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를 먹던 아이가 조금 물러진 한 알을 골라낸다.
“이거 안 먹을래.”
너무도 자연스럽게 식탁 위에 따로 놓인 블루베리를 주워 먹고는 씁쓸하다. 집에서 멀쩡한 과일을 접시에 차려놓고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에 없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가 당신은 안 먹고 안 쓰면서 나한테 제일 좋은 거 해주려는 게 싫었다. K장녀 콤플렉스인지 뭔지 엄마가 안쓰럽고 부담스러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먹는 엄마라서 마음속에 엄마를 깃털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싶었다. 나에게 엄마는 항상 나 때문에 뭔가를 포기하는 무거운 사람이었기에. 자식을 낳아도 절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난 항상 내가 우선이니까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자식을 낳았고 이후에 제일 좋아하는 참외와 단감을 사 본 적이 거의 없다. 과일을 좋아하는 아이가 유일하게 좋아하지 않는 과일이 참외, 단감이라서. 내가 집에서 먹는 과일은 아이가 떨어뜨린 것, 짓물러서 아이가 안 먹는다고 뺀 것, 씻다가 싱싱하지 않아 치워버려야 하는 것들이다.
예전에는 엄마가 이해가 안 됐지만 이제는 안다.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정말로 배가 부르다는 걸. 물론 같이 먹고 또 사면되지만, 그래도 왠지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는 절로 손이 안 간다. 그냥 그렇게 된다.
어제는 좋아하는 평론가의 강연이 있었다. 금요일에 공부 모임이 있어 늦게 집에 왔고, 강연을 들으러 아이랑 같이 가면 어차피 제대로 듣기 어렵고, 나만 가자고 하자니 남편 눈치가 보였다. 강연을 포기했다. 아이 키우는 사람한테 강연 같은 건 사치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고. 다 아는데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래도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침에는 성시경의 ‘너의 모든 순간’을 들으며 아이를 낳은 일이 내가 제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윽고 내가 한눈에 너를 알아봤을 때 모든 건 분명 달라지고 있었어. 내 세상은 널 알기 전과 후로 나뉘어. 네가 숨 쉬면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네가 웃으면 눈부신 햇살이 비쳐.”
저녁이 되면 내가 가지고 놀던 거 어디 갔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한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며 화를 내고 후회한다.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 자주 이런다.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아이한테 큰 소리를 내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오늘 같이 밥을 먹다가 아이가 물었다.
“엄마, 고립무원이 뭐야?”
“응. 그건 아무도 없이 세상에 혼자라는 뜻이야.”
“솔이는 고립무원이라고 느낀 적 있어?”
“없어. 엄마가 내 편이잖아. 엄마는?”
“음..”
“없지? 내가 엄마 편이잖아.”
“응. 그래. 맞아. 솔이가 있어서..” 하는데 불쑥 눈물이 난다.
“.. 나는 아빠 편이고, 복이 편이고…” 한번 흘깃하고는 엄마가 울든 말든 계속 재잘댄다.
‘고립무원’이란 단어가 나도 몰랐던 어떤 부분을 건드렸나 보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다.
문득 스스로 방치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자존감에 대한 영상을 발견했다. 코미디언 홍진경이 우습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것을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었다.
“남들은 모르더라도 나 혼자 있을 때 내가 베고 자는 베개의 면, 내가 매일 먹는 컵의 디자인, 내가 매일 지내는 집의 정리정돈. 이런 것에서 자존감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채워 나가다 보면 자존감이 쌓여서 내가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을 잘하게 돼요.”
나를 챙기기 위해서 뭘 하고 있나 생각해 봤다. 최근에는 유산균을 챙겨 먹고 있고, 어제 아이 과일을 사면서 단감 한 봉지를 올해 처음 샀다. 일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다. 홍진경의 말처럼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꾸는 일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물 마실 때마다 잡히는 대로 아이 컵을 고르고, 베개 커버도 언제 바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나를 챙기고 돌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딸기만 많이 주고 사소한 걸로 화내는 엄마를 아이가 원하는 건 아닐 테니까. 고립무원의 사전적 뜻은 '남과 사귀지 않거나 남의 도움을 받을 데가 전혀 없음',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음'이다.
그동안 누군가 와서 나를 구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남의 도움이나 구원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돕고 나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를 위해 과일을 골라주듯, 이제는 나를 위해서도 맛있는 과일 한 접시를 내어주어야겠다.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엄마가 말해주기 전에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곶감인지 몰랐다는 걸. 엄마도 분명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을 텐데. 나는 다르게 살고 싶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에게도 더 너그러워질 수 있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를 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늘 자신을 미뤄두는 엄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도 소중히 여기는 엄마의 모습이다. 내일은 왕딸기를 사서 두 접시를 차려야지. 하나는 아이 것, 하나는 나의 것. 아이와 마주 앉아 딸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거다. 더 이상 고립무원이 아니다. 내가 가장 든든한 내 편이 되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