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배경여행, 광명시
우리 가족이 광명의 주공 아파트로 이사 한 건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광명에서 부천 역곡으로 안산 반월을 거쳐 다시 광명으로 돌아온 것이다. 엄마 아빠의 눈에 1988년식 신축 주공 아파트는 주거비 부족으로 서울에 진입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잊을 만큼 훌륭했던 것 같다. 깨끗한 새 아파트는 연탄을 때야 했던 구식 아파트와는 차원이 달랐고, 육층 남향집 거실에는 밝은 꿀빛 햇살이 고였다.
- 최은영, <601,602>의 시작
퇴근길 교보문고 신작소설 코너에서 몇 권의 책을 들춰보던 나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그대로 멈춰 섰다. 몇 분 동안 어린 내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 곁에 있던 두 명의 아이들을 그렸다. 한주영과 장기준(가명. <601,602> 속 인물들의 이름을 빌렸다. 소설 속 캐릭터와는 무관.) 내 생애 최초 ‘친구들.’ 우리 셋은 광명에 있는 주공아파트 한 단지 안에 살고 있었고 동네 입구에 위치한 유치원을 함께 다녔다. 내가 가운뎃 동에 살고 있었고, 산에 가까운 뒷 동엔 기준의 집이 있었다. 앞 동엔 주영이가 살았다. 네살 터울의 어린 동생과 함께 엄마가 집에 있었던 나와 달리 둘의 부모님은 낮에는 집을 비웠다. 하지만 주영의 부모님은 (내 기억이 맞다면) 의사, 약사를 하고 있어 살림이 넉넉했고, 할머니가 주영을 하루 종일 돌보았다. 우리 집보다 더 큰 평수에, 보다 남쪽에 서있는 주영의 집은 늘 밝고 따뜻한 느낌이었고, 그 집의 분위기만큼이나 주영은 해맑았다. 단짝으로 지내는 내가 여자아이지만 키도 크고 달리기도 빠르고 힘도 셌음에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할머니, 부모님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티 없이 자라는 어린이였고 자주 웃었다. 한편 북쪽 동에 살던 기준의 표정엔 어딘가 그늘이 있었다. 나는 미즈무라 미나에의 《본격소설》 속 주인공 아즈마 다로의 어린 시절 묘사를 읽으며 기준이 생각나곤 한다. 미즈무라의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어린아이답지 않게 까무잡잡하고 잘 다듬어진 얼굴’로 기억한다. 몇 번인가 놀러 간 기준의 집은 굉장히 어둡단 인상을 받았고, 부모님은 늘 늦은 시간에 돌아오는 듯했다. 그리고 기준의 아버지가 안 계셨을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주영에 비해 기준는 말수가 적고 우리 둘 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다른 여자 친구들도 몇 명 있었을 텐데, 이름이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가장 친했던 이들은 기준과 주영, 두 명의 남자아이였던 것 같다. 운동회에서 이인삼각을 하거나, 짝을 지어 춤을 추는 학예회, 두 줄로 나란히 걸어야 하는 소풍 때마다 나는 둘 중 누구와 짝꿍을 해야 할지 망설였던 기억도 어렴풋이 갖고 있다. 어제 친정에 가서 앨범을 보니 나는 대부분 주영과 짝꿍을 하고 있었다. 사진에는 내가 주영을 떨어뜨려놓고 먼저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나, 주영일 뒤에 앉히고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내게 무해한 사람》에 수록되어 있는 <601,602>란 단편 소설에는 주영과 효진이 등장한다. 둘은 광명의 한 주공아파트 같은 동 같은 층에 나란히 살고 있다. 칠곡에서 온 효진은 다섯 살 터울의 오빠 기준과, 그 오빠에게 절절매는 엄마가 함께 살고 있다. 효진은 오빠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하지만 그의 부모는 방관한다. 주영은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목격하게 된다.
광명은 마음먹고 가보지 않으면 갈 이유가 특별히 없는 동네다. 근처에 이케아가 있어 몇 번 가구를 사러 갔지만, 이케아의 가구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조립을 해야하므로 옛 동네를 둘러볼 여유는 없다. 그래서 살던 동네를 찾아가 보는 일을 몇 번이고 미루다가 지난 주말 마침 미세먼지도 없고 해서 찾아갔다. 함께 간 남편은 생각보다 오래된 느낌이 없어 놀랐다고 말했다. 내가 봐도 동네가 그리 낡은 느낌이 안 들었고, 주영과 기준과 다녔던 유치원도 기억보다 세련됐다. 아무래도 올해 남편과 내가 이사 온 도시에 어린 시절 살았던 곳보다 더 오래된 주공아파트들이 남아 있어서, 이런 풍경을 매일 마주하다 보니 그리 느꼈을지도 모른다. 동네 아이들은 이 추위 속에서도 모여서 놀고 있고,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이 아파트 입구를 드나들고 있었다. 쓰레기통은 가득 차있고, 어두워지니 집들 마다 불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기 겸연쩍었다. 나에게만 추억이지,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일상이니까. 그리고 그 일상에 조금이라도 폐가 되어선 안 되니까.
꽤 오랜만에 찾아간 동네지만 떠올려보면 나는 광명시와 오랜 기간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 한일 친선 협의회장이자 시의원도 하고 있는 故곤도 슈지씨란 분과 가깝게 지냈다. 그때 곤도 씨가 나에게 서울의 위성 도시 중 일본의 한 도시와(그곳도 대도시 곁에 있는 위성도시) 자매결연을 맺을만한 곳이 없을지 추천해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광명)와 살고 있는 도시(일산), 그리고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도시(하남) 세 곳을 추천하였다. 살아 보았고, 자주 방문한 도시가 딱 그렇게 세 곳뿐이었으니까. 살고 있던 도시는 규모가 너무 커서 어려웠고, 나머지 두 곳을 실제로 가보고 싶다는 곤도 씨에게 우리 아버지를 소개해주었다. 나는 일본에서 학교에 나가야 했으니까. 그렇게 우리 아버지는 곤도 씨를 차에 태워 광명시와 하남시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의 야마토시와 광명시가 자매결연을 맺었단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기간을 광명시에서 보냈으니까 아마도 광명시를 더욱 긍정적으로 소개하지 않았을까.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그렇게 맺어진 연은 아직까지도 잘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광명시의 학생들과 야마토시의 학생들이 서로의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면서. 최은영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쇼코의 미소>란 작품을 통해서였다. <쇼코의 미소>는 주인공 쇼코가 자매결연을 맺은 소유의 학교를 방문하고, 소유의 집에서 일주일간 머물게 되며 전개되는 이야기다. <601,602> 소설의 배경에서 <쇼코의 미소>와 같은 이야기가 피어나고 있을 상상을 하면 왠지 묘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