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소식이 있다. 많이 내리면 열무가 녹아내릴까 봐 뽑아온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벌써 꽃대를 올리기도 했다. 꽃이 많이 피어난 것들은 그대로 둔다. 옆 밭에 나왔던 아저씨가 그건 왜 뽑지 않느냐고. 꽃 보려고요. 저기도 꽃 많은데 뭘! 그 꽃 하고 이 꽃 하고 다른데요. 하자 그저 웃는다. 무꽃은 옅은 보랏빛과 흰빛을 문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것들은 같이 솎는다. 꽃핀 열무를 넣으면 더 맛있지 않을까 . 내가 주방장이어서 꽃 넣은 열무김치를 담그든지 잎만 넣은 김치든지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것.
두어 시간을 다듬는다. 저녁시간이 다 간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담글지라도 오래 걸리기에 준비를 해 놓아야 한다. 찹쌀을 넉넉히 불려놓는다. 열무김치가 쓰지 않게 하려면 죽을 많이 넣어야 한다고 엄마가 된 딸에게 엄마가 가르쳐주었다. 마늘도 까놓고. 열무김치를 어렸을 때는 좋아하지 않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뒤뜰에 김치 통을 물에다 시원하게 띄워놓았다. 여름 날씨에 얼마나 잘 시어지던지. 어린 입에 열무김치는 왜 그리 맛이 없었을까.
교회에서 수련회를 갔는데 열무비빔밥이 나왔다. 초록 김치만 넣고 비벼먹는다. 달걀을 한 개 반숙으로 부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웬 걸 맛있었다. 집사님들이 음식 솜씨가 좋아서였나. 돌도 씹어 먹는다는 젊음이 반찬이어서 그랬을까. 그때의 맛의 기억은 봄이 오고 여름이 되면 다시 되살아난다. 아이들에게 열무김치와 참기름 듬뿍 넣고, 달걀 프라이를 얹어서 주면 어릴 때도 잘 먹었다. 그 시간들이 열무 농사를 짓게 하는지도.
잠에서 깨어난다. 푸성귀를 씻는다. 시장에서 사다가 담는 것들은 깨끗해서 여러 번 헹구지 않아도 되는데, 텃밭에서 가져온 것들은 왜 이리 더 여러 번 씻어야 하는지. 화학비료도 치지 않고, 농약도 뿌리지 않았는데도 일이 훨씬 많다. 오직 했으면, 돈 주고 사 먹는 것이 제일 싸다고 할까. 소금에 절인다. 꽃들도 숨이 죽는다. 다시마물을 만들어 찹쌀 풀을 쑨다. 마늘과 양파 붉은 청양고추를 듬뿍 넣고 생새우와 새우젓을 간다. 단맛은 작년에 밭에 돋는 풀들을 뽑아다 담아놓은 액을 넣는 것으로. 멸치액젓과 고춧가루를 넣어 잘 저으면 소가 만들어진다. 버무린다. 나눠드릴 분 것과 구분하여 담으면 열무김치 끝.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여기에 물만 부어 간만 더하면 열무 물김치가 되고, 바로 먹으면 열무김치다.
브런치에서 한식에 대한 이야기를 모으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우리 음식에 대한 것들을 알게 했을까 생각해본다. 어렸을 때 무심코 해 먹였던 것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자리 잡고 그것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입맛이란 다시 찾아지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그 공간과 그 자리 그 사람들과 있었을 때의 맛이기 때문이다. 그때를 추억하고 아련하여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아버지는 산과 붙어있는 다랑이 논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물이 흘러내리던 물길을 찾는다. 삽으로 땅을 뒤집어엎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꾸리들이 겨울을 지내기 위해 숨어든 곳이다. 힘센 것들이 노리끼리한 배를 드러내어 몸과 몸을 배배 꼬며 꼬물꼬물거렸다. 그 꿈실꿈실한 것들을 가져오면 어머니가 추어탕을 끓였다. 내게는 추억의 음식이어서 아이들에게도 한해 한 번은 끓여 먹이기로 마음먹었다.
미꾸라지를 시장에서 사 온다. 소금을 뿌려 두면 미끌거리던 것들이 해감이 된다. 내 딴에는 맛있게 끓인다고 끓이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시원찮다. 한두 해를 연거푸 끓였는데 잘 먹지를 않는다. 솜씨가 없어서일까. 그 뒤로는 추어탕 집에서 한 그릇 사 먹으며 마음을 달랜다. 옛 맛이 나는 것은 아니다. 찬바람 부는 들판에서 아버지 옆에 붙어서 따라다니던 그 아이가 그리운 것인지도. 가을걷이 끝낸 그 황량한 벌판에서 풍겨오던, 산들에서 보여 오는 늦가을의 정취를 더듬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마음과, 어린 눈으로 돌아가 그 시절을 바라보고 싶은 것인가. 지나간 것들은 되돌이표가 되지 못하기에 더욱 애달아지는지도 모른다.
열무김치를 익히지 않고 냉장고에 바로 넣는다. 집에 있는 막내는 생김치만 좋아하기에. 방학도 하고 휴가철도 되었으니 아이들이 내려오겠지. 그때 갓 한 밥에다 싱싱한 열무김치 담뿍 넣고, 달을 한 개 띄워 참기름으로 향기를 피우고, 고추장으로 꼭짓점을 찍어 비비면, 추억의 그 맛이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