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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tany 니오타니 Aug 21. 2022

호박잎과 초고오급커피

추억의 맛

지난 금요일 성북동에서 모임이 있었다. 모임 시간보다 한참 일찍 나선 탓에 혜화역에 내려 오랜만에 한성대 입구역까지 걸어갔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친 건 다행이었지만 후덥지근 한 날씨 탓에 한성대 입구역의 오래된 터줏대감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빵이나 살까 생각한 순간 바구니에 담긴 호박잎이 눈에 들어왔다. 마대 자루에 든 호박잎을 꺼내 한 잎 한 잎 손질해 바구니에 담아 팔고 있었다. 길가에서 채소를 다듬는 분들은 보통 할머니들이 많은데, 초로의 남자분이 부지런히 호박잎을 다듬과 계셨고 그 옆엔 아들로 추측되는 이가 스마트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호박잎은 어리고 부드러워 보였고 한눈에 봐도 맛있겠다 싶었다. 한 바구니만 사려다 너무 적어 보여서 다듬어 채우는 중인 다른 바구니를 하나 더 보탰다. 작은 검정 비닐 봉지에 빼곡히 들어간 호박잎을 보며 내일 아침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서 같이 먹으면 좋겠다,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호박잎은 2006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계셨을 땐 자주 먹던 음식이었다. 뒷면에 까슬까슬한 잔털과 질긴 섬유질을 사악 벗겨서 쌀뜨물에 씻고 포옥 쪄내 호박잎을 된장에 담가 먹는 맛을 좋아했다. 양념장을 넣어 쌈을 싸 먹어도 맛있지만 바글바글 끓인 된장찌개나 강된장을 넣어 먹는 맛이 나에겐 최고였다. 어린 호박잎이어야 맛있다고 초여름에 많이 먹었었는데,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선 어쩐 일인지 밥상에서 호박잎 보는 일이 드물었다. 장을 보는 마트에서 호박잎을 파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엄마가 무릎관절 수술을 하시고 입원해 계실 때 병원밥이 너무 맛이 없다고 하셔서 주말이면 반찬을 해서 병원에 가곤 했다. 안 해서 그렇지, 또 한 번 했다 하면 장금이(!)인 나는 환자의 주문을 성실히 받들어 메뉴를 구성했다. 오랜만에 시장에 가서 장도 보고 그러던 중 정말 오랜만에 호박잎을 만나게 되었다! 아주 커다란 비닐봉지에 가득 든 호박잎이 단돈 삼천 원이라 해서 얼른 그 봉지를 집었다. 호박잎의 상태가 궁금했으나 맛있는 잎이란 주인아주머니 말에 의심 없이 사들고 왔다. 먼저 우렁 강된장을 만들고 호박잎 봉지를 연 순간, 거기엔 마지막 생의 에너지가 모두 들어간 듯한 크고, 뻣뻣하고, 초록을 넘어 검 초록을 띄는 호박잎 장정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내가 먹던 야들야들 보들보들한 잎들이 아니었다. 할머니나 엄마가 다듬던 모습을 떠올려 솜털이 아닌 가시가 박힌 듯한 뒷면의 섬유질을 한 장 한 장 다듬었지만, 아무리 다듬어도 보들한 이파리 속살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찌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살뜨물에 씻어 찜기에 포옥 쪄 보았지만 한 시간이 넘는 노동이 무색하게 이파리는 여전히 따끔거리고 거칠었다. 피땀 눈물이 더해진 호박잎은 결국 거대한 음식물쓰레기로 휴지통으로 가고야 말았다.


그 후로 몇 년 만에 제대로 된 호박잎을 만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쿠쿠가 아침밥을 열심히 짓는 동안 호박잎을 찌는 찜기에도 김이 폭폭 올라왔다. 한 접시 그득히 호박잎을 쪄내 놓고 된장찌개에 싸 먹는데 그야말로 꿀맛! 이 맛난 음식을 만나기가 이렇게 어려워졌다니, 아파트 단지에 호박을 심자고 건의하고 싶은 심정이다. 


호박잎 쌈으로 밥 한 공기 거뜬히 비우고 다음 순서는 드립 커피. 주중엔 출근하느라 못 마시는 커피를 여유 있게 준비하는 과정은 주말 아침의 오래된 의식이다. 이번 주엔 특히 명동 로투스 랩에서 어렵게 받은 초 고오급 원두가 세 봉지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스트 오브 파나마로 꼽히는 아이언맨 게이샤, 과테말라 엘피날 린다비스타 게이샤, 그리고 게샤 빌리지까지! 아 곳간에 쌀가마니 잔뜩 쟁여둔 구한말의 농부의 기분이 지금 내 기분과 비슷할까. 우선 이번 주는 아이언맨 게이샤부터 시도해 보기로 했다. 


통통한 커피빈을 내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오... 아름답다...!

달콤한 과일과 꽃향이 감싸 안은 듯한 부드러운 산미 끝에 따라오는 달콤한 향과, 시럽에 고소함이 더해진 듯한 마우스 필이 너무 부드러워 보통 커피를 마신 후엔 물을 마시는데 녹진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끝까지 함께하는 피니시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아이스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 한잔 더 마셨는데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과테말라 린다비스타 게이샤도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하지만 한꺼번에 다 마셔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원두라 내일을 위해 참고 있다.


커피는 어린 시절 아빠가 마시는 원두를 칼리타 그라인더로 갈아드리면서 친하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에도 그 향이 너무 좋아서 어서 어른이 되어 커피를 마셔야지 했던 기억이 있다. 핸드드립을 마신 지 꽤 오래되었고, 더 맛있는 커피를 제대로 즐기고 싶어서 커피 공부도 했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건 커피빈이 맛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매번 느낀다. 


이래저래 추억과 버무려진 맛을 한껏 즐기는 행복한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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