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남은 1년을 결정짓는 중대한 일이 진행된다.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지시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앞으로 나오라고. 한껏 긴장한 표정인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아이들은 주변을 힐끗힐끗 살피며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개미들이 우왕좌왕하다 어느새 질서를 찾듯, 아이들도 일렬로 꼿꼿하게 서있다. 키재기가 끝났다. 할 일을 마친 아이들은 키가 작은 순서대로 줄줄이 빈자리를 채워나간다.
나는 언제나 1번이었다. 가끔 운이 좋으면 3번까지 치고 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칠판 앞에 앉는 건 매한가지였다. 학교에서 키를 재는 날엔 어쩐지 하굣길도 더 길게 느껴졌다. 풀이 잔뜩 죽어 바닥만 보고 걸었기 때문이었을까.
가장 친한 친구, 혜림이는 키가 크고 힘이 셌다. 그 옆에 서면 내 머리가 그의 어깨쯤에 닿았다. 어른들은 나란히 걸어가는 우리를 보곤 ‘동생이니? 우와! 친구인데 머리 하나 차이나네?’라고 말했다.
별명이 ‘조폭마누라’였던 그 친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런 혜림이가 부러워 혜림이의 모든 행동을 따라 했다. 혜림이가 보폭을 크게 팔자로 걸으면 나도 가랑이가 찢어지게 휘적휘적 걸었다. 혜림이가 밥을 크게 떠서 먹으면 나도 양 볼이 터지도록 밥을 먹었다. 그래도 혜림이처럼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혜림이와 어울렸다가 돌아오면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외쳤다.
“엄마! 왜 나는 키가 작아?”
기분이 더 상했던 때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때문에 내 키가 작은 거잖아! 엄마가 책임져!”
그리고 엉엉 울었다.
엄마는 내가 12월 생이니 최소 반년치 키는 빼고 비교해야 한다고 했다. 엄마도 어릴 땐 키가 참 작았는데 늦게 커서 지금은 동창들 중에 가장 키가 크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너도 엄마처럼 나중엔 친구들 중에 제일 클 거라고 했다.
난 항상 그 말을 부적처럼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다. 나와 똑같이 키가 작았던 남자 짝꿍이 이유 없이 괴롭혔을 때, 피구하다가 세게 던지지 못해 날아오는 공을 피하기만 했을 때, 발표하다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렸을 때, 내가 좋아했던 친구가 나보다 다른 친구에게 더 마음 쏟는 걸 알아버렸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꼬깃꼬깃해진 부적을 펼쳐봤다. ‘나는 12월생이니 남들보다 출발선이 조금 뒤에 있었을 뿐이야. 지금은 키도 작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지만 마지막엔 가장 커다랗고 당당한 사람이 될 거야.’
6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어김없이 키 재는 시간이 돌아왔다. 6번이었다. 처음 본 숫자에 어리둥절했다. 다년간의 불신으로 몇 번이고 다시 재보며 좋아했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8번이었다. 이제는 나름 중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1번이었다. 나는 조금씩 커지는 숫자에 제법 익숙해져갔다. 불쑥 크진 않았지만 매년 1cm씩 꾸준히 크며 스무 살이 되었다. 162cm. 내 키였다. ‘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년 기어이 1cm씩 자랐기 때문이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내 키는 166cm로 멈추었다.
요즈음 나는 매주 텃밭에 찾아가 작물을 가꾸는 취미가 생겼다. 올해 4월 초, 모종 트레이에 백찰옥수수 씨앗을 한 알씩 심었다. 2주 후, 검지 손가락만 해져 텃밭에 옮겨 주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니 가녀린 잎들이 하염없이 나부꼈다. 그다음 찾아갔을 땐 초록 애벌레가 한 뼘 정도 되는 잎을 맛깔나게 갉아먹고 있었다. 보드라운 잎에 구멍이 듬성듬성 나 조금 볼품없어 보였다. 애벌레를 없애고 잡초를 뽑아주었다.
아빠는 햇볕을 가장 오래 쬐는 명당 자리를 내어주었건만 잎이 듬성하고 비실한 게 영 못 미덥다 했다. 아무래도 쭉정이가 될 것 같으니 뽑고 고추모종이나 더 심자고 했다. 나는 거세게 저항했다.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왜 단정을 짓느냐고, 지금은 좀 작을지라도 잡초도 뽑고 잘 관리하면 분명히 쑥쑥 클 거라고. 끝으로 자꾸 그렇게 말한다면, 알이 꽉 찬 옥수수가 열렸을 때 아빠는 옥수수를 못 먹게 될 거라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작은 딸의 기세에 눌렸는지 아님 작은 협박이 통했는지는 몰라도 옥수수는 살아남았다.
잎이 무성한 고추나무와 가지나무 사이에서 쭈뼛대던 옥수수들은 계속 자랐다. 개꼬리도 나오더니 알이 꽉 찬 옥수수가 열렸다. 옥수수를 따면서 나랑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다 자랄 때까진 얼마나 성장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새끼손톱만한 옥수수 씨앗이 내가 손을 쭉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자랐다. 그러니 백찰옥수수도 내 인생도 다 자라 봐야 알고 끝까지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