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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홍 May 30. 2023

유기된 마음


잔여물 같은 것이다. 텅 빈 눈으로 살아냈던 일 년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슬픔도 기쁨도 없는 감정에 자기혐오 고립감 공허함 절망감 자책감 자멸감만 득실거리던 시간. 이 쓰레기 더미 사이에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나를 누가 좀 살려줬으면 좋겠는데. 정신 좀 차리게 안아줬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좀 죽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도 칭얼댈 수 없는 나약한 어른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갈 힘도 사라졌다. 모든 정신이 절망과 무력에 완벽히 지배되었다. 이겨내려 해도 이겨낼 수 없었다. 지금 그때로 다시 돌아간대도 아마 또 그럴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갈 수 없었다.


컴퓨터 앞에 종일 멍하니 앉아있다가 슬그머니 누워서 멍 때리다가, 다시 앉아 유튜브로 '울지 않고 못 배기는 영상'이라 적힌 것들을 재생시켰다. 그러다 또 가만히 누워 동기부여 영상이나 찾아다녔다.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편의점에서 보루 채로 사놓은 담배를 하나씩 뜯으며 폐가 아프도록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덕분에 한파인 날을 제외하곤 작업실 창문은 계속 열려있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밤이 되었다가 낮이 되었다가 아이들이 등교했다가 하교하는 소리, 옆집 렌터카 사장님 세차하는 소리, 앞집 떡가게 아저씨 목소리, 아래층 구제 숍 사장님 인사하는 소리, 뒷집 옥상에서 빨래 터는 소리. 살짝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모두 새어 들어왔다. 사람들은 계속 살아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는 소리로 혼자 창문 너머를 상상했다. 세상은 장단에 맞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이층 작업실 불은 내도록 꺼져있었고 탁상용 스탠드의 주황빛은 줄곧 켜져 있었다. 난 형광등의 쨍한 빛을 극도로 싫어한다. 차라리 눈이 아프도록 어두운 게 좋다. 어둠 속에서 담배나 뿍뿍 피우고 있는 내 모습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나도 누구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대로 여기서 죽어도 월세가 두 달 정도는 밀려야만 건물주에게 발견되겠구나 싶었다. 그러기엔 또 이걸 다 치워야 할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죽은 나를 처리할 사람에게 미안해서. 해롭도록 욱여넣던 배달음식을 습관처럼 시켰다. 통장에 돈이 다 사라져 가는데도 정신이 들지 않았다. 무서웠다. 청년 고독사를 한 사람들의 모습과 눈곱만큼도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거라면 아직 통장에 먹고살 돈이 조금 남아있단 것뿐이었다. 모든 적금을 단숨에 깨고 주식을 몽땅 팔았다. 그걸로 또 배달음식을 먹고 작업실 월세를 냈다. 구제불능 빈털터리가 되고 있었다. 큰 창문이 달린 현관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배달기사의 검은 헬멧만 보였다.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어 빛나는 검은 헬멧. 남들 다 자는 새벽엔 플래시를 켜고 올라오는 새벽 배송기사의 발소리가 들렸다. 썩은 나무 계단을 밟으며 터벅터벅. 끼익 끼익. 쿵쿵. 손에 들린 플래시 빛이 어두운 작업실 안을 휘저었다. 저 사람에겐 누워있는 내가 발견될까. 툭하면 깨질 창문이 달린 현관문을 잠그지도 않은 채 아침이고 밤이고 몇 달을 박혀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차피 누가 들어오려면 심장 두 개쯤 있어야 할 만큼 더럽고 스산했다. 못된 사람 한 명이 들어와 시원하게 죽여주길 바라기도 했다. 상황이 닥치면 또 무서워 덜덜 떨겠지만. 사실 문 잠그는 것조차 귀찮았다.


나는 멀쩡한 모니터 세 개가 올려진 하얀 책상과 책상 위에 규칙 없이 널브러진 쓰레기들, 덜 읽은 책 여러 권, 손가락으로 쓸면 묻어 나올 듯한 먼지와 부스러기, 남은 커피가 말라비틀어진 컵들, 기울어진 의자 뒤편 구석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썩은 담요를 덮고 오염된 마음으로 아무런 희망 없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저 단 한 명과 소통했다. 그 애였다. 걔는 거기다 대고 나더러 그런 건 우울증이 아니라고 하며 몇 시간 내내 오열하듯 끄억끄억 우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아마 그렇게 말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듯했다. 그땐 많이 서러웠다. 서럽지만 서러워할 수 없었다. 나 지금 죽을 사람 같다고 너무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 탓이니까. 그냥 뭐든 집중이 안 된다고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미안하다고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몇 개의 계절 동안 나는 미안한 사람이 되었다. 위축됐다. 미안해 미안해.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고 내가 무슨 기분인지 몰랐다. 그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버려진 기분으로 지냈다. 뭐라도 팩트를 알아야 하니 신경전달물질과 우울증에 대해 계속 알아봤다. 엉엉 울 정도가 아니면 우울증이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나는 뭔데? 이건 무슨 증상인데? 너는 그 오랜 시간 나를 봐왔으면서, 나 언제나 나름대로 잘 지내온 거 알면서. 다른 사람한테 들은 얘기만 진짜라고 믿고 그 사람만 연민하고 또 내 말은 다 부정하는구나. 나는 너한테 항상 뭐라도 고쳐야 되는 사람이구나. 못마땅한 사람이구나. 가스라이팅 지겹다. 다 부질없었다. 상실감. 또 버려진 기분. 나는 그때 강도 높은 우울증이 맞았다. 이제 와 어쩌겠나. 그땐 몰랐는데.


