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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몬키 Feb 04. 2024

남+편 1부

속이 터집니다, 왜냐? 


우리 남편은 말을 정말 천~천~히~ 느~릿~느~릿~ 한다. 신나게 달리던 차가 어린이 보호구역에 접어들었을 때의 체감 속도와 비슷하다. 태국 꼬창섬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호핑 투어 중 익사 위험에 빠진 남편이 "구~명~조~끼~빠~알~리~"라고 외쳤는데 전혀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아 눈앞에서 저 세상에 보낼 뻔했다. 이 에피소드를 들은 사람들이 반만 믿는 눈치면 나는 남편의 가슴팍을 가리킨다. 거기엔 죽지 말라고, 항상 물 조심하라고 부적처럼 새긴 구명조끼 타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썰을 푸는 것도 내 몫이다. 남편의 속도로는 절대 오늘 안에 이야기를 끝낼 수가 없다.


속도도 속도인데, 내가 볼 땐 남편의 이야기 전개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이는 살짝 고지식한 데가 있어서 책을 펼치면 반드시 목차와 서문을 순서대로 통과해야 한다. 박물관에서 내가 서너 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동안 아직도 구석기 관에서 토기 조각에 붙은 종이 쪼가리까지 다 읽고 있다. 이런 사람이기에, 남편의 이야기보따리는 듣는 사람을 배려한 온갖 부가설명들로 가득하다.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칠까 봐 목차, 서문, 종이 쪼가리에 공을 들인다. 언젠가 남편에게 영화 <가을의 전설> 줄거리를 들었는데 장장 2시간이 걸렸다. 그냥 영화로 볼 걸 그랬다. 


그간 남편의 대화 속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봤다. 끼어들고, 말꼬리를 자르고, 중간중간 요약하고, 화도 내봤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남편의 단단한 자존감과 무던한 성격은 정말 높게 사지만, 온갖 핍박 속에서도 꿋꿋이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지라고 절로 겸손해진다.


이제 나는 도가 터서 이야기가 길다 싶으면 살짝 영혼을 가출시켰다가, 본론에 왔다 싶을 때 잽싸게 집중하는 방식으로 남편과 소통한다. 대충 장단을 맞추는 와중에 슬쩍 폰을 보고, "간장 뚜껑 좀 따줘"라고 불쑥 내 할 말도 하고, 얼굴에 마스크팩을 올리고, 메시지에 답장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피드백만큼은 간간이 들린 단어와 표현들을 조합해 성의 있게 돌려준다. 남편은 남편대로 마음 놓고 떠들 수 있고, 나는 나대로 할 일을 하니 일석이조. 부부생활은 이런 식으로 조율되고 맞춰지는가 보다.


나름 잘 빠져(?)나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어제 퇴근길에는 살짝 경계가 풀렸나 보다. 에어팟이 잘 들리지 않아서 "응? 누구?", "그 사람이 ~라고 했다고?"라고 되물은 것에 신이 났는지, 남편의 말이 더 느려지고 더 장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이제 그만 끊으려고 하자 남편이 아쉽게 매달렸다. "혹시 더 통화 돼?" 싸움을 거는 새로운 기술인 걸까.


한 배를 탄 부부에게 대화란 '으쌰으쌰!' 힘을 모으는 구령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 노는 문제 없는지, 힘은 얼마나 남아있는지, 저기 이쁜 풍경도 좀 보라고 알려주면서... 그 구령은 고단한 여정도 신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나는 그 힘을 대화가 멈춘 순간 깨달았다. 우리 집에 적막이 흘렀던 날들. 약간의 근심이 집안 전체로 번져나가 저녁 시간을 고요하게 만들었고, 두 발 뻗고 자야 할 시간에도 각자 몫의 근심을 베고 폰만 보다가 잠들었다. 특히 오래 키우던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집안은 어찌나 조용하던지... 친구들은 "니 성격에 남편의 속도를 어떻게 참아?"라고 물어보는데, 사실 나는 남편의 수다를 은근히 좋아한다. 백색 소음처럼 내 인생에 은은하게 깔려있는 백룡이의 수다는 우리가 탄 배가 잘 가고 있다고 알려준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만 알아도 될 듯 하다.




2017년에 올린 인스타 게시글이다.

직접 들어보고 판단하시길.


https://www.instagram.com/p/BcYeXR8gwJK/?utm_source=ig_embed&ig_rid=97d2ca01-2fc1-4b3e-b248-bf20330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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