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팅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즐거운 주말 되시고 월요일에 봅시다!"
휴우-
긴 한숨과 함께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점심 먹고 내린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창 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휩싸인 채 비바람을 뚫고 달리는 자동차들의 전조등 불빛이 간간히 유리창을 비춘다. 북유럽의 겨울은 유난히 해도 짧아 점심을 먹고 돌아서면 해가 지기 시작한다. 파란 하늘은 일주일 내내 못 볼 때가 더 많아 그나마 햇빛이라도 비추면 호강하는 기분이다.
방문 밖 거실 너머 주방에서 들려오는 딸그락딸그락 소리에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분주한 손놀림을 느끼고 식탁에 앉아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이 녀석들이 유튜브에 올릴 동영상을 편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또 하루가,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는 이 곳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이 무너진 지 일 년이 되어가고 있는 네덜란드이다. 가택 연금에 가까운 격리 생활로 네 번의 계절을 보내버렸으나 지금까지 상황이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올 겨울, 영국에서 워낙 많은 일일 확진자가 쏟아져 관심은 적지만 인구 1,700만 명에 불과한 소국 네덜란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하루 확진자는 기어이 1만 명을 찍었다. 재앙 아닌 재앙이 닥친 유럽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한 나의 일 년은 어떻게 갔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작년 3월 중순,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데 인사팀장이 급하게 나를 찾았다.
"방금 정부에서 발표를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도 2주간 재택근무를 시행해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준비도 없이? 마스크 쓰면서 일단 버텨보는 건 안될까요?"
"정부 방침도 발표되었고, 직원들의 인식도 있는 데다 안전상 그건 안될 것 같아요."
이럴 때 유독 이 친구는 원칙이 확고하고 직설적인 더치(Dutch) 여자로 변한다. 내가 마스크 써야 한다고 할 때는 정부의 가이드가 없는데 굳이 왜 써야 하냐며 반문하던 친구들이었기에 태세 전환이 눈부시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가뜩이나 인사 관리가 쉽지 않은데 재택으로 일이 제대로 돌아갈까 라는 걱정부터 정부의 권고안을 제 때 시행하지 않을 때 불어닥칠 직원들의 컴플레인이나 법적인 문제들, 그리고 무엇보다 직원들과 가족 모두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걱정 등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덜란드에 들어와 있는 다수의 서구권 대기업들은 이미 '연말까지 재택근무'를 선언했던 터라 직원들의 눈과 귀는 온통 이 결정에 쏠려 있을 것이 뻔했다.
'아이고 머리야...'
작년 초에 중국 우한에서 신규 바이러스로 인해 난리가 터지고, 2월부터 한국에서 대구를 진앙지로 확진자가 크게 늘어날 때만 해도 아시아에서 멀고 ‘안전해 보이는’ 유럽에 있었기에 나는 한국만 걱정했었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출근길 기차 안 풍경은 물론 길거리와 슈퍼마켓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여전히 일상은 평온해 보였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미개한 나라에서 발생한 전염병 정도로 치부되어 뉴스에서나 보는 수준이었다. 미디어에서 연일 중국의 박쥐 먹는 풍습이 쏟아져 나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유럽 각국이 중국발 항공기를 막기 시작하고 네덜란드 정부마저 한국을 적색 국가로 등록해 항공 운항에 대한 제동을 논의한다는 뉴스를 볼 때는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러던 중 급기야 우려하던 인종차별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당시 아내가 아이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뭔가 주의를 주는데, 세정제로 손을 잘 닦고 마스크를 쓰라는 교육과 더불어 백인 아이들이 시비를 걸어도 절대 대꾸하지 말고 집으로 곧장 오라는 내용이었다. 소셜 미디어의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심심찮게 아시아인을 향해 침을 뱉거나 계란을 던지고 간다는 인종차별 문제가 급격히 이슈가 되어 마음이 착잡하던 때였다.