버려진 기분. 버려진 기분. 나는 자주 버려졌다. 아무도 버리지 않았는데 혼자 버려진다. 유기 인간. 종종 그때 그냥 죽었어야 했다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장난치다가 옥상 사다리에서 떨어졌을 때, 모르는 밤에 혼자 남아 길을 잃었을 때, 핏물이 터지는 병원에 벌벌 떨며 누워있을 때,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고 추락할 새벽을 기다릴 때, 빗물 섞인 모래가 발바닥에 박힐 때, 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발린 옥상, 먼 하늘이 비치는 창문, 위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그런 것들을 통과하고 싶을 때.


그러나 또 나는 죽어버리지 않고 기필코 살아내겠노라 발버둥 쳤다. 지긋지긋하다. 이 잡초 같은 생명력. 인간은 참 강하다. 살아야 한다고 살아야 한다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눈물이라곤 말라버린 인간이 마른 화장실 변기에 뭐라도 토해내려 얼굴을 넣었다. 목구멍까지 꽉 찬 매스꺼움은 어디로도 쏟아지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울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쓰러질 것 같은 마음 외에는 가진 게 없었다.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사람에겐 섬망처럼 떠오르는  가지 통증이 있다. 내겐 그중 하나가  것이다. 작업실 구석의 썩은 담요와 삐걱대는 캠핑용 침대, 어두컴컴하게 지나가는 계절, 집에 들어서자마자 향했던 화장실 변기와   타일, 변기 물의 비릿한 냄새, 하수구로 흘러가는 ,  바닥에 쪼그려 앉아 오갈  없던 , 나를 기만하는 듯한 화창한 날씨, 건너편 창문으로 들리는 하하 호호 새벽의 웃음소리, 웃음기 없이 이불을 덮는 , 그런 나를 외면하고 떠나간 사람, 혹은 나조차 나를 외면하고 떠나보낸 사람.  


그해 사람 한 명 온 적 없는 집엔 세입자인 나도 몇 번 들르지 않았다. 여름에 언니가 잠시 온 적은 있다. 언니는 집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마치 태초의 인간이 사는 집에 온 것 같다고 했다. 그날 바깥의 날씨는 쾌청했고 여름의 초록으로 가득했다. 언니도 초록을 닮았다. 그 후로도 나는 그 동네에서 그 작업실과 집에서, 초록의 더미에서 내도록 혼자였다. 외로운 줄 모르고 죽어가는 줄 모르고 혼자 지냈다. 이제야 안다. 나는 외로웠고 불안했고 점점 죽어갔다. 외로운 줄 모르는 사람의 외로움이 얼마나 가혹한 건지 이제 안다. 몇몇 사람들 덕분에 버티고 있었고 그중 팔 할이 그 애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종속된 관계였다. 서로에게 가득한 부정의 기운이 시너지를 받아 상승하는 꼴이었다. 나는 그 애 앞에서 항상 느린 사람이 되었고 죄인이 되었고 무능한 사람이 되었고 점점 내 주장은 사라져 갔고 따르는 사람이 되었고 나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탓할 대상이 되었다. 나는 몰래 걔를 탓하고 걔는 나를 탓했다. 다정과 비난이 무참히 오갔다. 안심과 불안이 반복됐다. 나는 점점 못난 사람이 되었다. 건넨 다정에 약해졌다가 찌르는 비난에 밀려났다. 누군가 아무리 나를 멋지게 본들 나는 초라했다. 언제나 어딘가 밀려나고 버려진 채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완전히 밀어내고 회복하여 살아내는 데에는 자잘하고 긴 노력이 필요했다. 캠핑용 침대를 접고 난로에 지져 구멍 난 담요를 말아 쓰레기봉투에 담고, 버릴지 말지 헷갈리는 아까운 물건들을 모두 집어 버리는 데까지 일 년의 시간이 또 걸렸다. 나는 그곳에 모든 걸 버리고 온 것이다. 죽어갔던 마음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애의 손가락질과 다정과 상처와 쓰레기 더미 속에 방치됐던 내 계절과 나로서 살아오지 못했던 긴긴 세월을 모두 그곳에 버려두고 떠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야 그간 내가 들이밀었던 잣대의 과거를 다시 떠올린다. 이해하고 반성하고 용서하고 뉘우치는 시간이 반복되고 있다.


아직은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삶의 이물감을 모두 녹여내는 데까지는 더 많은 용기와 실행과 성취와 사랑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털어내고 다독이며 살아내려 한다. 오늘도 현관 밖을 나서기 두려웠지만, 방문을 열기 버거웠지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거는 걸 참아내야 했지만, 어느 것도 잘 해낼 수 없을 거란 불안이 도사렸지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거란 생각에 초라해졌지만, 또 버려진 기분으로 버려진 날들을 떠올렸지만, 그냥 이대로 잠시 죽어볼까 하는 생각이 내도록 스쳤지만. 나도 분명 살 수 있다. 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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