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무작정 고집을 부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
-수요일-
갑자기 멍해졌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 병욱이 생각났다.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술 생각도 났다. 병욱이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병욱이가 제일 친한 친구라서 생각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병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병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뭔 일이냐? 저녁도 다 지나서?”
전화 너머로 텔레비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 미정이랑 헤어졌어.”
나는 약간 뜸을 들인 후 말했다. 맞은편에 미정이 남긴 카푸치노가 하얀 머그잔에 가득 차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품이 채 가시지도 않았다. 문득 왼손이 어색해져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었다. 커피 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병욱이 말했다.
“미친놈. 이제야 정신 차렸구나.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런데 이번엔 진짜지?”
“어.”
“지금 어디냐?”
“신촌에 카페.”
커피 잔을 힘없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집 근처 놔두고, 왜 헤어지러 신촌까지 갔어?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술이나 한잔 할래?”
“그럴까?”
“그럴까 가 뭐야 그럴까 가. 당연히 그래야지. 얼른 이리로 와.”
병욱이는 평소에 미정이가 마음에 안 들었다. 헤어진 마당에 나 대신 실컷 욕할게 분명했다.
“근데 많이는 못 마셔. 내일 출근해야지.”
“미친 새끼. 그건 니 상태 보고 이 형이 판단한다. 근처에 와서 연락 바란다, 친구야.”
눈을 한번 감았다 뜬다. 조심스럽게 앉고 있던 의자를 뒤로 빼내고 일어섰다.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아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왔다. 병욱이가 살고 있는 봉천동으로 가기 위해 전철역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쩌다 고개를 드니 길가에 활짝 핀 목련이 가로등에 비추어 눈이 부셨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그 아래서 왁자지껄 떠들며 목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며 3월 말의 차가운 밤공기가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이었다.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이 나를 잘 피해 가기를 바랐다.
카페엔 미정이 먼저 와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니 자기도 방금 왔다고 했다. 갓 나온듯한 카푸치노 잔을 두 손으로 감싸들고 있었다.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밤공기가 찼다. 나도 모르게 손을 한번 비비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커피를 주문하고 온다 하며 자리를 떴다. 웃으며 얘기하는 여자 점원에게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억지웃음인지 알 길은 없지만 미정의 웃음기 없는 얼굴이 대조적으로 떠올라 고개를 돌려 미정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봤다.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 커피가 나올 때까지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주문받은 점원이 커피가 나왔다며 다시 한번 웃는다. 자리로 돌아오니 미정의 하얀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시선은 창밖을 향하고, 두 손은 여전히 머그잔을 감싸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저녁은 먹었어?”
서로 연결되지도 않는 질문을 연달아 물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던진 질문이 미정의 대답이 늦어지면서 상황을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미정은 별일 없었고, 저녁은 아직 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으며 ‘헤어지자’고 했다. 미정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했고 입은 억지로 다물고 있는 듯 보였으며, 나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두 번 다시 서로 연락하지 말자고 했다. 휴대폰에서 연락처도 지우고, 이메일도, 메신저도, 인터넷에서도 가능한 서로의 흔적을 다 지우자고 했다.
우리는 전에도 헤어졌었다. 그때는 누가 먼저 연락해서 다시 만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조금 답답해져서 한 숨을 한번 쉰다.
“알았어.”
나는 짧게 답했다. 길게 얘기해서 좋게 결론이 난다 해도 석 달쯤 뒤에 다시 헤어짐을 얘기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스쳐간다.
미정의 두 눈이 나의 눈과 잠깐잠깐 마주치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내’라는 말을 하며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보이더니 카페 문으로 향했다. 미정이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커피 잔만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내게 커피를 주문받은 점원이 미정에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저 점원은 오늘 하루만 저 얘기를 몇 명에게 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교육받은 대로 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지겹지 않냐 하고 참견하고 싶었다. 그러면 점원은 ‘그게 하기 싫으면 저 그만둬야 하는데요?’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어쩌면 미정과 나는 반복되는 어떤 말들이 지겨워서 서로 그만뒀는지 모르겠다.
