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한다, 겁나 빠르게
비교적 최근까지도 텔레뱅킹을 썼다. 지갑에 늘 보안카드를 넣고 다니며 ARS 안내에 따라 차례차례 버튼을 눌러 정성스레 이체를 수행했다. 실시간 미션처럼 그때그때 번호가 바뀌는 보안 인증은 약간의 집중을 요한다. "보안카드 14번, 14번의 앞 두 자리를 눌러주십시오. 보안카드 32번, 32번의 뒤 두 자리를 눌러주십시오." 유효 시간 안에 재빠르게 번호를 찾아내 꼭꼭 누르면 전화 퀴즈쇼 1단계를 통과한 것처럼 작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세상이 변했다는 걸 느낀 것도 최근 일이다.
"어제 마신 거 정산할게요. 계좌번호 좀 알려줘요."라고 했더니 동료들은 "그냥 카뱅으로 보내주세요."라며 생경한 소리를 했다. 아니, 계좌번호를 알아야 보내지! 그러나 더 답답해 죽는 건 그쪽이었다. "현아님, 계좌번호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아직도 텔레뱅킹을 쓰신다고요? 엄마세요?"라며 선까지 넘었다. 그 순간 돋보기안경과 otp 카드를 꺼낸 뒤 줄 달린 수화기를 집어 들던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랐고 그래서 더 약이 올랐다.
내가 어릴 적 엄마는 시내에 나갈 때마다 롯데리아에서 불고기버거를 사 오는 '최첨단' 엄마였다. 그러나 키오스크가 쫙 깔리고선 햄버거 하나도 스스로 주문하기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 나라고 키오스크가 반가울까. 안 눌러졌나? 싶어서 한 번 더 누르는 찰나에 화면이 바뀌어서 꼭 뭔가가 꼬인다. 잘못을 고치려고 들면 상황은 더더욱 복잡해져서 해결책은 '처음으로' 버튼뿐. 한 번은 카페 카운터에서 완벽한 주문을 마쳤더니 "고객님, 주문은 아래 아이패드에서 해주시겠습니까?"라며 내 말은 안 들린 걸로 쳤다.
그런 걸 '편리'라고 말하는 세상의 논리가 영 마뜩잖다. 마치 글자만 큰 효도폰을 쥐여주고선 "어머니, 앞으로 궁금하신 건, 저 말고요, 폰을 누르면 다~ 나와요. 한 번 해보세요. 아니, 그건 스팸이고요! 제발 아무거나 좀 누르지 마시라고요!!!"라며 기를 죽이는 느낌이랄까. 세상에 삶의 지혜를 마구 전파해야 할 어르신들이 전파를 내뿜는 기계 앞에서 까막눈이 되는 시대가 나는 왠지 서글프다.
이대로라면 나의 50년 후도 불 보듯 뻔하다. 나라에서 카뱅으로 꽂아준 연금 페이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사이버 양로원에서 틀니 아이템을 현질하며 적적함을 달랜 다음 "빅스비, 보행기 밀어죠"라며 하루의 유일한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때마침 대리 효도 서비스에서 날아온 후손들의 릴스에 그리움이 샘솟아 전화를 걸면 '안부는 DM으로 부탁드릴게요'라는 손녀의 메시지가 날아오겠지? 오후엔 지인의 메타버스 장례식장 키오스크에서 조의금을 내고, 지긋재그에서 오늘의 특가 수의를 당일 배송으로 받아 훗날을 준비할 테다. 아 맞다. 저승행 대기 줄에 원격줄서기를 걸어두는 걸 깜빡했구나. 여보, 나 좀 늦어요.
하나라도 덜 누르게 하고, 덜 생각하게 하고, 덜 움직이게 하려는 세상의 기꺼운 도움을 나는 가볍게 거절한다. 쓰레기통 비우는 일까지도 대신해주겠다고 덤벼드는 세상에 그나마 남은 '몸과 머리를 쓸 기회'를 뺏기는 것 같아서다. 친구들의 전화번호 몇 개쯤은 줄줄 외던 총명한 아이가 폰이 꺼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기까지 그 길은 너무 편안했다. 깃털처럼 가벼워서 돈 쓴 느낌조차 들지 않는 간편 결제처럼 매사가 너무나 쉽고 간편해서 화가 날 지경이다. 오늘 힘쓴 일이라곤 배달 음식의 비닐을 벗길 때뿐이었음을 깨닫는 허무한 주말처럼, 내 인생이 그런 식으로 편안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세상이 각종 불편함을 친절하게 해소해 하염없이 시간을 남겨주어도, 결국 내가 하는 일이라곤 쇼츠를 넘겨보고 커뮤니티 정도란 걸.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겠지만, 세상 역시 나의 역행을 막을 순 없다. 텔레뱅킹은 다소 쉽게 놓아주었지만 아직도 내겐 궁리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 돈 대신 머리와 몸과 마음을 더 많이 쓴 나머지 종국에는 허리가 굽고 무릎이 휘더라도 내 속옷은 여즉 내가 빨아서 입어왔다는 마지막 자긍심 정도는 지키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