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낀느 Jan 24. 2024

Essay, 글쓰기는 지치지 않는 놀이라서


나는 회의한다. 내 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당장 모두 거둬버리고 입 닫을까 자주 생각한다.      


20년 이상 학생들을 가르쳐 오면서 다양한 개성들을 만났다. 잘하는 놈, 못하는 놈, 하면 잘하는데 게으른 놈, 해도 안 되는 놈. 

하면 잘할 건데 안 하는 애들에겐 자극을 주기 위해 따끔하게 매운 말을 던지지만, 죽으라고 하는데 능력이 안 되는 아이는 안타까워 더 많이 신경 써주고 목이 터져라 설명해 준다.    

  

내 글쓰기도 그 아이 같지 않을까. 평생 해와도 능력이 안 되어 결정적 펀치가 없다. 많이 쓰면 는다는 건 자기 위안이다. 물론 쓰면 쓸수록 문장이 매끄러워지고, 퇴고를 거듭하면 연결은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공부 못하는 아이의 한계는 여전하다.     


공부도 재능이지만, 글쓰기도 재능이다. 그래서 노력에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한두 시간 나랑 붙어 공부하면 엄청난 분량을 소화해내는 애도 있고, 한 시간이 지나도 코딱지만 한 분량밖에 못 해내는 애도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어렸을 때 박완서는 스타였다. 글 잘 쓰던 한 친구는 ‘아줌마로 살다 마흔 살에 데뷔해 신들린 듯 글을 써대는 작가’라며 마치 신화처럼 내게 속살거렸다. 박완서는 당시 아줌마들에겐 꿈이었다. 언젠가 우리도 그녀처럼 속에 고여온 봇물을 터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 사람이었다.     

 

<나목>은 이후 작품에 비하면 빼어난 문학작품은 아니었지만, 처음 쓰는 글인데 습작도 퇴고도 없이 단번에 장편소설이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은 박완서이기에 가능했다. 그녀 역시 노력보다 재능이 앞섰던 작가이다. 

단 한 번도 박완서처럼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혼자 토막토막 거짓말을 쓴 것밖에. 상상력과 창의력이 부족해서 참말보다 거짓말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글쓰기가 나아지는 한 가지 확실한 길은 있다. 책이다. 제대로 된 책 한 권을 읽어나가면 수시로 영감이 떠오른다. 생각이 생기고, 생각이 피어난다. 그래서 책 많이 읽는 글쟁이들의 잠재적 힘이 두렵다.     

 

맨날 글쓰기라는 게 삶을 조금 가볍게 만들기 위한 소도구나 놀이거리로 곁에 있어서, 삶의 소소한 불평에 머물렀다. 하지만 놀이가 아니고, 좀 더 진지한 무엇이었다면 즐거움도 덜했을 것이고,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나는 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쓰기가 끝나면, ‘나는’이란 주어가 들어가는 글은 가능하면 쓰지 않고 싶다. 실제로 문장을 쓸 때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나는’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이가 드니 매사 가뿐해져요. 
이제 과제나 어떤 요구를 완수하느냐로 평가받을 걱정이 없거든요. 어떤 면에서도 ‘저울질’당하거나 ‘점수 매겨질’ 필요가 없어요. 이제 나는 그냥 나일뿐 아무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아요.
모리 슈워츠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그의 글을 읽으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글쓰기든 뭐든 이제 나를 갈구지 않기로 한다. 학업 부진아처럼 평생 그 나물에 그 밥이라도 가뿐하게 가겠다. 단지 방향만은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할 것이다. 늙은 나는 나도 재미없다. 글쓰기는 계속 나의 놀이가 될 것이고, 작가라던가 당선이라던가 하는 고품질에 대한 희망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생에 이렇게 지치지 않는 놀이 하나쯤 있으면 살만하지 않은가.    


      

* 에세이는 좀 더 세분한 분류가 가능하지만, 여기서 에세이는 수필로 풀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