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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더

by 민진

지나치게 사랑해도 싫어한다. 무관심하면 어느 날 안녕하고 가버린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지점이 필요하다. 사랑을 원하는 정도가 다 다르다. 마음속에 화초 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을 너무 좋아해서 수국, 건조한 것에 익숙한 다육이들, 바람과 물과 햇빛을 동시에 즐기는 소년 같은 율마, 밖에 나가는 것이 겁나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관엽이 들. 여러 아이들(화초)을 상대하다 보니 벌벌 떨지 않고 냉정해진다. 병원의 간호사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필요한 사랑은 주되 쩔쩔매지 않는 단호함이 배었다.

화초를 사 오면 조금 큰 화분에 옮긴다. 당장 눈앞에 꽃을 보고 싶은 욕심을 참는다. 몸은 컸는데 작은 옷을 입고 있다고 해야 할까. 분을 바꾸어 주면 몸살을 하느라 머금은 꽃을 떨구어 내기도 한다. 새로이 뿌리를 내려 꽃대를 올리고 피워내기까지 인내의 줄다리기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작은 몸짓들 하나하나 보아주면 된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한 달 보기로 끝낸다. 한 번분의 거름과 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짧게 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지 오래도록 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요즘 반려식물이라고, 좋아하고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 그건 꼭,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도 내 사랑에 보답하라는 요구 같다.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하는 집착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거래하는 마음을 식물에게 까지 담아내야 한다면 너무 서글퍼진다. 꽃을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길을 동행하는 길동무로 만족하면 안 될까.

해마다 봄이 되면 새롭게 키워보고 싶은 화초들을 고른다. 작년에는 안테로 라벤더였다. 두 그루를 들였다. 쑥 향기 비슷하게 은은하다. 이파리도 예쁘게 생기지 않았다. 부드러운 옥색으로 삐죽이 모양, 가지에 웅숭그리고 있다. 잘 자라고 월동이 되었다. 삼월이 되자 분갈이를 해줬다. 꼭 기다렸다는 듯이 뱀 새끼들이 고개를 빼어 물고 먹이를 달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가지 끝에 보랏빛의 포엽이 얼굴을 폈다. 꽃은 그 아래에 아주 조그맣게 붙어있는 진보라색의 동그라미. 길을 가다가 프렌치 라벤더가 흰 꽃을 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모시적삼을 입은 여인이 살포시 앉아있는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바로 마음에 꽂혔다. 올해는 너를.


딸에게 프렌치 라벤더를 키워보려 한다고 했더니 꽃집에서도 많이 죽여 잘 갖다 놓지 않는 것이 라벤더라고. 사러 갔더니 없다. 어느 날 묘하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나와의 사랑을 시작해도 늦지 않음을, 꽃을 키워보면서 터득한 시간 법이며 인연법이다. 만날 사람은 만나도록 되어있듯이 화초도 그렇다. 마음으로 그리워하면 어느날 문득 마주친다.


꽃을 머금은 라벤더 두 개 중 한 개는 시집을 보냈다. 꽃은 나눔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다. 키우기 어렵다는 녀석이 꽃까지 피워 물때는 더하다. 주문한 황토가 도착하면 내일부터 부지런해져야 한다. 꽃꽂이해서 가을에 피어 날 화분을 만들어야기에. 꽃을 키우려면 두어 계절을 앞서서 살아야 한다.

꽃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부듯하다. 그 여린 몸에서 어여쁜 것들이 나오는 이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요술에 걸린 것처럼 꽃을 머금었다가 뱉어 내고, 머금었다가 뱉어 낸다. 말만 하면 입에서 꽃이 튀어나오고, 보석, 아름다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동화 속 아이처럼. 날마다 새롭다. 그 작은 속삭임들이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라벤더가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워낸 것처럼 초록의 작은 생명들은 계절을 즐길 준비가 끝난 것 같다. 저 푸름 속에는 얼마만큼의 고움과 꽃방울들이 아롱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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