중국과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두 눈을 뜨고 보면서도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와의 교류와 이동을 차단하면 될 줄 알았던 지 별다른 대책을 준비하지 못했다. 요즘처럼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된 시대에 단편적인 조치로 네트워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안일함과 더불어 바이러스는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망각한 각국 정부의 미숙한 대처와 미디어의 인식이 방역망을 무력화하고 인종 차별을 부추긴 꼴이 되어 버렸고 결과는 참혹하다.
2020년 2월 중순이 지나면서 가까운 이탈리아에서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더니 3월 초에는 급기야 나라 전체가 봉쇄되는 상황을 보면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일 7-8천 명씩 진단을 하고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며 감염 고리를 추적하고 있던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이 곳 유럽은 상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2월의 마지막 날, 드디어 네덜란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다. 하지만 확진자들은 알아서 자가 격리해야 할 뿐 병원에 갈 수는 없었다. 의료 시스템 붕괴가 더 걱정된 네덜란드 정부는 위중한 환자가 아니면 확진자라 해도 병원에 갈 수 없도록 했으며 구체적인 방역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한국식'으로 모두 진단하고 추적해서 병원 치료를 하다가는 의료 시스템이 붕괴할 것이며, 방역 정보 공유보다 개인 정보의 유출 문제를 더 우려했다. 그 상태로 3월 중순이 되니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정부가 결국 봉쇄령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왕 재택근무를 해야 한다면 다음 주부터가 아니라 당장 내일부터 2주간 시행합시다.'
인사팀장과 상의하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상당수 직원들이 이미 유럽과 중동 각국에서 원격으로 근무하는 체제라 2주간의 재택근무 정도는 소화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고성능 컴퓨터 장비 때문에 재택이 어려운 부서가 있었으나 필요한 기기들은 모두 집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철없는 젊은 직원 몇 명이 환호하는 것이 멀리서 보여 인사팀을 통해 바로 재택근무는 위치만 바뀔 뿐 업무에는 어떠한 영향도 없다는 '엄숙한' 주의문도 공지했다.
2주라는 '긴' 시간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지키면 상황이 바뀌어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체제였기에 걱정은 있었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늦어도 더운 여름이 되면 바이러스도 줄어들고 다시 정상화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세계적 감염병 대유행 즉, 팬데믹(Pandemic)의 1차 웨이브 당시 선진국들이 모여있는 대륙이라 믿었던 유럽은 그 어느 지역보다 감염병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유럽은 솅겐(Schengen) 조약으로 인해 20여 개에 달하는 국가들은 국경이 없이 한 나라처럼 열려 있으나 팬데믹에 대한 방역 지침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국가별로 알아서 방역 대응을 하거나 EU 차원에서 일관된 정책을 펴려면 사전에 협의를 하는데 이게 시간이 걸리고 이해관계가 달라 신속하고 일관된 방역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팬데믹 초기에 각국 정부가 이탈리아 정부를 얼마나 비난했던가.
둘째는 의료 인프라가 취약하여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진단 자체가 매우 더딜 뿐 아니라 설사 확진자가 나왔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치료를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경제가 불안정한 라틴국가들(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과 구 소련 체제였다가 EU의 동진 정책에 따라 비교적 최근에 가입한 동유럽(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국가들은 의료인들마저 돈을 벌기 위해 진작에 영국이나 독일 등 서유럽으로 빠져나간 상태라 상황이 훨씬 더 좋지 않다. 루마니아는 의사의 절반 가량이 서유럽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는 이미 2월에 국가적으로 의료 체계가 붕괴된 바 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많은 서유럽 국가들은 영국식 공공 의료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아프면 국가가 책임진다'는 개념 하에 2차 대전 후 영국의 복지 정책을 벤치마킹하여 서유럽 국가들에 자리 잡은 지금의 의료 시스템은 의료의 품질과 서비스 면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예전에 영국에서 살 때, 질 낮은 의료 서비스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영국에서는 몸이 아프면 골치가 더 아프다) 네덜란드의 공공 의료 시스템 역시 영국에 비해 열악했으면 열악했지 나은 점이 없다.
