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석에 앉으니 피곤이 몰려온다. 어젯밤 잠을 설친 데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점심도 잔뜩 먹었으니 자리에 앉자마자 노곤해질 수밖에. 졸음을 쫓기 위해 혼자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애타게 휴게소를 기다린다. 조금만 더 힘을 내. 힘을 내.
몇 년 전 함평에서 일주일간 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우리가 함께 간 유일한 서해였다. 갯벌이 많은 서해에서 놀고 싶다는 아이들의 말에 큰맘 먹고 일주일간 서해로 휴가를 왔더랬다. 주민분들이 좋은 동해를 두고 뭐하고 이 먼 서해까지 왔냐고 웃으셨지. 일주일 내내 바닷가에서 수영하며 갖가지 물고기를 잡고 새우도 구경하며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더랬지. 그때는 관광지로 개발이 덜 되어 성수기에도 사람도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대형 카페도 많이 들어선 모양이다. 아무튼 이번 여행은 가보지 못한 서해 정복이 목적인 만큼 행복한 추억이 깃든 함평은 지나가기로 한다.
고속도로를 내려 영광에 들어서니 곳곳에 눈이 쌓여있다. 얼마 전에 눈이 왔었나 보네.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눈이 이미 내렸다니. 우리가 한발 늦어 버렸네. 다행히 숙소 테라스에도 아직 눈이 남아 있다. 그 조금 남은 눈에도 행복한 아이들은 바로 테라스로 나가 꼬마 눈사람을 잔뜩 만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우셨는지 주인아저씨께서 웃으시며 2층으로 초코바를 던져주신다. 따뜻한 방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옛날 어른들은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해진다.
밖에 나가서 더 놀까 생각했는데, 추워도 너무 춥다. 내일부터 많이 추워진다더니 산속 공기는 이미 내일 일기예보에 도착해 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다 보니 이번 주 토요일 영광에 눈 소식이 있다. 순간 토요일까지 영광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 주엔 추도 예배가 있어 대구에 가야 하니 그럴 수는 없다. 서해에는 눈 많이 온다고 했는데 우리가 열심히 옮겨 다니다 보니 눈을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엄마가 장담한 눈놀이 한 판은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는 없는 모양이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함께 내일 일정을 의논했다. 여유로운 여행을 원하는 딸을 위해 최대한 일정을 줄이려고 하지만 이번 주는 목요일까지 대구에 가야 하니 갈 길이 멀다. 지도를 가운데 펼쳐 두고 내일은 어디로 이동할지 고민한다. 최대한 대구 방향으로 많이 움직여야 하는데 힘들게 온 서해에서 가고 싶었던 곳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는 않다. 역시 서해는 대구에서는 멀어. 그렇게 해서 내일은 고창에 들렀다가 숙소는 담양에 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남원에서 남편을 만나 대구로 갈 계획이다.
엄마가 숙소를 알아보는 사이 아이들은 다시 놀이를 시작한다. 둘이서 스피드 게임을 하고 보물 찾기를 하며 깔깔댄다. 가족 오락관이라도 찍는 줄. 번외 편으로 아들의 코믹 댄스도 곁들여진다. 좁은 숙소에서도 정말 잘 노는구나. 진정한 놀이의 달인들이다.
다음 날 아침, 염소와 개 짖는 소리에 눈을 뜬 아이들은 일어나자마자 어제 만든 눈사람의 생존을 확인하러 뛰어간다. 날씨가 얼마나 추웠던지 눈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네. 여행 중 대형 눈사람과의 조우를 기대하며 우리 귀요미 눈사람들과는 여기서 작별인사를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