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eotany 니오타니 Apr 08. 2022

사용목적이 명확한 사람 (feat. 참기름)

휴직 일기

10년 넘게 앞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라이프 스타일과 영역을 확인하고 제품의 콘셉트를 기획하는 업무를 했다. 시장에서 성공하는 제품의 공통점은 사용목적이 명확하고, 소비자가 예상하는 기대치보다 조금 더의 효용을 주는 것이었다. 디자인이, 기능이 때로는 사용 후의 경험이 될 수도 있는데,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느끼는 그 한 끗 차이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턱대고 모든 면에서 최고의 성능만 집어넣었다가는 가격만 높아져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용목적이 명확하고 사용자의 기대치에 맞는 적정한 성능을 제공하며 의외성이라는 감동 한 스푼을 더하는 것. 간단하게 들리지만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의 기대가 무언지 파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문화가 있고, 기대와 욕망은 단순하지 않다. 


사물에서 얻는 감동은 꼭 새로운 제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주 전 영역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대상에서 한 단계 높은 경험을 했을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다. 요즘 깊이 생각하는 대상은 참기름이다. 나는 참기름을 사랑한다. 제주에 오면서 집에 있는 참기름을 덜어서 가져갈까 생각했을 정도로, 내 식생활에서 참기름은 중요한 식재료다. 물론 들기름도 사랑한다. 고소한 참기름을 무친 나물, 큰 스푼에 참기름 가득 부어 먹는 비빔밥, 소면에도 참기름 한 방울 넣어 먹으면 깊은 감칠맛이 배가 된다. 


이렇게 참기름을 사랑하게 된 데에는 직접 짠 참기름만 먹고 지냈기 때문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농사지어 보내주시는 참깨 들깨로 기름을 내려 먹었고, 요즘도 일 년에 서너 번 오래 다닌 양평 기름집까지 가서 기름을 짜 온다. 몇 년 전부터는 직접 엄마를 모시고 가는데, 엄마 따라 시장 다니며 어묵 얻어먹던 추억이 생각나 신나기도 한다.  용문역 근처에 있는 기름집에 도착하면 아침 8시 문을 여는 시각에 맞추어 가도 최소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장날과 겹치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도 있다. 어디서 오셨는지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계신다. 기다리는 동안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인천에서 오신 분도 계셨다. 하긴 우리도 막히지 않는 아침 일찍 출발해도 1시간을 꼬박 달려야 그곳에 왔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능이버섯 전골로 유명하다는 바로 옆 식당에서 밥을 먹고 왔다. 어렸을 땐 내가 좋아하는 어묵을 엄마가 사주셨지만, 지금은 내가 맛집을 찾아 밥을 산다. 용문에서 제일 핫한 상점은 아마도 이 기름집과 능이버섯 전골집인 것 같다. 밥을 먹고 시장 한 바퀴 둘러보고 가면 대게 우리 차례가 된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순서를 확인하고는 각자의 볼일을 보고 돌아온다. 예전에 기름집은 가져간 깨나 혹은 주문한 깨로 내리지 않을까 봐 자리를 꼭 지키고 내리는 과정을 일일이 다 확인하곤 했단다. 여기는 사람들이 그냥 맡겨놓고 찾아가는 것을 보니, 확실히 사람들의 신의를 얻은 집이라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오래가고 잘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인 경우가 많다.


참기름을 짜는 과정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건강에는 저온 압착이 좋다고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참기름의 고소한 맛은 덜해지고 양도 적게 내려온다. 이 집은 아주 살짝 깨를 볶아서 압착을 한다. 깔끔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그 볶기의 정도와 압착하는 기술에 있는 것 같다. 그다지 크지 않은 기계에서 기름이 나올 때면 갓 짜낸 참기름의 고소함이 사방에 퍼진다. 예전처럼 식구가 많지 않은데도, 엄마는 참깨 한말 때로는 두말씩 수십 병의 기름을 짜신다. 오빠네는 물론이고 친척, 친구, 성당 친구 한 병씩 품에 안겨줄 리스트를 손에 꼽으며 기름병을 착착착 가방에 담는 표정이, 참 풍요로워 보인다. 그때 엄마 표정은 정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것 같다. 생들기름 몇 병을 추가로 사고, 기름집 안주인을 똑 닮은 따님과 인사하고 나올 때면 또 몇 달은 참기름 부자로 살 수 있겠구나 든든한 행복이 마음을 그득하게 채운다. 행복하다.


제주에 와서 마트에서 병에 든 참기름을 샀다. 맛이 없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맛이 없는 참기름을 먹고살 수가 있나, 오일장에서 장을 봐서 맛있게 나물 무쳐 먹으려던 내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다. 그리고 나의 오랜 사랑 참기름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세상이 변해가고, 사람들의 관심이 변하는 트렌드를 보는 게  내 일인데 가끔은 변하지 않는 가치에 주목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계속 귀하게 남아있고 사랑받는 그 무엇이 훨씬 더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기름의 명징한 사용성과 가치에 한 수 배운다. 


그리고 나를 생각한다. 나의 사용목적은 무엇일까. 나를 사용하는(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닌, 내가 쓰이고 싶은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어떤 때 행복하고 직장생활 20년 차 이후의 내 삶은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지 나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더라도 내 쓰임이 뚜렷한 나의 세계를 찾아 오늘도 고민한다. 


작가의 이전글 오만과 가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