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향기 Nov 08. 2021

[바빌로니아의 복권] 그리고 [오징어 게임]

나는 바빌로니아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총독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노예였습니다. 나는 또한 전지전능과 수치, 그리고 감옥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보르헤스 작품, [바빌로니아의 복권] 중  


  소설은 위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드라마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듯 담담하게, 주인공은 우연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상황을 서술한다.  우연이 지배하는 사회. 우연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그 우연을 관리하는 '회사'.  사람들은 자신이 뽑은 복권에 따라 아무 근거도 없이 신분이 높아지기도, 일확천금을 받기도, 체포되기도, 투옥되거나 사형까지 당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우연을 순수히 받아들이며 심지어 열광한다. 그들의 저항은 우연의 기회가 자신들에게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처음에 복권은 단순한 제비뽑기였다. 즉석에서 보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희망만을 부풀리려 했기에 사람들은 복권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새로운 방식의 복권이 등장했다. 복권을 추첨한 사람들 가운데 불행을 가미한 것이다. 처음에는 30개의 숫자 중에 불운은 한 개의 숫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기가 더해지면서 불운의 숫자도 늘려갔으며 그만큼 사람들은 더 열광했다.  행운과 불운 사이에 사람들은 짜릿함을 느끼며 이러한 이중의 우연을 즐기며 결과를 받아들였다.      

 복권은 참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운의 가치가 매우 높아진다.  그러나 참여인원이 많아질수록 내가 주인공이 될 확률은 낮아지는 아이러니를 갖고 있다. 복권을 사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게임에 참여한 순간 내가 행운이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로또 명당 집에서 길게 줄을 서지 않았던가.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읽으면서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오징어 게임]을  떠올리게 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필연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이들이, 게임에서 우승만 한다면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우연에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은 게임을 통해 죽음에 다가가면서도 열렬히 욕망을 불태운다.       

  나의 행운은 타인이 불운이 되는 소설 속의 장면처럼 [오징어 게임]에서도 나의 생존은 타인의 죽음이며, 참가자들의 불행은 VIP들에게는 행복인 아이러니가 묘하게 겹쳐진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간다기보다는 타인의 불운을 통해 느끼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복권을 공정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어서 복권을 떠맡은 '회사'가 일정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절대 권력을 행사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모든 것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당시 빈민가는 이상한 문제로 저항을 했다. '교회 사람들'이 판돈을 늘리며 공포와 희망 조작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빈민가 사람들은 교회 사람들의 조작으로 다른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악명 높은 가슴 졸임에서 배제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소요를 일으키며  "모두가 복권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회사는 모든 자유인은 자동적으로 신성한 추첨에 참여할 수 있게 수락했다.      

     

  회사의 추첨 과정이나 운영 방식은 지극히 비밀스러웠다. 또한 누가 회사 직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회사 요원들은 비밀리에 활동한다.  회사는 신처럼 겸손하게 공개적인 것은 모두 피한다. 회사가 전해주는 지시들은 사기꾼들이 퍼뜨리는 것들과 다를 바 없었다. 회사의 은밀한 작동 방식에 대한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의 자비로움 덕분에 바빌로니아의 관습에는 우연이 만연해서 언제든지 우연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우연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의 내용에서 보듯 모든 사람들이 복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쾌락의 평등을 요구했다. 그들의 욕망에 힘입어 회사는 모두가 복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공정성을  내세웠고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며 막강한 힘을 만들었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게임을 진행하는 주최 측은 공정하게 진행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게임 앞에 모두가 철저하게 평등하다고 말이다. 주최 측은 게임 룰을 알려주고 그 룰을 어기면 가차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타인의 죽음은 나에게 곧 행운임을,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바빌로니아의 사람들처럼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수긍하고 열광한다. 456억으로 빚을 갚고, 어머니를 돌보며,  동생과 함께 살고, 고국으로 돌아갈 새 삶을 찾는  '희망'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게임의 주최자, 복권 회사가 설계한 '희망고문 '틀 안에서  불운을 당연시하며 공포를 수용한다.      


소설 속에서는 권력을 장악한 회사가 사람들이 느끼는 개인적인 희망과 공포를 알아내기 위해서 점성술사와 첩자들을 이용했고, 다양한 정보를 담은 문서들을 문서 보관소에 보관하였다. 사람들이 우연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회사를 과소평가하는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사람들의 불평불만에 대해 회사는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성스러운 포고문을 통해 사람들을 잠재우는 장면은 소름이 끼친다. 사람들은 그렇게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바빌로니아를  원래 그런 듯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오징어 게임]에서 사람들에게 이 게임에 계속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민주적인 투표의 결과에 따라 진행하는 장면이 있다. 이미  삶의 현장에서 게임만큼 죽음으로 내몰린 그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주최 측은 그들이 다시 돌아오리란 걸 예상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참여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잘 짜인 그물에 포획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정말 자유 의지가 있는가.

진정 나의 선택은 자유 의지에 맞게 이루어진 것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시스템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 맞을까.

바빌로니아의 회사처럼 교묘하게 뒤에 숨어 많은 것을 조작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쉽게 '이 세상은 그래!'라고 원칙으로 혹은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룰(규칙)이 강조하는 '공정'은 정말 공정한 것이 맞을까.      

이전 17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