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버지는 유능한 노력가였다. 기계 개발에 매진했고 사업도 번창했지만, 술도 매일 드셨다. functional alcoholic(기능적 알코올 중독자 : 알코올 중독이지만, 업무처리와 가족 관계 등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인 셈이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젊어서 술을 즐겼다. 아니다. 그 시대의 대학생들은 모두 술을 많이 마셨다. 천만 영화 ‘서울의 봄’ 무대가 되었던 바로 그 시대였다. 참 나도 20대에 엄청스레 마셨다.
그러다 이십 대 후반에 시집가고, 고전적 시집살이를 하면서 전혀 마시지 않았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고 시집살이할 무렵, 한때는 키친드링커였다.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 낮에 저녁 식사 준비하면서 매일 소주 반 병을 마셨다.
집안 어른이 위암이어서 수술하고, 병원에 계실 때였다. 나밖에 간호할 사람이 없어서 매일 오전 암 병동에 갔다. 거기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큰 충격이었다. 병실에서 마취하지 않고, 위내시경 하며 노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위가 없던 내 또래의 여자는 눕지 못했는데 결국 죽었다. 위암 수술하는 모습을 모니터에서 생중계해서 그것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했다. 처음으로 심각하게 맞닥뜨렸던 생과 사의 모습들을 소화할 수 없었다. 매일 병원에서 돌아올 때마다 어찌할 줄 몰라서 마트에 들러 소주를 샀다. 마시고 저녁 준비하고 나면, 아이들이 올 때쯤에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소주는 진통제가 되어, 취하면 좀 편해졌다. 하지만, 술은 고통과 만나서는 안 된다.
나 홀로 서울에서 밥벌이를 했던 중년 시절에는 혼자서 밤에 술 마시곤 했다.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독한 술을 좋아했다. 남편이 모스크바에서 근무할 때는 무색무취한 보드카, 루스키 스탄다르트(Русский Стандарт)와 벨루가(Белуга)를 곁에 두고 살았다.
그래도 살려고 그랬는지, 어느 시점이 되자 술을 한 모금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남동생, 모두 대주가였고, 두 사람 다 암에 걸렸는데 그걸 명심해서 술 마시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금주 선언을 하고 지켰다. 그 시기가 지나니 나 혼자 있을 때는 전혀 술 마시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식사 중에 맛있는 와인 있을 때만 한두 잔 하는 정도이고, 그걸 오버하면 몸이 갑갑하고 불편하다.
이제 나에게 음주 문제는 없다. 술에 추억도 많지만 떠나와도 그립지 않네.
맺음말.
남편이 아침 6시 40분 어두운 골목길에 불 환히 켠 차를 타고 출근했다. 나는 부엌 창을 통해 차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이제 정확하게 12시간 후 돌아오고, 우리는 저녁 먹는다.
1월과 2월 주중에 나는 그 12시간 중 8시간이 출퇴근 포함 일하는 시간이다. 남은 4시간에 저녁 준비와 내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루 두 시간. 무얼 쓸까, 내 창고를 뒤지다 비교적 시간 덜 잡아먹는 이걸 골랐다. 자서전이라도 쓰듯 가볍게 1, 2월을 보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