처음 몇 분간 나의 심정은 조각하지 않은 통나무와 같았다. 미정과 나의 지난 삼 년 간의 관계는 지금부터 어떻게 생각을 다듬어 가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겠지. 애써 나쁜 기억들을 파내어, 멋지고 아름다운 추억들로만 이루어진 조각품을 만들어 내려고 병욱에게 가는 전철 안에서 내내 무진 애를 썼다. 때론 순간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화에 조각품이고 뭐고 도끼로 쳐부숴 버리고 싶은 감정을 꾹 누르며 말이다. 미정에게 인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늘 이별 뒤에는 사랑을 시작할 때처럼 단순 명료하지가 않다.
마침 전철이 병욱이 사는 곳에 도착했을 때 병욱에게 전화가 왔다. 전철에서 내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철에서 나는 소리가 시끄러워 일부러 크게 말했다. 평소의 나라면 ‘어, 왜?’라고 말했을 텐데 달리 나오는 말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 현규야, 미안한데 오늘은 안 되겠다.”
병욱이 또 말했다.
“아, 갑자기 경희가 온다네. 얘는 완전 제멋대로야. 근데 너도 알잖아. 우리도 요즘에 약간 소원해진 거. 자기도 꽃피는 춘사월에 혼자 지내고 싶지는 않은 거겠지 뭐. 아니면 오빠의 남자 맛이 그리워졌거나. 크크.”
“그래. 그럼 내일은 괜찮아?”
나는 비난을 퍼부어도 시원찮을 판에 내일 약속을 잡는다.
“친구야. 내일은 내가 경희를 내 쫒는 한이 있더라도 너랑 술 마셔줄게. 우리 현규, 형이랑 약속할까? 미안해, 크크. 야, 어디서 방황하지 말고 일찍 집에 들어가라.”
병욱이 약속을 어긴 것, 조금 더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약속을 약 24시간 정도 미룬 것에는 어떠한 감정도 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욱과 전화를 끊고 난 뒤 이상하게도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일찍 집에 들어가라’
‘이 자식이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갑자기 화가 치민다.
계단을 천천히 올라 전철역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몇 개의 커피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들어가지 않기로 한다. 약간의 허기가 느껴져, 갈 곳이 떠오를 때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조금 먹기로 했다. 도로변 인도를 걷다가 차들이 쌩쌩 달리는 꼴이 보기 싫어 얼굴을 찌푸리며 골목으로 들어가 시장으로 접어든다. 병욱과 함께 가봤던 족발 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혼자 족발이나 뜯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족발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 옆 과일 가게에 진열된 딸기 박스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서 보니 빨갛게 잘 익은 딸기가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문득 딸기를 좋아하는 누나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 엄마가 딸기를 사 오는 족족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곤 했고, 누나는 시치미를 뗐다. 옳다 거니하며 누나 집에서 신세를 질 요량으로 딸기 두 박스를 사고 서둘러 시장 골목을 벗어나 다시 전철역이 있는 도로변으로 나왔다. 택시를 타고 누나 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점차 한 가지 생각만이 어렴풋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오늘은 정말 집에 가기 싫다.’
-목요일-
이른 아침, 나는 평소와 다른 부산스러움에 문득 잠에서 깼다.
‘아, 어제 누나네 집에서 잤지.’
머리맡에 놓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간밤에 아무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잠시 후 거실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 매형과 마신 맥주병 치우는 소리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가자, 누나는 상을 닦으며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일어났니?”
누나는 행주를 든 한 손을 움직이며, 고개만 내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곧 상을 부엌 한쪽 귀퉁이 세워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매형을 깨웠다. 매형에게는 세 살배기 조카를 깨워 얼른 씻기라고 말했다.
“현규, 너도 출근하려면 얼른 씻어라.”
문턱에 가만히 서서 눈을 비비고 있던 내게 말했다.
나는 누나 말대로 ‘얼른’ 씻고 나와서 대충 머리를 말렸다.