이탈리아에 이어 엄청난 피해를 본 스페인은 말할 것도 없이, 그나마 유럽에서 가장 인프라가 발달되어 있다는 영국마저 거의 '방역 포기'를 선언했다. 차라리 독일처럼 확진자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면 중증 환자 치료도 가능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특정 지역에서 확진자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면 순식간에 병원이 마비되고 의사는 부족해서 중증 환자들이 치료를 못 받아 사망자도 크게 늘어난다.
'누구를 포기하고 누구를 살려야 할지 우리가 정하는 상황'이라고 울부짖은 한 이탈리아 간호사의 호소 영상이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1차 팬데믹 당시 이미 영국의 존슨 총리와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많은 국민이 감염될 것을 가정해서 대응책을 수립하고 발표한 마당이었다. 현실을 인정한 빠른 손절이 아닐 수 없다.
네덜란드 정부의 가이드 역시 ‘의심 증상이 있으면 GP(General Practitioner 주치의, 동네의원)에 가지 말고 전화하세요’가 전부였다. 정부 방침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유증상자는 전화로만 신고하고 집에서 대기하면 의료 요원들이 방문해서 진단 검사를 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진단 자체도 며칠 기다려야 하는 데다 확진자가 되어도 중증 상태가 아니면 병원에 갈 수도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감기 몸살을 다루듯 알아서 버티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이 곳의 기본 인식은 ‘어차피 많이 걸릴 텐데 경증 환자로 병원을 마비시키지 말고, 차근차근 순서대로 다 치료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개인 정보 등에 대한 법률 규제가 심해 정보가 제대로 공유될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 사무실이 있던 건물에서도 확진자가 나왔으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주의하라는 정보만 HR을 통해서 알려줄 뿐 어떤 추가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회사 내에서 확진자가 나와도 HR 부서만 정부로부터 통보를 받고 정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 개인과 관련한 어떤 정보도 공유할 수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몇 층에서 누가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 공개되는 정보도 '도시' 단위에서 몇 명 확진자가 나왔는지만 공개될 뿐 확진자의 동선이나 구체적인 지역 조차 알 수 없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보통 2월 말에 서유럽 내 각국 학교에서는 중간 학기 방학이 있는데, 작년에도 중간 학기 방학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3월의 유럽 1차 대유행은 2월부터 이탈리아발로 전 유럽에 퍼진 바이러스가 각 지역에서 감염을 퍼뜨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누가 어떤 경로로 감염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방역은 불가능했다.
넷째, ‘자유와 인권의식'으로 쓰고 ‘극단의 개인주의’로 읽는 시민의식을 들 수 있다. 비교적 정부 지침에 충실한 네덜란드 사람들조차 자발적인 협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어려운 일이다. 확진자가 폭증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는데, 기차 안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이 공지된 후에야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플랫폼에서부터 죄다 마스크를 벗는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라는 시위는 끊임없이 벌어졌었고, 일 년이 넘은 지금도 길거리에서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심지어 연말에 전통적으로 하는 폭죽놀이를 금지시켰더니 금지일 전날까지 엄청난 폭죽을 쏘아댔었다. 3월의 1차 유행 때보다 10배 넘게 늘어난 겨울의 확진자 수는 ‘경제 문제’ 때문에 방역을 다소 완화했던 여름에 신나게 여행 다니고 휴가를 즐긴 사람들이 주된 원인임은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우리나라는 대구에서 1차 유행이 현실화되었을 때 전국의 의료인들이 지원을 가서 헌신했던 미담이 전해 지지만 유럽인들에게 이런 헌신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오히려 3월 말 경에 네덜란드의 보건 장관이 과로로 쓰러진 후 사임했다는 뉴스를 보고 쓴웃음이 났었다.
여기 일반 회사에서는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번아웃’으로도 병가가 가능하다. 한번 병가를 내면(극단적일 경우) 몇 년이고 회사를 안 나올 수도 있는데, 회사는 그 기간 동안 꼼짝없이 급여를 지급해야 할 정도로 노동자/근로자 친화적인 나라이다.
참고로 OECD 국가 중에는 한국만이 유일하게 상병 휴가가 없다. 아파도 참고 일하는 것이 상식인 한국과 스트레스마저 병가 사유가 되는 네덜란드는 양 극단에 있다.
