애쓴다고 쉽게 바뀌지 않는 삶의 기본 값. 그 어쩔 수 없는 것이 만들어내는 절망과 좌절. 그로부터 파생되는 불안과 공포. 그렇게 한 사람의 영혼과 삶을 박살내고도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는 세상. 부재와 결핍을 오가다 더 지독한 부재와 결핍 안에서 끝나 버리는 삶 같은 것.    


‘구’는 생각한다. 언젠가 네가 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고. 천 년토록 살아남아 그 시간만큼 너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p186). 나도 그러길 바랐다. ‘담’이 오래도록 살아남아 ‘구’와 함께 있지 않아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그렇게라도 ‘구’와 ‘담’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구’와 ‘담’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더 이상 ‘구’를 먹는 ‘담’을 보지 않게 되었다. 대신 끝까지 ‘구’를 지키고 싶었던 ‘담’의 마음을 본다. 시선이 옮겨진 자리엔 놀란 마음대신 간절한 바람만 남았다. ‘담’의 몸속으로 들어간 ‘구’가 될 수 있다면 ‘담’의 심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갈 수 있길. 그곳에서 우묵하게 파였을 ‘담’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길. ‘구’와 ‘담’이 더는 아프지 않길. 그들의 방식대로 그 자리에서 편안해 지기를.           


이젠 됐어……. 너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p180).    


                       

냥이와 함께하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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