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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좋아 Oct 14. 2024

하얀 그림자

짧은 소설

시골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이십여 년 전, 운동장에 개 한 마리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방학이 며칠 남지 않은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더위에 지친 중년 여선생님의 힘겨운 목소리가 시끄러운 매미소리에 묻히곤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개가 자전거 거치대 옆에 있는 큰 나무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물끄러미 그 개를 쳐다봤다.

개는 한쪽 다리를 들고는 나무에 오줌을 갈겼다.

왠지 학교 근처 동네에서 주인의 냄새를 따라 온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남자 중학생들한테 잡혀서 괴롭힘을 당하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 하고 속으로 외쳤다.

운동장에서는 체육 시간을 맞은 2학년 학생들이 축구를 시작하려고 했다. 대부분 체육 시간이 그렇듯이, 선생님은 축구공, 농구공, 배구공 몇 개를 던져주고는 교무실로 들어간 모양이다.

몇 명의 학생들이 개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개를 잡아보려고 무리를 지어 주변을 에워쌌다. 하지만 재빨리 도망치는 개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몇 번 실패한 그들은 잡기를 포기하고는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피하던 개가 옆구리에 큼지막한 돌멩이 한 개를 맞았다.

‘깨갱’ 소리가 운동장을 건너 교실 안의 내 귀까지 들려왔다.

마침 앞자리에서 자고 있던 명구가 잠에서 깼다.

명구는 우리 도시를 대표하는 육상 선수다. 중장거리에서 도내 상위권에 들어 일찌감치 체육고등학교에 스카웃되어 진학이 결정된 아이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선생님들은 명구가 수업시간에 자건말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전엔 주로 자고 점심을 먹은 후부터 쌩쌩해지곤 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운동장을 뛰며 훈련하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명구가 창밖을 힐끔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명구를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학교 안에 그보다 빠른 사람은 없었으니까.

명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개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2학년 학생들에게 달려갔다.

명구는 곧바로 그들을 제지한 뒤, 일렬로 세웠다.

당시에는 학년 간 위계질서가 분명했기 때문에, 3학년 선배가 하는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명구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교내 체육대회가 열리면 오래달리기에서 압도적 격차로 1등을 도맡는 선수였으니까.

명구는 서있는 후배들 뺨을 한 대씩 후려쳤다.

그는 아파서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2학년 학생들을 다시 일렬로 세웠다.

이번에는 발로 배를 걷어찼다.

몇 명은 배를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교실에서는 수업이 계속 진행 중이었고, 우리 반에서는 오직 나만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다음날 어느 2학년생의 학부모가 학교에 항의를 했고, 명구는 일주일 동안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는 정학 상태로 여름 방학을 맞아야 했다.


2학기가 되자, 고3인 형이 아침 보충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일찍 가야 한다고 했다.

형은 엄마에게 6시 반에 아침을 차려달라고 했다.

엄마는 아침을 두 번 차릴 수 없으니, 나보고도 일찍 일어나서 형이랑 같이 아침을 먹으라고 했다.

나는 싫은 내색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참에 학교에 일찍 가서 조용히 공부나 하란다.

별 수 없이 나도 형이랑 같이 아침 7시면 집을 나섰다. 천천히 걸어가도 7시 20분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내 예상대로 우리 반에 나보다 일찍 오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1교시가 시작하기 전까지 책상에서 엎드려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침 햇볕이 눈이 부셔 한 손으로 가렸다.

체육복 차림의 명구가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그때 봤던 하얀 개가 같이 뛰고 있었다.

명구 옆에 바짝 붙어 뛰는 개는 마치 그의 그림자 같았다.

2학기 개학이었던 그날, 명구는 정학이 아직 풀리지 않아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뒤 아침, 명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체육복 차림으로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에 내가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명구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가방을 의자에 던져 놓았다.

나를 보며 ‘일찍 왔네.’ 하고 한 마디 던지더니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갔다.

1교시 시작하기 전에 가슴 단추를 몇 개 풀어 헤친 헐렁한 교복 차림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팔을 베개 삼아 엎드려 잤다.

점심시간이 되어 깨어난 명구와 말 할 기회가 있었다.

“예전부터 그렇게 아침 일찍 와서 운동했던 거야?”

“아니.”

“아, 그럼 이번 학기부터 더 열심히 하기로?”

“아니, 학교 와서 운동하는 게 아니라, 집에서부터 뛰어 와.”

“집에서부터 뛰어 온다고? 너 어디 사는데?”

“흑석리.”

“흑석리면 어디냐?”

“해수욕장 근처.”

서해안에 접한 내 고향에는 큰 해수욕장이 있다. 우리 학교로부터 어림잡아 10 km 정도 떨어져 있다. 지난달에 해수욕장 개장 기념으로 시내에서 해수욕장까지 시민 달리기 대회가 열렸다. 마라톤 동호회, 중고등학교 육상부 코치들과 선수들이 모두 참여한 대회였다. 중학생인 명구가 고등학교 육상부와 코치들을 제치고 1등은 했다. 명구는 그 길을 매일 달려서 등교했던 것이다.