아무튼 지난 3월의 네덜란드 상황이 의료인도 아닌 보건 장관이 과로로 쓰러져 사임할 정도였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언론에서는 '미담'처럼 나오기도 했으나 내 눈에는 장수가 전쟁 중에 힘들다고 부대를 버리고 도망간 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업무상 스트레스를 이유로 몇 달간 급여를 받으며 회사에 나오지 않는 '얌체' 직원과 비교한다면 지나친 과장 인지.
재택근무를 선언했던 2020년 3월 중순 이후로 1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우리는 정상적인 사무실 근무를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상황이 다소 호전되었던 여름에만 잠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 사무실 출입을 허용했었지만 날이 쌀쌀해지며 상황이 악화되는 바람에 그마저 취소했다.
지난해 팬데믹 초기, 호주 등지에서 화장지 사재기로 문제가 되는 뉴스가 있었는데 네덜란드에서도 시차를 두고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침 일찍 빵을 사러 동네 마트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온갖 식료품들이 선반에서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내가 호주 뉴스를 보면서 미리 알음알음 식자재와 화장지를 사두었기 망정이지 몇 주간 고생을 할 뻔했다.
정부에서 사재기는 필요 없다는 안내를 지속적으로 하면서 이런 현상은 오래지 않아 정상화되긴 했다.
정작 문제는 마스크였다. 한국에서 마스크 공급 부족으로 공적 마스크가 큰 이슈가 되었을 때 유럽에서는 '마스크가 바이러스를 막는다는 증거가 없다'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테러리스트나 중환자가 아니라면 입과 코를 가려야 한다는데 거부감이 큰 문화이기 때문에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한 것도 대규모 유행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을 때야 비로소 검토되었다.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직원들이 감기에 걸렸을 때 회사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쉬는데, 그 주된 이유가 '남들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7년 전 유럽에 처음 왔을 때는 이게 그럴듯한 핑계로 들렸으나 이제는 이들이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심한 감기에 걸려도 병원에서는 별다른 약을 처방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컨디션을 관리해야 하고, 자기를 통해 감기가 퍼지면 민폐이므로 아예 회사에 나오지 않는 것이 에티켓인 것이다.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없는지 시장에는 바이러스 차단이 가능한 수준의 마스크를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오죽했으면 의료인들이 써야 할 마스크가 부족하다며 일반인의 의료용 마스크 착용을 금지했겠는가. 안되면 될 때까지 방법을 찾는 한국인의 '독한' 마인드와는 정말 다르다.
봄에는 한국도 마스크 대란이라 한국인 찬스도 쓸 수 없었던 우리는 가급적 밖에 나가지 않는 전략을 썼다. 여름에는 배송에 대한 용량 제한이 있어 많이 못 받다가 가을에서야 한국의 친척으로부터 충분한 양의 KF94 마스크를 받게 되어 한 시름 놓았고 너무나 감사했다.
네덜란드에서는 가을의 2차 유행부터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어 상황이 좀 나아졌으나 여전히 천 마스크를 대충 걸쳐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천 마스크로 무슨 바이러스를 막는단 말인가.
집 근처 슈퍼마켓도 정부 방침에 따라 출입 인원수를 통제하고 실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으나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사람과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온라인 쇼핑에 의존했다. 문제는 배달 슬롯이 몇 개 없어서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인데 손가락 품팔이에 능한 아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배달이 가능하도록 부지런히 인터넷을 누볐다.
한국은 대중교통을 시작으로 온라인 쇼핑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편리한 나라이다. 다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늘 뒷받침되어 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지하철과 기차도 멈추는 런던과 달리 서울의 지하철은 설이나 추석 명절에 오히려 더 늦게까지 운행한다. 우리나라에서 ‘시민 편의'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국에 오래 살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점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온라인 쇼핑이 크게 늘 것이 뻔한데도 네덜란드의 대형 온라인 마트는 하루에 배송 가능한 슬롯을 정해두고 있어 내가 받고 싶다고 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편리한 한국의 온라인 쇼핑 뒤에는 하루 17시간씩 일해야 하는 택배 노동자들의 노고가 있다는 뉴스를 늘 접한다.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보다 불편함을 나누는 곳이 선진국이다. 그런 면에서 네덜란드는 조금 '지나친' 선진국이 아닌가 혼자 투덜거려 본다.
