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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정 Feb 19. 2024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간

내게 머문 마음

  갈 수 있다면 과거와 미래 중 어디를 가겠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미래라고 대답하던 때가 있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무척 궁금하고 기대됐기 때문이다. 선택 가능한 일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뻔한 일들과 또 마주하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결실로 가득한 미래를 만날 수 있다면 현재의 결핍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정원에는 바위 사이사이 분홍색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펴있다. 영산홍 색과 닮은 블라우스를 입은 외할머니는 카메라를 향해 웃고 계신다. 어느 해 봄이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할머니가 지금의 우리 엄마 나이쯤 되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우리 집에 오셨고 엄마는 할머니께 새 블라우스를 사 드렸다. 고운 블라우스를 입은 기념으로 할머니는 카메라 앞에 앉으셨나보다. 할머니는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영원히 웃고 계신다.     

 

 기억은 모두 미화되는 것인지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가슴이 따뜻해진다. 오랜만에 펼쳐 본 사진첩 속에는 잊혀진 순간들이 살아있다. 지금은 70대 노모가 된 사진 속 젊은 엄마는 중학생이었던 나와 나란히 서 있다.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연년생 동생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다. 80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흰머리는 언제 그런 순간이 있었냐는 듯 검디검다.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흘렀고, 우리는 변했다. 봄이면 정원을 물들이던 영산홍도 자취를 감추었고, 너른 바위에 앉아 사진을 찍던 할머니도 내 곁을 떠나셨다. 과거의 시간 속에 함께 있었던 많은 것들은 온기 가득한 추억만 남긴 채 영영 사라졌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인지 때로는 그 시간들이 그립고 애틋하다.     

 

  지나간 과거가 그립고 애틋하다면 미래는 늘 희망차고 기대됐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때는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어떤 남자친구를 만나게 될지 기대됐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내가 가질 직업과 성공한 나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자 그 시간을 버티게 해 준 힘이 되었다. 미래는 늘 꿈으로 가득 차 있었고 미래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어떠한 절망도 끼워넣지 않았다.     

  나는 이제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도 아니고 취업준비생도 아니다. 시간은 흘러 과거의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바로 그곳에 도착해있다. 그리고 어린 내가 꿈꾸던 것들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미래는 기대되고 때로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다 자란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지, 나는 또 얼마나 성장할지 그 모든 기대와 설레임이 오늘의 나를 더욱 활기차게 만듦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거와 미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과거를 선택한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 때문이 아니다.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 내 인생의 상처나 오점이 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지금은 곁에 있는 누군가가 미래에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두려우니 차선책으로 과거를 선택하겠다는 말이다.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하던 미래는 어느 순간부터 불안과 안타까움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 미래보다는 과거를 선택하겠다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외할머니가 계실 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의 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 옆에 계시고 나만 자란다고 생각했나보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일텐데 할머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함께 흐른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소고기 전을 유난히 좋아하시던 할머니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내가 번 돈으로 맛있는 고기도 사드리고 용돈도 넉넉히 드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할머니는 기다려주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내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지금 함께 있는 누군가도 미래에는 없을지 모른다. 상상하기 싫고 상상되지도 않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진리를 외면하지 않는 한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 주춤대고 멈칫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지금 다소 부족하고 결핍된 부분이 있더라도 미래엔 사라질 무언가가 현재에는 충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현재가 소중하고 과거가 되기 전에 붙잡아 어루만지고 싶어진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주셨던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건 20년도 전의 일이다. 나는 할머니와의 시간에 충실했던가? 나 자신에게 묻는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 어찌할 도리는 없다. 질문을 바꾼다. 나는 지금, 바로 이 순간 충실하게 살고 있는가? 과거가 되었을 오늘을 떠올릴 먼 훗날.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오늘도 주위를 돌아본다. 사랑하는 이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을 한 번 더 불러본다. 사랑한다는 것이 늘 현재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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