매형이 준 큼지막한 트레이닝복을 벗고, 고이 걸어둔 옷을 다시 주섬주섬 입었다. 그 사이 매형은 화장실에서 조카를 씻기고 있었고, 누나는 부엌에서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여느 맞벌이 부부의 아침 일상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식탁에는 조카도 같이 앉아서 밥을 먹었다. 정확히는 누나가 밥을 먹기 싫어하는 조카에게 밥을 떠먹여 주고 있었다.
“처남, 오늘은 집에 갈 거지?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집 나오는 사람이 요새 어디 있어.”
매형이 반찬을 떠서 크게 벌린 입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내가 그렇게 말했었나?’
미정이와 헤어졌다는 사실과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사실이 서로 인과관계가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매형이 식탁에서 던진 말로 인해, 이 두 사실은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둔갑했다.
“어이구 우리 동생, 고등학교 때도 안 하던 방황을 왜 서른 넘어 하시나.”
누나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누나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적 없어?”
나는 투정 부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두 개의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니 매형이 술 먹고 집에 늦게 들어올 때 집에서 나가고 싶은 적은 있어도,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적은 없는데?”
누나는 매형과 나를 번갈아보면서 말했다.
뒤이어, 누나와 매형 사이의 이런저런 대화를 들으며 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식사를 거의 마칠 때, 조카가 식탁에 있는 숟가락을 손으로 쳐서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됐다.
“난 먼저 일어날게.”
마지막 밥술을 입에 넣고, 입안에 음식물을 씹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방에서 가방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나의 두 발은 다른 여러 발들 사이에 파묻혀 바쁘게 전철역으로 향했다.
누나네 집에서 학교까지는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야 하고, 거리도 멀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교무실 책상에 앉으니 교무실 한쪽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소란의 주인공은 음악을 가르치는 이목련 선생님이었다. 주변의 무리에 껴서 얘기를 들어보니, 이목련 선생님 집에 어제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다. 학교 근처의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는 이목련 선생님은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글쎄, 장롱이랑 서랍을 다 헤집어 놓았더라고요. 바닥에 옷가지랑 책들이 막 흩뜨려져 있는데,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이목련 선생님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돈은 안 없어졌는데, 애초에 집에 돈이 없었으니. 좋은 옷 몇 벌이랑, 아 글쎄, 피아노를 망가뜨려놨어요. 건반 몇 개를 뽑아놨지 뭐예요. 뭐 이런 몰상식한 인간이 다 있는지.”
이목련 선생님은 어느덧 씩씩대고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그래도 사람이 없었으니 다행이라며, 그 순간 집에 있었으면 어찌할 뻔했냐며 이목련 선생님을 진정시켰다.
얼마 후, 교무실로 교감선생님이 들어오자, 나는 곧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목련 선생님은 교감선생님에게도 도둑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이목련 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른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교무실로 들어왔다. 교감 선생님은 아침 조회 시간에 몇 가지 전달 사항을 안내했다. 얼마 뒤, 1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선생님, 옷이 어제 입었던 옷이랑 똑같아요.”
칠판에 문제를 적으려 뒤돌아 서있는 동안 누가 말했다.
“와, 어제 집에 안 들어가셨나 봐요.”
뒤이어, 다른 목소리들이 계속 들려왔다.
“어디서 주무신 거예요?”
목소리들은 교실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딱 보면 모르겠냐? 여자 친구 네지.”
까르르, 교실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침착히 칠판에 연습 문제를 다 적고 돌아섰다.
“음, 선생님은 이 옷을 사랑해요. 그래서 똑같은 옷이 집에 두벌 있는데...”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한 벌은 여자 친구 집에 놔두셨나 봐요.”
교실은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교복 입은 여고생 집단을 말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희 너, 이리 나와서 이 문제 풀어. 틀리면 아주 혼날 줄 알아. 입만 살아가지고.”
나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세희가 입을 비죽대며 교실 앞으로 나왔다. 학생이 문제를 푸는 동안 수업종이 울렸다.
퇴근하고 예정에 없던 학교 근처 백화점에 들렀다. 아까 일을 생각하면, 내일도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할 수 없었다. 봄 옷 세일이 한창이었다. 여러 가지 옷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내일 출근할 때 입을 옷이다. 지금 입은 체크무늬 셔츠와 검은색 바지와 달라 보이는 민무늬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한 개씩 골랐다. 문득 혼자 쇼핑하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체크무늬 셔츠도 미정이 골라줬던 것인데.’