온라인 쇼핑에서 배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찮은 곳이라 이를 아끼기 위해 아내는 배달을 주로 주말 저녁에 받았다. 음식품이 집에 도착하면 전에 없던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배송 직원들조차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으니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는 아내의 주장에 따라, 물품이 도착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물건을 세정재로 닦는다. 세정재 냄새 때문에 창문을 열어두고 물건을 닦는 일이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외식도 없고 일주일 내내 삼시 세끼를 집에서 해 먹으니 식자재의 양이 많아 현관문 옆에 미니 판트리(pantry)를 만들어 보관 용도로 사용했다. 네덜란드 마트뿐 아니라 독일의 한인 마트에서도 온라인으로 장을 보기 때문에 엥겔 계수가 매우 높을 것이다.(외식이 없으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의 양도 예전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커피를 매우 좋아해 생두로 홈 로스팅을 하고 그라인더로 갈아 모카 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는 것을 즐긴다.(로스팅은 이제 귀찮아 안 한다.) 사무실에 나갈 때는 주말에만 즐겼던 이 커피를 매일 만들어 마시다 보니 삼시 세끼 외에 하루 2잔씩 마시는 커피의 원두도 많이 든다.
식자재에서 나오는 각종 플라스틱이며 포장재 쓰레기와 함께 빈병과 커피캔, 맥주캔과 와인병과 같은 재활용 쓰레기가 엄청 나온다. 배달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곳이 이런진데 한국처럼 배달 음식 문화가 발달한 곳은 매일 나오는 쓰레기의 양이 얼마나 될지 감이 안 잡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격리 생활이 몰고 온 가장 큰 변화는 대부분의 일상이 비대면/온라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출장을 가서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일이 된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강제로 만나지 못하게 되니 화상과 전화 회의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처음에 우려했던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일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업무의 생산성은 직접 얼굴 보고 앉아하는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다. 사무실이라면 옆자리에 가서 5분만 상의하면 해결될 문제를 문자나 이메일, 통화로 하다 보니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 반나절 이상 걸리기도 하는가 하면 별도로 콜 시간을 잡고 일정부터 봐야 해서 며칠씩 기다리기도 한다.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의 협력 업체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보니, 원래 일정보다 몇 주씩 딜레이 되는 업무가 허다하다.
직원들과 직접 만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무엇보다 각각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나 애로사항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사람 대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적인 표현보다 비언어적인 표현(표정이나 말투, 손짓 같은 것)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법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화상마저 뜸해지고 통화로 많이 하다 보니 조직과 개인 간의 유대감이 떨어지기 쉽다.
더구나 우리 사무실에는 20여 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국적과 문화가 있고 유럽뿐 아니라 중동, 북미, 아시아 등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원래부터 인사 관리의 난이도가 있는데, 코로나로 인한 격리생활이 그 어려움을 크게 가중시켰다. 이를 헤쳐가는 데는 최대한 잦게 일대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법 말고는 왕도가 없었다.
가끔씩 진행하는 온라인 '회식'이나 소소한 이벤트는 있었으나 본질은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것이다. 작년에도 적지 않은 직원이 퇴사하고 입사했는데, 새로 들어온 직원들 중에는 아직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퇴사하는 직원들도 직접 만나서 인사하지 못하는 게 늘 맘에 걸린다.
작년 봄 회사가 재택근무를 시작했을 때, 아이들의 학교도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했다. 각급 학교들은 정부 방침에 따라 부활절 연휴가 끝나는 4월 중순까지 학교에 오지 않도록 했다가 결국은 여름방학까지 온라인 수업을 유지했다. 방역이 불안한 네덜란드에서 학교가 온라인으로 전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우리 가족에게는 큰 걱정이 있었으니 바로 첫째 아이가 대입 수험생이라는 것이었다.
