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를 읽고
자투리 시간에 읽을 만한 마땅한 것을 찾다가 고른 책이다.
1996년에 발행된 13 쇄판. 책이 얇고 저자가 <향수>로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여서 맘이 동했다.
영화 <향수>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래저래 전해 들은 정보로 볼 때 <향수>가 꽤나 독특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만나는 저자 소개부터 흥미로웠다.
'이 괴이한 작가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발설한 사람이면 친구, 부모를 막론하고 절연을 선언해 버리며 은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평생을 사랑과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별난 인물을 그린 <좀머 씨 이야기>를 발표하여 또 한 번 전 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치며 자꾸만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려고만 하는 좀머 씨의 모습은 가난한 은둔자로 살아가는 쥐스킨트 자신의 기이한 삶의 행로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로부터 이렇게나 철저하게 은둔하는 작가라니 그는 글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비둘기>는 이렇게 보면 작가를 닮은 듯한 주인공 조나단 노엘의 평온한 일상이 우연히 마주친 비둘기로 인해 어긋나면서 시작된다. 조나단 노엘은 30년간 은행 경비원으로 살면서 은행과 자신의 작은 집을 오가는 하루하루의 삶을 완전한 행복으로 여긴다. 젊은 시절 결혼도 했지만 어처구니없는 불상사를 겪었고 조나단이 인생에서 원한 건 오로지 안전한 행복. 그는 직장을 다니며 돈도 모았고 그 돈으로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에서 나오는 순간, 문 앞에 비둘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비둘기라니! 자신의 인생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 생명체는 조나단의 평온을 무참히 깨버린다.
사실 비둘기가 특별히 조나단에게 해를 끼친 건 없다. 문 앞 복도에 배설물을 흩뿌려놓은 정도?
하지만 조나단은 갑자기 나타난 이 비둘기는 물론 비둘기가 앞으로 가져올 무질서와 혼돈에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출근 준비도 겨우 마치고 저녁에도 이 비둘기를 마주치는 게 끔찍해 다른 곳에서 자겠다는
피난 계획까지 세워 대비한다.
사실 소설의 줄거리는 조나단이 보낸 1박 2일의 해프닝이 거의 다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비둘기>는 어떤 사건들이 발생하는 게 아니라-물론 아예 없지는 않지만-주로 조나단의 심적인 변화와 병적인 공포를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다.
근데 그 묘사가 기가 막힌다. 내가 생활 속에서 느껴봄직한 찰나의 순간들, 감정들. 저 밑바닥에 꽁꽁 싸매둔 쌀알 같은 감정들이 다 튀어나온다고 할까. 그래서 어찌 보면 아주 우스운 상황이 조나단에게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조나단도 안다. 자기가 공포를 느끼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웃음을 살 정도로 하찮다는 것을.
소설의 한 대목. '아니, 넌 너무 겁이 많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도와달라고 소리칠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사다리를 갖고 와서 비둘기로부터 너를 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넌 소방관을 찾을 거야. 겨우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말이야! 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될 테고, 근방에 사는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겠지. , 저기 노엘 씨 좀 봐!>라고 소리치면서 사람들은 네게 손가락질을 하게 될 거야. "저것 봐, 노엘 씨가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구조를 요청했대!"'
비둘기 한 마리로 깨져버린 조나단의 하루는 조나단에게는 가혹함의 연속이었다. 비둘기와 행여라도 조금이라도 접촉이 될까 봐 껴입은 겨울 외투로 인해 경비 업무를 서는 동안 더위에 시달리며 정신줄을 놓았고 30년 경비원 인생 처음으로 지점장 뢰델 씨의 승용차가 들어오는 걸 놓쳤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점심을 먹다가 바지가 뜯어졌다.
조나단은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다.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확실해 보이는 것들이 완전히 부서지는 데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가 궁금해졌다. <뢰델 씨의 승용차가 오는 것을 못 봤지.>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아직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오늘 일어났어. 승용차를 못 본 거야. 오늘은 자동차에 주의를 하지 못했으니, 내일은 근무 중 다른 것들도 다 망각하게 되겠지. 철제문을 여는 열쇠를 잃어버린다거나 해서 넌 다음 달에 문책성 해고를 당하고 말 거야....'
작은 일에도 크게 불안해하고 공포에 떠는 조나단의 속살을 들여다볼 대목이 나온다.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과 파리에서 늙어빠진 경비원이 된 것은 다 꿈이고, 어린아이가 되어서 집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것이 사실 같았다. 밖에는 전쟁이 나서 집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
극단적으로 보이는 완벽한 안전에의 갈구, 조그만 외부충격에도 크게 흔들리는 조나단은 이미 어릴 때 극한의 공포를 경험하고 스스로의 해답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외부와의 교류를 철저히 차단하는 조나단이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외치는 대목은 소설 전체를 뒤집는 역설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랬던 걸까? <향수>도 <좀머 씨 이야기>도 읽고 싶어졌다.
#파트리크쥐스킨트#비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