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머문 마음
무거운 죽음을 단 두 줄의 카톡으로 가볍게 전해온다. 누가 죽었고 언제 장례식장에 가자는 짧은 내용이다. 이번에는 우리 부부와 연이 깊은 분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단다. 얼마 전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며칠 지나지 않아 큰고모부도 같은 병명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또 죽음이 전송되어 왔다. 태어날 때는 갖은 축하와 환호 속에 태어났을텐데 죽을 때는 한결같이 슬프다는 당연한 진실이 왠지 오늘따라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이 계절에 맞는 검은 옷을 옷장에서 찾는다. 이제 계절 별로 검은 옷을 마련해 두어야겠다.
너도 나도 앞다투어 결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십 대 후반 또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한껏 멋을 부리고 누군가의 결혼식장으로 갔다. 아직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한 젊음에게 축의금이 부담이 될 법도 한데 그런 기억은 조금도 없다. 그저 축하하는 마음을 가득 싣고 친구의 결혼식을 빌어 다른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즐거운 자리였다. 결혼하는 친구의 부모님이 눈물을 보이시면 나도 따라 울었었고 가끔은 친구가 던지는 부케를 잘 받으리라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누군가의 팔짱을 끼고 눈부시게 빛나는 드레스를 입었던 친구들은 다들 그와 팔짱을 풀지 않고 잘 지내는지 문득 궁금하다.
그 후 시간이 좀 지나자 출산 소식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백화점 아동복 매장을 드나들었다. 딸이든 아들이든 색깔에 구애받지 않고 중성적인 옷들을 좋아했다. 유기농이라는 이름표를 달면 옷값도 비싸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먹는 것 뿐만 아니라 입는 것도 유기농이 높은 가격을 자랑했다. 옷뿐만 아니라 딸랑이나 속싸개 혹은 보넷까지 사서 마음의 거리가 가까움을 카드값으로 가늠할 수 있는 순간도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기보다 그녀가 낳은 아이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 더 익숙했던 때였다.
출산 소식 후에는 당연한 수순으로 돌잔치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뷔페 위주의 음식점에서 돌잔치를 성대히 하던 시절이었다. 아기용 옷을 사던 나는 돌잔치용 금반지를 자주 샀다. 육아에 치여 늘 편한 옷을 입던 우리들은 그날만큼은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와 유사한 옷을 입고, 그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도록 메이크업과 헤어를 했다. 돌잔치의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돌잡이였고 사회자가 돌잡이로 무엇을 잡는지 맞히면 상품을 주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항상 답례품이 손에 들려있었다. 그것은 머그컵일 때도 있고 수건, 차 숟가락, 양념통 등 다양했다. 아직도 내 부엌에는 누구의 딸인지 아들인지 알 수 없는 이름이 적혀있는 차 숟가락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자꾸 장례식장에 가게 된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순간이 도래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는 순간.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또는 나와 직접적인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내 곁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가족도 하나둘 떠나고 있다.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순간을 지나 슬퍼하고 위로해야 하는 시간 위에 함께 서 있다.
드레스를 입거나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만나던 우리는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서 만난다. 환하게 웃으며 누구보다 행복해 마지않아 보이던 우리는 서로를 부여잡고 울거나 고요히 손을 잡고 눈을 맞추지 못하곤 한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수록, 서로 나눈 마음의 깊이가 깊을수록 우리는 더 오래 그곳에 머물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들과 보낸 그 어떤 순간보다 어쩌면 내가 필요한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어떤 시간을 거닐게 될까? 내가 알던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사람도 만나게 될 것이다. 미래의 이야기라 알 수 없긴 하지만 사라진 사람들 대신 그들이 남겨두고 간 누군가는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 아이와의 만남이 내 삶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간 가지지 못했던, 어쩌면 열망해 마지않았던 나만의 시간이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 엄마로, 직장인으로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느라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틈이 없었던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온전히 자신만으로 채워진 시간을 가질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고 은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면 아침이면 같은 곳으로 출근하던 우리는 사라질 것이다. 대신 그간 하지 못한 일들을 하며 새로운 내 인생의 역사를 쓰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만 가닥으로 뻗어나가고 그 길 위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미래의 나는 지금의 시절을 어떻게 회상할까? 검은 옷을 자주 입었고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우울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할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지나간 시간보다는 현재가 더 충만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할까? 미래의 내가 어떤 대답을 들려줄지 기대된다고 해 두고 싶다.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헌화를 하고 상주(喪主)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께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신 후라 그런지 대성통곡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주이신 분은 우리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서 주셨던 교수님이다. 우리는 인생의 기쁜 순간에 만나 인연을 맺은 셈이다.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도 연구실로 찾아갔었다. 또 한번 우리의 시절을 축하해 주셨고 인생에서 축하의 순간을 두 번이나 공유한 사이였다.
상주와 우리는 마주 앉아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가신 분과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시며 현재의 우리가 누리는 행복함을 떠올리게 해 주셨다. 그리고 작은 에피소드와 함께 내가 엄마라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도 일깨워주셨다. 우리는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이런 일이 있어야 마음을 낸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분은 주말인데도 기꺼이 와 주어 고맙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검은 옷을 입은 우리는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상주의 배웅을 받았다. 장례식에 검은 옷을 입고 참석하는 것이 죽은 이에 대한 애도(哀悼)뿐만 아니라 상주와 같은 색의 옷을 입음으로써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고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 사람을 뒤로 하고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만나러 장례식장을 돌아 나왔다.
우리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모른다. 지금이 인생의 절반까지 온 것인지 앞으로 더 많은 인생이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시간은 한정적이기에 그래서 더 애틋하다.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시간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오늘 하루를, 이 시절을 더 값지게 살아나가면 될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오늘이 모여 또 한 시절을 이룰 테니 말이다.
이 시절을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이 시절이 가고 나면 그들이 사라질지 서로의 곁에 남아 더한 온기를 주고받을지 알 수 없다. 내일 해야지 하고 미뤄 두었던 연락을 오늘 한다. 뜸하게 전한 마음은 없었는지 연락처를 뒤져본다. 전하고 싶었지만 미처 전하지 못하고 남겨진 마음은 없는지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이곳에 홀로 남겨진 마음이 없도록 마음들의 등을 떠민다. 나아간 마음들은 온기가 되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언젠가 내가 만날 다음 시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