잠시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피팅룸에서 입고 나온 새 셔츠와 바지는 잘 어울렸다.
“사이즈는 잘 맞으세요? 요즘 잘 나가는 바지예요. 약간 색상이 짙게 나와서 다른 베이지색보다 컬러감이 더 좋아요.”
여자 점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이걸로 주세요.”
애초에 ‘컬러감’은 상관없었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어서, 병욱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전화해보니, 병욱은 이제 퇴근해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는 종종 가던 고깃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고깃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손가락으로 V 표시를 하고, 입으로는 두 명이라고 말하며, 식당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 테이블 차 있지 않았다. 이윽고 아주머니가 물과 물수건을 가지고 왔다.
“삼겹살 2인분 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나는 병욱이 오기 전에 미리 음식을 시켰다. 아주머니는 소주와 잔 두 개를 먼저 내오셨다. 고기가 나올 때쯤, 병욱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건 뭐냐? 내 선물이냐?”
병욱이 인사도 하기 전에 쇼핑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입을 내 옷이다. 오늘은 너네 집에서 신세 좀 져야겠다.”
하고 나는 선수를 쳤다.
“야 인마, 가출은 10대 때 해야 멋있지. 어제는 누나 집에서 잤다며?”
병욱은 입을 실룩대며 말했다.
“재워주기 싫으면 말고.”
“이 새끼, 그새 삐쳐가지고. 야, 우리 나이에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지쳐 출가를 해요. 가출이 아니라.”
병욱은 고기를 불판에 올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미정이는 이제 완전히 정리된 거지? 난 걔가 겨울철에 코트만 입는 것만 봐도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어떻게 사람이 코트만 입어. 코트만 옷이야? 재킷도 입을 수 있고, 점퍼도 입을 수 있고, 그냥 거적때기도 걸칠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하고 말하며 병욱은 소주를 땄다.
병욱이 말처럼 미정은 겨우내 코트만 입고 다녔다.
“점퍼 입으면 둔해 보여서 싫다고 하잖아.”
내가 미정의 말을 옮겨서 말했다.
“둔해 보이긴, 요즘에 슬림하게 나오는 옷들이 얼마나 많은데. 걔는 그래서 안 돼.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으면, 애한테 쫄쫄이만 입힐 거야, 걔는. 하여튼 난 ‘꼭 이래야만 해’ 하는 인간들이 제일 싫어.”
“다음에 미정이 만나면 내가 꼭 전해줄게.”
나는 웃으며 농담으로 말했다.
“그래, 꼭 전해줘라, 이 새끼야. 크크.”
내 농담을 눈치챘는지, 병욱 역시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곧 시작하는 프로야구에서 어느 팀이 잘할 것인지, 요즘 아이돌 중에는 누가 괜찮은지, 어느 주식이 많이 올랐는지, 하는 시답지 않은 얘기들. 얘기는 돌고 돌아 여자 얘기로 돌아왔고, 그 사이 취기가 올라왔다.
“내가 경희한테 부탁해서 소개팅 잡아줄게. 경희가 이제 곧 직장 때려치울 거거든. 새 직장 잡고, 거기서 갠찮은 여자를 떡하니 찾아서, 너 소개해주라고 할게.”
병욱은 조금 취했다. ‘괜찮은’을 ‘갠찮은’으로 발음한 것이 증명했다.
“내 걱정 말고, 너나 경희 씨랑 잘해봐. 너 같은 애를 다시 만나주는 것만 해도 좋은 사람이란 증거야.”
내가 조금은 약을 올리며 말했다.
“이 새끼가, 이 형이 그걸 얼마나 잘하는데, 그게 증거다 이 새끼야. 어제도 그냥 확, 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 이러면 형이 재워줄 수가 없어요. 크크.”
병욱은 취기에 붉어진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알았어. 알았어. 아저씨, 그거 참 잘해요. 이제 집에 가자.”
나는 병욱을 달래고는, 계산서를 집었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