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3박 4일 미국 비행 일정이 잡혀 있었다.
새벽에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 윤아가 끄는 가방 무게보다 무겁다.
휴일에는 차로 공항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지만 엄마가 먼 길 운전하는 것이 걱정된다고 마다한다.
손을 흔들며 문을 닫고 나가면 재빨리 베란다로 가서 윤아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전에 살던 집은 정문 앞이라서 주방 창문을 통해서 큰길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이사한 후에는 정문에서 멀어져 문 닫고 가면 끝이다.
며칠 후에 돌아올 텐데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
비행기는 이착륙 때 더 위험하다던데, 새 떼를 만나면 위험하다던데, 난기류를 만나면 기체가 많이 흔들린다던데, 그래서 승객 무릎에 앉아버린 일도 있다던데, 진상 승객 때문에 상처 입고 컴플레인받아 속상해한 일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별일 없어야 하는데......
그 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비행 승무원, 지상직도 있는데 왜 비행 승무원을 택했을까.
매번 습관처럼 하는 나의 걱정을 뒤로한 채 떠난 윤아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 이 진상 아빠가 돌아가셨대!
정말? 언제? 무슨 일로?
아직 몰라.
내가 전화를 못 받았는데 작은아빠가 회사로 연락해서 내게 전해줬어.
그럼 빨리 와야 하잖아.
그러려고 했는데 미국이라고 했더니 그냥 있다가 오래.
작은아빠가 여기서 다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말고 일정 다 마치고 오래. 그래도 되나?
윤아의 생물학적 아버지, 나의 전전 남편인 이 진상의 죽음 앞에 우리 둘은 담담했다.
감정을 느꼈다면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 정도라고 할까.
이 진상은 나를 쫓아다니며 7년을 괴롭혔다.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리석은 딸 가진 죄로 부모님이 받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괴롭힘을 당한 어느 날은 술에 취해 어디서 고꾸라져 죽으라고 저주도 품었다.
내 저주가 먹혔나 보다.
이 진상은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갔다가 미끄러져 과다출혈로 사망을 했다.
며칠째 소식이 없는 오빠를 걱정한 동생이 찾아가서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
그가 살던 곳은 마곡의 오피스텔, 윤아가 드나드는 공항이 가까워서였을까?
윤아는 가끔 문자로 연락을 하다가 할머니네 가서 그를 만나기도 했다.
정상인 같지 않은 말과 태도에 아빠라는 것이 창피할 정도라고 했다.
그는 내가 친정에서 출근을 하면 전화를 해서 부모님을 괴롭혔다.
하루에 30통은 해댔을 것이다.
실향민인 아버지와 결혼한 엄마에게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다.
첩이 돼서 아직도 살아 있냐는 악담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횡포 중 하나였다.
천년만년 살 것 같던 이 진상은 엄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내 저주, 그 모습 그대로 60살을 넘기지 못했다.
윤아는 비행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윤아 없는 장례식에 서울에 있던 동료들이 참석했던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쉬쉬하며 숨기고 있던 가정 사정이 백일하에 드러나 윤아는 직장에서 뒤늦은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
나는 사정이 그렇다 해도 당당하게 행동했는데 윤아는 어떻게 처신할지 걱정된다.
윤아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이다.
이 진상 남동생, 작은아빠가 윤아를 불렀다.
구청에 사망신고를 하러 가자는 것이다.
윤아를 차로 데려다주며 신신당부를 했다.
저 남자가 도장을 찍으라던가, 뭘 쓰라고 하면 절대 쓰면 안 돼.
알았어, 절대로!
집에 돌아오는데 사진과 함께 문자가 왔다.
엄마, 이게 뭐야. 작은아빠가 차용증에 자필로 포기한다고 쓰래서 썼는데 이상해.
그 작은아빠라는 작자는 이 진상 필적이 없는 차용증을 위조하고, 보관하고 있던 이 진상의 도장을 찍어 여동생을 증인으로 차용증을 작성해 놓은 것이다.
오피스텔 보증금 일억 원은 자기가 빌려 준 것이니 포기한다는 것을 자필로 쓰라고 했다.
형이 그렇게 갈 줄은 몰랐다며 눈물 질질 짜다가 그래도 형이 남긴 보험금과 예금이 있어 충분할 것이라며 윤아를 경황없이 만든 것이다.
나를 닮아 어리숙한 윤아는 내 다짐을 잊어버리고 그가 불러주는 대로 자필로 증거를 남겼다.
그때 당장 찢어버리라는 말을 못 한 것을 후회했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먹고 떨어져라 하고 싶지만 뻔히 보이는 속임수에 반환 소송을 했다.
결과는 패소였다.
망자의 자필이 없어 위조가 확실한데도 성인인 윤아가 인정한 자필이 있어 반환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동생은 내가 소개해준 음악교사와 결혼했지만 부모가 밀어주는 대로 몇 번 사업을 하다가 망한 터라 돈이 아쉬웠을 것이다.
아무리 궁해도 그렇지 조카가 상속할 재산을 가로채는 그 심성 알만하다.
그 얼굴을 십수 년만에 보기 싫어도 볼 것을, 왜 윤아만 보내서 이런 일을 겪게 만들었을까.
그 작은아빠라는 사람이 조카를 상대로 사문서를 위조하는 사기를 저질렀다.
윤아에게는 다 알아서 정리할 테니 일정 마치고 오라 해놓고 전세보증금을 빼돌릴 궁리를 한 것이다.
그 바람에 변호사 수임료에 시간을 낭비하면서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모든 문제가 다 처리된 다음에 윤아 앞으로 적지 않은 돈이 상속되었다.
내 욕심은 끝이 없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아파트 한 채라도 남겨 줄 것이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변호사 말로는 불여우 같은 여동생이 미성숙한 오빠 소유의 아파트를 매매하라고 설득해서 전셋집을 전전하게 한 것이라 했다.
복부인이었던 그 모친이 자식들에게 아파트 한 채씩을 증여했는데 이 진상만 자기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은 그의 죽음이 저주한 대로 됐다는 것이다.
살아서 아빠 노릇 못했는데 망자가 되어 딸에게 상속으로나마 도움이 되었으니 명복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