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유일한 나의 절친은 영재였다. 과학고에 떨어지고 난 뒤 일반고를 오게 된 친구는 날카롭고 예리한 말투와 행동으로 친구들의 미움을 샀다. 원래 홀로 있었던 나와 높은 콧대로 혼자임을 선택한 친구와는 외로움이라는 공통분모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힘든 고 3을 견디고 같은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우리는 더 친해졌고 서로를 응원해주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남다른 배포와 큰 꿈을 가졌던 친구는 대학교 3학년 되던 해에 교환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미국으로 법학 공부를 하러 떠났다. 친구는 로터리 클럽 장학생으로 버티면서 수년을 고생하다가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 절친이 성공하여 재회했을 때의 감동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너무나 기뻐서였을까 내 친구 모습이 빛나 보였다. 수업을 할 때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내 친구의 성공담을 들려주며 꿈을 가지고 인생을 멋지게 살 수 있는 사례로 들기도 했다.
자주는 만날 수 없어도 연락을 하며 지낸 친구는 미국으로 교환교수로 갔었다. 6살, 4살 아이를 데리고 가 3년 후에 홀로 돌아왔다. 남편도 교수인지라 바통 터치해 아이들은 미국에서 또 3년을 보낸다고 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나 친구의 아이들과 만나게 된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어려움과 교육에 대해 공감대를 이루려 했지만 그저 허탈한 웃음만 짓고 오는 날이 많아졌다.
강남에 거주하는 친구는, 그 지역에 넘쳐나는 원어민 수준의 과외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익숙해질 만하면 유학을 떠나거나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했고, 미국에서는 저렴했던 바이올린 개인 레슨이 한국에서는 너무 비싸서 전공을 시키려는데 고민이 많다고 하소연을 했었다. 한국말과 영어를 오가며 유창하게 쓰고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엄마 친구에게 공연해 주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했고 부러움이 밀려왔다. 옆에서 앞구르기, 뒷구르기 하며 넓은 집이 좋다며 '잡기 놀이'를 하며 투닥거리는 우리 아이들과 비교가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친구는 자연스럽게 외국에서의 생활과 교수로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요즘 대학생들의 철없음이 심하다며 중학생은 어떠한지 궁금해했었다. ‘그냥 다 그렇지 뭐!’란 말로 얼버무리며 웃고 넘어갔다. 그러면서 얼른 학창 시절의 추억들을 꺼내며 다시 여고생으로 돌아갔다. 사실 친구와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유일한 대화 주제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고 오면 괜히 화가 났다. 내 아이들이 걱정되고 경쟁하기엔 세상에 가진 자들이 많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으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내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을, 더 노력할 것을 자책하며 친구에게 주어졌던 기회들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질 수 없는 혜택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배가 아팠다.
큰 아이가 고3 수능을 치른다. 아이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원서를 쓰는 기간 내내 눈물을 달고 다녔다. 자신은 평범한 줄 알았는데 너무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럽다는 말을 달고 다녔다. 서울의 유명대학에 당당하게 원서를 쓰는 친구들이 연예인보다도 더 부럽다는 말을 하며 자신의 노력이 하찮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고 어리광 같은 푸념을 하기 일쑤였다. 그런 아이를 달래며 영재였던 친구와 나의 관계를 이야기해 준다. 친구는 친구대로, 나는 나대로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각자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비교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은 친구를 만나고 나서 그녀에게 질투를 느낄 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공평, 공정하게 똑같이 나눌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란 어렵다. 능력과 노력의 차이를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어 하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한 더욱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노력이 있는 그대로 지지받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삶과 꿈을 위해 애쓰는 아이들의 도전과 노력은 그 자체로 박수와 격려를 받아야 할 것이다.
세상이 우리의 삶을 흔들고, 속이려 들어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고 진정 내 뜻대로 삶을 가꿀 수 있는 힘. 그것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