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지킨 자연의 나라, 스위스로 떠나는 가족여행 #7
유럽에서 '취리히(Zurich)'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취리히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기서는 '쮸릭' 또는 '찌우릭' 이라고 해야 한다.(독어로도 이 발음이 더 가깝다.)
스위스 최대의 도시로 상업과 금융, 문화의 중심지이자 가장 큰 국제공항이 있어 국가의 관문임에도 취리히는 인터라켄과 같은 유명 관광지로 가는데 들르는 기착지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관광 대국 스위스지만 취리히는 뭔가 강렬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나 역시 취리히에 대해서는 옛날 종교 개혁의 중심이었던 그로스뮌스터 대성당과 국제 축구 연맹 FIFA의 본부가 있는 곳 그리고 아름다운 호수를 낀 국제적 금융 도시 정도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다. 특히, 취리히는 합법적 ‘비밀 계좌'로 널리 알려진 주요 스위스 은행들의 본사 소재지가 있어 금융 도시로 유명하다.
중립국 스위스의 은행들은 어떤 돈이든 출처와 성격을 묻지 않고 받았던 데다, 숫자만으로 이루어진 비밀 계좌 정보를 절대 유출하지 않는 높은 보안성을 자랑하기 때문에 전 세계 검은돈의 은신처로 유명하다.
17세기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 때부터 시작되어 1930년 대에 명문화된 ‘은행 비밀주의(Bank Secrecy)' 덕분에 스위스 은행들은 전 세계 권력자와 독재자, 마약 카르텔 등 범죄 집단들의 돈세탁과 자산 은닉, 탈세 등을 위한 '안전지대'로 여겨졌다. 중세 후반까지 찢어지게 가난해 용병업으로 힘들게 살았던 유럽의 소국은 이렇게 들어온 막대한 자금을 굴리면서 근대 이후 부유한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21세기 들어 스위스는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다수 국가들과 조세 협약도 체결했고, 범죄에 연루된 계좌에 대해서는 제재가 가능해짐에 따라 예전의 '명성'은 많이 퇴색했으나 고객의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의 유명세는 여전하다. 취리히 중심가 파라데플라츠(Paradeplatz) 광장에는 스위스 1, 2위이자 세계적 은행인 UBS와 Credit Suisse의 본사가 나란히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스위스 여행의 후반부, 베른의 아침이 밝았다.
전날 내리기 시작한 비는 다음 날까지도 이어질 것이고, 취리히에도 하루 종일 비가 예보되어 있어 크게 실망했다. 스위스는 나라도 작은데 평야 지대라고 해봐야 국토의 30% 남짓한 면적이라, 알프스 산속은 날씨 변화가 큰데 비해 북부 평야는 비가 오면 하루 종일 내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 년 중 맑은 날이 거의 없다는 융프라우에서는 파란 하늘 아래 환상적인 알프스를 감상했는데 들판의 도시로 내려온 후로는 내내 궂은 날씨만 만나니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인생살이 새옹지마(塞翁之馬), 이런 날씨에 새로운 도시를 여행하다가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아침에 눈을 뜬 나는 호텔의 침대에 앉아 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움직일 동선을 짰다. 취리히는 이번 스위스 여행의 종착지이다.
베른에서 취리히까지는 약 120km의 거리인 데다 악천후가 예상되므로 여유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오전에 느지막이 체크아웃을 한 나는 퍼붓다가 약해지다를 반복하는 빗줄기를 뚫고 1번 국도 위에 차를 올렸다. 여행 전반부에서는 구불구불한 국도변을 달리며 경치를 즐겼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앞만 보고 달렸더니 약 1시간 반 만에 리마트(Limmat) 강이 호수와 만나는 취리히 구시가 중심가로 들어섰다. 취리히의 랜드마크는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 대성당인데, 이렇게 비만 죽죽 내리는 날에 보니 아름답다는 취리히의 시내도, 성당의 모습도 우중충하게만 보여 아쉬웠다. 여행은 날씨가 절반인 법이다.
