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낀느 Jan 08. 2024

Alcohol, 이제는 너를 떠나서

이버지는 유능한 노력가였다. 기계 개발에 매진했고 사업도 번창했지만, 술도 매일 드셨다. functional alcoholic(기능적 알코올 중독자 : 알코올 중독이지만, 업무처리와 가족 관계 등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인 셈이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젊어서 술을 즐겼다. 아니다. 그 시대의 대학생들은 모두 술을 많이 마셨다. 천만 영화 ‘서울의 봄’ 무대가 되었던 바로 그 시대였다. 참 나도 20대에 엄청스레 마셨다. 

그러다 이십 대 후반에 시집가고, 고전적 시집살이를 하면서 전혀 마시지 않았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고 시집살이할 무렵, 한때는 키친드링커였다.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 낮에 저녁 식사 준비하면서 매일 소주 반 병을 마셨다. 

집안 어른이 위암이어서 수술하고, 병원에 계실 때였다. 나밖에 간호할 사람이 없어서 매일 오전 암 병동에 갔다. 거기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큰 충격이었다. 병실에서 마취하지 않고, 위내시경 하며 노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위가 없던 내 또래의 여자는 눕지 못했는데 결국 죽었다. 위암 수술하는 모습을 모니터에서 생중계해서 그것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했다. 처음으로 심각하게 맞닥뜨렸던 생과 사의 모습들을 소화할 수 없었다. 매일 병원에서 돌아올 때마다 어찌할 줄 몰라서 마트에 들러 소주를 샀다. 마시고 저녁 준비하고 나면, 아이들이 올 때쯤에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소주는 진통제가 되어, 취하면 좀 편해졌다. 하지만, 술은 고통과 만나서는 안 된다. 


나 홀로 서울에서 밥벌이를 했던 중년 시절에는 혼자서 밤에 술 마시곤 했다.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독한 술을 좋아했다. 남편이 모스크바에서 근무할 때는 무색무취한 보드카, 루스키 스탄다르트(Русский Стандарт)와 벨루가(Белуга)를 곁에 두고 살았다.      


그래도 살려고 그랬는지, 어느 시점이 되자 술을 한 모금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남동생, 모두 대주가였고, 두 사람 다 암에 걸렸는데 그걸 명심해서 술 마시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금주 선언을 하고 지켰다. 그 시기가 지나니 나 혼자 있을 때는 전혀 술 마시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식사 중에 맛있는 와인 있을 때만 한두 잔 하는 정도이고, 그걸 오버하면 몸이 갑갑하고 불편하다.      


이제 나에게 음주 문제는 없다. 술에 추억도 많지만 떠나와도 그립지 않네.   

        



맺음말.  

   

남편이 아침 6시 40분 어두운 골목길에 불 환히 켠 차를 타고 출근했다. 나는 부엌 창을 통해 차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이제 정확하게 12시간 후 돌아오고, 우리는 저녁 먹는다.     

1월과 2월 주중에 나는 그 12시간 중 8시간이 출퇴근 포함 일하는 시간이다. 남은 4시간에 저녁 준비와 내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루 두 시간. 무얼 쓸까, 내 창고를 뒤지다 비교적 시간 덜 잡아먹는 이걸 골랐다. 자서전이라도 쓰듯 가볍게 1, 2월을 보내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