영국 대학을 준비하고 있던 딸은 원래 5월에 대학 입시(A levels)를 치렀어야 했는데 코로나 19 사태로 영국 교육 당국이 대학 입학시험을 취소해 버렸다. 시험 대신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아이는 꽃피는 봄날에 매일 불안해했다.
원하는 대학교에는 모두 지원을 해 둔 상태였으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초조한 가운데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아이는 6월에 온라인으로 졸업식을 했다. 입시 결과가 8월에 나오니 영 개운치 않은 상황에 아이는 학교에 가보지도 못한 채 집에서 학교 선생님 및 친구들과 작별한 것이다.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유럽에 와 2개 나라의 학교에서 쉽지 않은 학창 생활을 멋지게 끝낸 아이에게 나는 진심으로 따뜻한 축하를 건넸다.
한편, 영국은 대학 신입생 선발 전형 결과가 발표된 8월에 온 나라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교육 당국이 코로나 사태로 취소된 대입 시험과 중학교 졸업시험(GCSE) 결과를 내신과 학교별 과거 평가 이력에 따라 알고리즘을 만들어 학생들의 학력 평가 등급을 산정했는데, 이게 예상을 넘는 오류를 일으켜 엄청난 후폭풍을 불렀기 때문이다.
영국 수험생들은 봄에 있는 대입 시험을 앞두고 이전 해 가을에 교사들이 평가한 과목별 예상 학력 평가 등급(A/B/C 등)을 기준으로 원하는 대학에 미리 지원한다. 이후 전형을 통해 연초에 각 대학으로부터 조건부 입학을 허가받는데 이 '조건'이 바로 이듬해 5월에 치르는 대입 시험에서 예상 평가 등급 이상의 성적을 내는 것이다.
취소된 대입 시험 대신 별도 알고리즘에 따른 학력 평가 등급 산정 결과, 어떤 학생들은 평가 등급이 예상 대비 2-3단계가 떨어지는 바람에 지원한 대학들에서 우수수 떨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결국, 영국 교육 당국이 다시 평가 방식을 바꾸었다. 오락가락하면서 몇 주 단위로 입시 정책을 바꾼 영국 정부는 코로나 대응뿐 아니라 교육 정책에서도 크게 신뢰를 크게 잃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딸이 1순위 희망 대학에 합격해 우리 가족은 모두 한 시름을 놓고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한편, 일반 중고등학교는 원래 4월 부활절 연휴까지 온라인 수업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코로나 19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온라인 수업이 계속 연장되는 바람에 둘째 아이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에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부실한 코로나 방역 탓에 5개월 만에 등교하는 아이의 모습에 불안감이 앞섰다.
가을부터 시작된 코로나 19의 2차 대유행으로 아이 학교에서는 교직원뿐 아니라 학생들 중에서도 확진자가 속출했다. 아이의 말에 따르면 적지 않은 학생들이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으며 어린 학생들인지라 거리두기는 지켜지지 않는 듯 보였다.
학교는 오직 확진자와 밀착 접촉자로 분류된 학생들에게만 별도로 연락해서 진단을 받도록 했으며, 같은 학년이라 해도 밀착 접촉자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는 학생들에게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물론, 누가 확진자인지는 알 수 없다.) 불안했던 내가 학교에 연락해 '이런 환경에 아이를 보낼 수 없다'며 온라인 수업으로 하겠다고 주장했다가 교장으로부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학교를 믿어 달라'는 레터를 받기도 했다.
확진자가 끊임없이 나오는 상황에서도 대면 수업을 강행하는 학교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역은 아이가 마스크를 벗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불편함을 참고 집에 올 때까지 마스크를 벗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었고, 점심도 건물 밖에 나와서 먹기로 했었다. 온 가족이 집 안에서만 지내며 격리와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혹시나 아이가 학교를 통해 가족 감염의 경로라도 될까 봐 노심초사했던 때였다.
2021년 초 현재, 최악의 코로나 19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는 다시 모든 학교가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다. 시간에 맞추어 자기 방에서 태블릿을 들고 자연스럽게 수업에 들어가는 둘째를 보며 어쩌면 우리 아이들 세대는 이런 모습이 더 편한 일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