첫 목적지는 점심식사를 위한 레스토랑이었다. 전날 저녁, 밥 생각이 없다며 가족들이 모두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는 바람에 가이드로서 자존심에 상처가 났던 나였다. 취리히의 첫 점심만큼은 그럴듯한 현지식으로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득 차서 가족들 모르게 레스토랑을 하나 찾아 오후 1시로 예약을 해 둔 터였다.
'아빠, 왜 이렇게 뱅글뱅글 돌기만 해요?'
'그러게. 시내에 주차해야 하는데 주차할 곳이 없네..'
같은 곳을 빙빙 돈다며 투덜대는 아이들에게 적당히 얼버무리며 파라데플라츠(Paradeplatz) 주변을 10분가량이나 헤매던 나는 가까스로 레스토랑 근처 길거리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취리히에서 길거리 주차는 한 번에 최대 2시간을 허용하며 2시간 기준으로 7.5프랑이다. 주차비는 길거리의 무인 주차 정산기에서 티켓을 산 후 차량의 앞 대시보드 위에 보이도록 올려두면 된다.
어느덧 시간이 예약 시간 1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크하우스켈러(Zeughauskeller)는 무기고라는 뜻이다.
레스토랑 이름만으로도 포스가 느껴지는 이 곳은 1487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어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병장기를 수리하고 보관하는 무기고로 사용되다가 1926년부터 '평화적이고 사교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고 한다.
레스토랑 식탁보에 적힌 ‘옛날에는 여기에 빌헬름 텔의 활도 보관되어 있었다'라는 글귀를 보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빌헬름 텔의 이야기는 전설이긴 하나 프레데릭 쉴러(Friedrich Schiller)가 희곡으로 쓴 상상의 이야기였으므로 실존 인물이 있었는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아마 희곡의 모티브가 된 전설의 인물을 그렇게 표현했나 보다.
레스토랑 입구에 늘어선 줄을 뚫고 들어가 1시에 예약이 잡혀 있다고 했더니, 리셉셔니스트가 아직 10분 남았다고 조금 있다가 오란다. 예약 시간 10분 전인데도 아직 내 시간이 아니라고 돌려보낼 정도면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입구에서는 전체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았는데 들어와서 보니 내부는 상당히 넓고 고풍스러웠다.
만석인 레스토랑은 왁자지껄 시끄러워 정신이 없었으나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이 레스토랑의 업력을 말해 주었다. 자리로 안내하는 사람, 메뉴를 가져다주는 사람, 주문을 받거나 음식을 가져오는 사람이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종업원들 간에 손발이 잘 맞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듯했다.
여행 내내 식사는 독일식 스위스 음식을 위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질릴 만도 했으나 이 집에서는 왠지 로컬 음식을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소시지, 구운 돼지고기, 뢰스티 그리고 이 집이 자랑하는 감자 샐러드 등을 주문하다 보니 눈길은 자연스레 맥주를 향한다. 강한 독일 영향권이라 그런지 하우스 맥주의 수준도 독일과 다를 바 없이 훌륭해서 아내도 참지 못하고 흔쾌히 '맥주 한잔!'을 외쳤다.
메뉴판이 한국어를 포함해 대략 10개의 언어로 갖추어져 있어 특이했는데, 어떤 언어로 주문해도 프로세스가 꼬이지 않도록 메뉴마다 번호가 붙어 있다. 아시안 식당에서만 보던 시스템이라 신선하다.
만족스러운 점심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비는 많이 내리고 있었다. 당초 계획은 그로스뮌스터 대성당과 아트 갤러리에 가는 것이었지만 야외 활동을 더 줄이기 위해 스위스 국립 박물관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취리히 중앙역 건너편, 리마트 강가에 위치한 박물관은 1898년 구스타프 굴(Gustav Gull)에 의해 건립된 건물로 작은 성처럼 생긴 외관이 눈길을 끈다. 오랫동안 공간 부족으로 애로가 많았던 박물관은 2016년에 현대적인 건물을 이어 붙여 확장하면서 전시의 완성도를 크게 높였다고 한다.