“너 정말 달리기에 미쳤구나.”

“내가 나중에 마라톤 한국 기록 깰 테니까 두고 봐라.”

라고 말하며 명구는 씩 웃었다.

“그 하얀 개는 뭐냐?”

“집에서 키우는 진돗개. 따라오지 말래도 자꾸 따라오네. 그래도 혼자 뛰는 것 보다는 좋아서.”

형 덕분에 아침 일찍 등교하게 된 나는 3학년 2학기 내내 명구가 운동장을 뛰는 모습을 홀로 지켜봤다.

그의 옆에는 하얀 그림자가 붙어 다녔다. 이름은 그냥 ‘백구’란다.


30대가 된 명구는 마라토너 대신 횟집 사장이 되었다. 가업을 물려받은 것이다.

배도 제법 나와서 마라톤은커녕 100 m만 뛰어도 숨을 몰아쉴 것 같았다.

나는 가끔 고향에 갈 때, 회를 뜨러 그의 가게에 가곤 한다. 아내 역시 바닷가 근처에서 자라서인지 회를 좋아했다. 그래서 시댁에 갈 때마다 회를 먹자고 조른다.

명구는 솜씨 좋은 칼질로 회를 떠서 포장해준다. 덤으로 소라 멍게 등을 잔뜩 준다.

그의 날렵한 얼굴과 몸매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살집이 붙은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영 어색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그가 중학교 시절에 중장거리 육상 도내 일인자였다고 말하자 믿지 못하는 눈치다.

“정말이라니까. 그때 사고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한국 마라톤 기록 보유자가 됐을 걸? 황영조와 이봉주의 계보를 이을 위대한 마라토너. 우린 다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무슨 사곤데?”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 졸업식만 기다리고 있을 무렵 명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 얘기로는 명구가 겨울 방학 때 훈련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나는 선생님께 어느 병원인지 물어보고는 방과 후 병문안을 갔다.

명구는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워 있었다.

나의 방문이 뜻밖이라는 듯이 나를 보자마자 베개에 등을 대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냐?” 내가 놀라며 물었다.

“교통사고.”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새벽에 도로 갓길에서 연습을 하던 중, 음주운전 차량이 그의 오른 발을 밟고 지나갔다고 한다. 발목 인대가 끊어졌고, 발등 뼈가 으스러졌다.

“이만한 게 다행이야. 백구가 살렸어. 내 목숨.”

그 차는 헤드라이트도 안 켜고 새벽 도로 위를 비틀거리며 달리고 있었는데, 같이 뛰던 백구가 다가오는 차로 먼저 몸을 날리는 바람에 명구가 반사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백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명구는 자신의 망가진 몸보다 백구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다리를 약간 전다.


나는 요즘도 텔레비전에서 마라톤 중계를 볼 때마다 명구 생각이 난다.

비록 중학교라는 작은 울타리 안이었지만, 그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본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였다.

분야를 막론하고 어떤 재능으로 인해 미래의 직업을 중학생 때 특정할 수 있다니, 별 생각 없이 살던 그 시절 나는 그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벌써 20년이 지났건만, 그의 횟집에 갈 때마다 그의 불어난 몸집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느 화창한 가을 날, 아내와 함께 고향에 들렀다가 또 명구의 횟집에 갔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개와 함께 뛰놀고 있는 아들을 손짓하며 불렀다.

“이리 와서 아빠 친구한테 인사해.”

그의 아들이 가까이 왔을 때 쪼르르 뒤를 따라온 하얀 개가 보였다. 바로 백구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웃으며 명구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 닮아 잘 뛰게 생겼네.’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는데 간신히 도로 집어넣었다.

“야, 저 개는 백구랑 진짜 닮았는데?”

“백구 손자야.”

“정말?”

나는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뭘 그리 놀라느냐는 표정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증손자 쯤 되려나.”


명구는 체고 진학이 좌절된 후 실업계 고교인 기계 공고에 진학했다.

밖에서 달리는 걸 좋아하던 명구가 시끄럽게 돌아가는 기계들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옆 집 할머니가 흰 색 강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자기네 암캐가 새끼를 낳았는데 아무래도 백구가 임신시킨 것 같다며 말이다.

명구는 반가운 마음에 그 개를 백구인 양 길렀다고 한다.

그 개가 자라서 새끼를 낳고, 또 그 새끼가 자라서 새끼를 낳았다.

명구는 그 흰 개들을 20년 동안 길러왔던 셈이다. 그리고 이제 명구의 대를 이은 아들이 개와 함께 놀고 있다.

명구가 회를 뜨는 동안 아내와 나는 횟집 앞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멀리서 햇빛이 파도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진다.

흰 개가 백사장을 이리저리 뛰는 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마치 그의 그림자처럼.

평화로운 사진 속 한 장면 같았다.

문득 명구는 이 장면을 매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가게 안에서 회를 뜨고 있는 명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도 나를 보고 웃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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