궂은 날씨 탓인지 방문객은 많지 않았다. 박물관이 여전히 수리 및 확장 중이라 완벽한 전시는 반년 가량 더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문 때문에 적잖이 불안한 마음으로 입장했다. 역시 전시물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프랑스나 독일의 대형 박물관들과 견줄 수준은 못 되었다.
그러나 이 박물관에는 증강현실이나 디지털 책 등 첨단 전시 기법들이 상당히 많아 눈길을 끌었다.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박물관에 가면 유리관 안의 ‘천편일률’적인 유물로부터 별 감동을 못 받는 경우가 많은데, 실험적인 전시 기법이 많이 동원된 이 박물관에서는 역사를 몰라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박물관을 그렇게 싫어하는 둘째가 디지털 책을 통해 스위스의 특징과 역사를 오랫동안 듣고 보는 모습을 보니 미디어 세대를 잡기 위해 박물관도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보였다. 디지털화의 핵심은 자연스러움과 완성도인데 그런 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규모가 엄청 크지는 않으나, 이 박물관은 스위스의 중요한 역사를 공부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제일 먼저 내 눈에 띈 것은 판타지 영화에서 봄직한 거대한 책이었다.
라틴어로 씐 제목은 Chronicon Helveticum 즉, 스위스 연대기이다. 스위스 지방의 원주민은 켈트족의 한 갈래인 헬베티족이고 스위스의 국가 도메인이나 화폐 단위에 CH가 사용되는 이유도 헬베티카 연방(Confoederatio Helvetica)이라는 스위스 공식 명칭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헬베티아는 스위스를 뜻한다.
원래 스위스 연대기는 1550년에 스위스의 역사학자 아이지디우스 츄디(Aegidius Tschudi)가 처음으로 기록했으나 그가 기록한 문서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현존하는 기록은 1734년에 요한 루돌프 이셀린(Johann Rudolf Iselin)이 정리한 것이다. 츄디의 연대기가 중요한 이유는 그의 기록 중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역사적 내용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록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위스 연방의 본격적인 역사는 1291년에 합스부르크가의 억압에 맞서 스위스 중부에 있는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의 3개 주(칸톤)가 영원히 단결하며 자유를 지키자는 1차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당시의 동맹 결성 문서는 스위스 연방이 공식화된 19세기 이후 건국 문서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슈비츠 주 소재 연방 헌장 박물관(Museum of the Swiss Charters of Confederation)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곳 취리히의 국립 박물관에서도 동맹 결성 문서로 보이는 헌장이 눈에 띄었다. 라틴어로 된 글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문서에 단단히 결속된 문장들을 보니 초기 3개의 칸톤들이 맺은 조약과 8개 칸톤들이 서약한 문서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3개 칸톤으로 시작한 자유 스위스 동맹은 오스트리아와 부르고뉴 공국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독립 전쟁을 벌이며 1351년 취리히에 이어 1353년에 베른까지 가입함으로써 8개 칸톤 동맹으로 확대되었다. (역사의 도시 스위스 베른에서 찾은 여유)
이후 자유 동맹은 1386년에 있었던 젬파흐(Sempach) 전투와 1388년 네펠스(Näfels)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대승을 거두며 실질적인 독립 연합으로 발전했다. 특히, 젬파흐 전투 후에 맺은 동맹 협약에 따르면 8개 칸톤은 만장일치의 합의가 없으면 어떤 칸톤도 대내외에 일방적으로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칸톤 간의 결속력은 한층 굳어지게 된다.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다양하고 복잡한 사고를 가진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단결을 외쳤어도 분열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법, 자유 스위스 동맹도 칸톤 간 갈등으로 내전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이 곳 취리히와 연관된 전투가 그것이다.
1436년, 독일과 스위스 국경지대의 토겐부르크(Toggenburg)라는 곳을 지배하던 영주 프리드리히 7세(Friedrich VII) 백작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취리히는 그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슈비츠와 글라루스가 다른 칸톤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반대하자 취리히는 토겐부르크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독일로부터 슈비츠로 들어가는 곡물의 루트를 끊어 버렸다. 산악 지역의 칸톤들은 모든 식량을 독일 등 북부 평야에서 공급받으므로 이는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분노한 슈비츠와 나머지 6개 칸톤은 취리히를 동맹에서 추방하며 전쟁을 선포하였고, 취리히는 이에 맞서 합스부르크가의 프레데릭 3세(Frederick III)와 연합하게 된다.(Old Zurich War)
우리나라로 치면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치는 꼴이었다. 당시 취리히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 가장 강성한 칸톤이었고, 마침 프랑스와 영국 간 백년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스위스의 직업 군인들이 취리히로 몰려들었던 때라 이들을 고용하면서 군사력을 불린 취리히는 딴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동족상잔이 벌어진 가운데 상황은 복잡해져서 합스부르크가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의 샤를 7세(Charles VII)까지 취리히를 지원하며 참전했다. 양분된 스위스에는 사상자만 늘어가는 가운데 어느 쪽도 결정적 승기를 잡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스위스 동맹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웃는 쪽은 합스부르크가 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1446년에 이르러 양측 간 평화협정이 타결되었고 취리히가 합스부르크와의 연합을 깨고 다시 스위스 동맹에 합류하면서 분열은 봉합되었다.
3년여에 걸친 비극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스위스 동맹은 더욱 단단히 결속하게 된다. 배신했던 취리히가 복귀한 것도 그렇지만 다시 받아준 스위스 동맹도 대단하다. 그만큼 스위스는 단결이 절실했다.
스위스의 운명을 바꾼 또 다른 전쟁은 부르고뉴 공국과의 전쟁이었다. 지금은 프랑스의 일부지만 당시 부르고뉴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원으로 프랑스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스위스 연맹이 점점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자 위협을 느낀 부르고뉴 공국의 왕 '용감한 샤를(Charles the Bold)은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어 배후를 안정시킨 후 1476년에 스위스 동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Burdundian War)
그러나 호기로움도 잠시, 2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부르고뉴의 군대는 그랑송(Grandson), 무르텐(Murten), 낭시(Nancy)에 이르는 3번의 큰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부르고뉴의 지배자 샤를은 전쟁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승리한 스위스 동맹은 영토를 부르고뉴 지역까지 확장할 수 있었지만 욕심을 버리고 점령지를 프랑스에 팔아버렸다. 비옥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땅 대신 돈을 택한 것.
이 승리로 스위스는 주변 국가에 존재감을 확실히 알리며 완전한 독립으로 한발 더 나아가게 되었다.
외세에 맞서 2백여 년이 넘게 단결하며 독립 투쟁을 벌여가던 스위스 연맹에 피할 수 없는 커다란 분열의 조짐이 있었으니 바로 중세 유럽과 뗄 수 없는 종교 문제였다. 16세기 초 유럽의 종교 개혁은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를 비판하고 교황에 의해 파문당한 이후 유럽 곳곳에 들불처럼 퍼졌고, 그로부터 백 년 후에는 전 유럽이 개혁파(신교)와 보수파(구교)로 나뉘어 수십 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던 역사적인 사건이다.
1520년대 스위스 취리히에는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쌍벽을 이루는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있었다. 부패한 가톨릭에 반대하여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든 츠빙글리의 사상은 스위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정도가 심해져 돈을 받고 전쟁에 나가는 용병업과 ‘깨끗한 몸가짐에 어긋난다'며 숙박업까지 금지하면서 두 산업으로 경제를 지탱했던 산악 지역 칸톤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샀다.
갈등이 지속되던 1529년, 츠빙글리가 산악 지역을 굴복시키기 위해 식량 공급을 막아버리자 이에 분노한 산악 칸톤들이 7천의 군사를 일으켜 츠빙글리의 취리히 군사 2천과 카펠에서 맞부딪혔다.(Battle of Kappel)
산악 지역 칸톤들의 군대는 슈비츠나 우리, 루체른 등 전투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 병력에서도 압도적이어서 츠빙글리의 군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츠빙글리도 전사하고 만다.
츠빙글리는 죽었으나 그의 개혁 사상은 프랑스 태생으로 제네바의 종교 지도자 겸 정치인이었던 장 칼뱅(Jean Calvin)으로 이어졌다.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가 일으킨 종교 개혁을 완성하여 개신교가 유럽으로 뻗어나가는데 기반을 닦았고, 그가 있었던 제네바와 서부 스위스는 중남부 산악 지역과 달리 개신교가 지배하게 된다.
박물관을 걷다 보니 17세기에 쓰인 칼뱅에 대한 책이 눈에 확 띄었다.
칼뱅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의 사후에 유럽은 가톨릭 국가들(에스파냐, 오스트리아 등)과 신교 국가들(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등)로 나뉘어 신성 로마 제국을 싸움터로 수십 년에 걸친 종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30년 전쟁)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음에도 오스트리아를 적대했던 탓에 신교 국가 편에 섰다.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던 이 전쟁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결이면서 중앙 군주국 대 봉건 제후국의 대결이기도 했다. 30년 전쟁 중 유럽에서는 무려 800만 명이 죽었을 정도로 유래 없이 잔혹한 전쟁이었다. 특히, 강력한 왕정이 아닌 제후국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던 신성 로마 제국(지금의 독일)은 제후국들이 종교에 따라 갈라지며 전장의 한가운데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교와 구교 칸톤들로 나뉘어 내전 위기까지 갔던 스위스 동맹은 타협을 통해 기가 막힌 수를 둔다. 참혹한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신성 로마 제국을 보고 정신을 차린 스위스 동맹은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칸톤들이 단합하여 '스위스의 중립'을 선언하고 동맹의 국경 방어에 모든 군사력을 투입하게 된다.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스위스의 '무장을 통한 중립 유지'는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30년 전쟁 후 유럽의 질서는 완전히 재편되었고 전쟁의 참화를 슬기롭게 피했던 스위스는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합의한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1648년에 네덜란드와 함께 합스부르크가로부터 공식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1291년 3주 동맹 결의 이후 약 350년 만이었다.
한편, 박물관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오래된 스위스 국기였다. 낡고 헤진 적색 깃발 위 흰색 십자가에는 '조국과 명예를 위해(Fur Vaterland und Ehre)'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고 월계관이 감싸고 있는 검은 승리의 영광이 드러난다. 이 깃발은 1815년에 제작되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으로부터 복귀한 스위스 연대에게 수여된 4개의 깃발 중 하나로 현대 스위스 국기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혼란을 틈타 실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위대한 군인이자 근대 유럽을 지배했던 프랑스의 황제였다. 종교 전쟁 이후 무장 중립을 지키고 있던 스위스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져 프랑스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 만다.
1798년 나폴레옹은 점령지 스위스에서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스위스 동맹을 무너뜨리고 헬베티아 공화국(Helvetic Republic)이라는 정부를 수립하여 19세기 말까지 실질적으로 스위스를 예속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스위스군을 프랑스군에 편입한 후 전쟁에 투입했는데, 스위스 연대는 전통에 빛나는 붉은 바탕의 흰색 십자가 깃발이 아니라 윌리엄 텔이 그려진 정체불명의 헬베티아 공화국 인장을 깃발로 사용해야 했다.
깃발 없는 스위스 연대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까지 끌려갔다가 궤멸을 당하기도 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박물관에 보관된 이 낡은 스위스 깃발은 나폴레옹 군에서 복귀한 스위스 군대가 비로소 자국의 국경 수비대로 재배치될 때 주어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본군에 징집되어 겪었을 설움이 오버랩되는 스위스 역사의 단면이다. 프랑스의 간섭 이후 '무장 중립'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은 스위스는 군사력을 더 늘리는 한편 전국에 교량과 터널, 군사용 도로를 뚫어 방위태세를 더욱 갖추게 된다.
스위스의 역사를 중심으로 두어 시간가량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왔더니 어느새 비가 멎어 있었다.
숙박료가 매우 비싼 취리히에서 저렴한 가격에 이끌려 예약해 둔 호텔은 도시 북쪽의 테크노 파크 안에 있는 곳이었다. 자동차 없이 여행을 다닐 때는 대중교통과 도보 동선을 위주로 보게 되는데, 차를 렌트해서 다닐 때는 가격과 편의시설을 먼저 따져보게 된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호텔은 나름 깔끔했지만 문제는 주변에 별다른 편의 시설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녁을 해결할 장소를 찾다 보니 숙소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다는 평가가 좋은 퐁듀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 프랑스어권은 가지 않아서 퐁듀를 맛볼 기회가 없었는데 ‘올타꾸나’ 하고 가족들을 재촉했다. 그러나 터덜터덜 걸어 가 본 레스토랑 건물의 입구는 철문이 굳게 내려져 있었고 주변 분위기는 적잖이 험악했으며 심지어 간판도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GPS의 위치 표시가 잘못되었거나 이미 폐업했던 것.
주변이 관광지나 시내 중심가가 아니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편하게 저녁을 해결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출장이 잦은 나로서는 일상적인 비즈니스 구역 풍경이라 익숙했지만 여행 외에 새로운 곳에 갈 일이 없는 가족들로서는 '우리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가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딸은 급기야 ‘난 그냥 굶을래!'라며 체념하기 시작했고 아내는 아무 말없이 내 뒤에서 걷고 있었다.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 나는 속으로 '제발!'을 외치며 그나마 레스토랑 같아 보이는 곳으로 아이들을 이끌었다.
'저렴한 레스토랑 겸 펍'을 표방하는 곳의 내부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카운터에는 주문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여기 괜찮아 보인다. 들어가자!'
5분가량 입구에 서 있어 봤지만 자리를 안내해 주는 사람이 없어 답답한 마음에 앞사람에게 물으니 약간 특이한 선불 시스템이 있었다. 입구 카운터에서 주문과 계산을 하면 번호표를 주는데, 빈 테이블을 찾아 앉아 받은 번호표를 올려두면 종업원이 알아서 음식을 가져다주는 시스템이었던 것. 회전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지만 우리 같은 뜨내기로서는 좀 불편했다.
내부는 시끄럽고 빈자리가 없어 우리는 야외 테이블로 나와 자리를 잡았다. 쌀쌀한 저녁 시간이라 밖에는 우리뿐이었지만 술자리가 왁자지껄한 실내에 아이들을 앉히기는 싫었다. 바다가 없는 스위스인데 왜 이 집에서 홍합 요리가 유명한지 주문을 하면서 이유를 물었다.
'우리 집은 매일 프랑스에서 홍합을 공수해 와요!'
종업원의 대답에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고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는 홍합 한 접시를, 아이들은 스테이크와 라비올리 등 취향에 따라 무난하게 주문을 했다. 하지만 홍합 요리는 씨알이 작아 감질맛이 났고, 스테이크는 부드러웠지만 짠맛이 강했으며 라비올리도 너무 짜서 딸이 반도 먹지 못했다. 현지인 입 맛이 꼭 우리와 맞으라는 법은 없으니 좋은 경험을 했다고 치기로 했다.
여름 해가 길어 느지막이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비는 완전히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