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들의 메아리』, 흉터가 남긴 인생 이야기
연애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관심사를 떠났다. 가끔 드라마 속 젊은이들의 싱그러운 연애에 미소 짓는 정도 외에, 연애소설 책을 읽은 것도 아주 오래간만이다.
그런데, 6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단 이틀 만에 숨 가쁠 정도로 빨리 읽어버렸다. 그만큼 내용이 흡입력 있고, 말이 지루하지 않았고, 값싼 감상에 함몰되지도 않았다. 표현이 품격 있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첫 부분에서 사이코메트리가 흥미를 끌었다.
이 책 마지막에 ‘토론용 질문들’이 나오는데, 첫 번째 질문이 사이코메트리에 대한 것이다.
01 ‘사이코메트리’는 한 사람과 관련된 물건을 만짐으로써 그와 연관된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사실을 알아내는 능력으로 정의됩니다. 당신은 그런 능력을 재능이라고 보시나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악기 전시실이 있었다. 거기서 작년 가을 오래된 악기들을 보았다. 18세기와 19세기의 피아노들을 만지고, 건반을 두드려 볼 수 있다면 그가 기억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몹시 궁금했고,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내겐 그런 재능이 없었다.
우리 집의 50년 넘은 피아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자매들이 자라면서 겪었던 모든 일과 그때의 감정이 그 안에 들어있지는 않을까.
‘한 사람이 남긴 메아리들은 그가 한 선택의 산물’인 책들의 메아리는 바뀌기도 한다. ‘분노와 배신’에서 ‘완벽한 화음 속에서 공명하는 음표들’로.
참으로 섬세하고 예민한 능력이다. 책이 사람처럼 감정을 흡수한다니 놀랍고, 그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부럽다.
책의 메아리와 향수의 향을 매치시킨 방식이 독특했다.
탑 노트 - 쓰라림
미들 노트 - 배신감
베이스 노트 – 슬픔
와, 이런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니.
‘모든 작가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심장박동이 있어.’라 하더니, 나는 여기서 작가에게 무너졌다.
하지만, 이 책은 심령적 능력만 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도 매혹적인 중고 책 서점, 책과 사진 앨범의 복원, 유대인 문제, 미국 내 나치 인사들, 정신병 환자 가족의 문제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어 한순간도 흥미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가장 큰 메시지는 연인인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말고는 아무것도 끼어들지 말게 하라’는 것이다.
나는 벨(Belle)과 헤미(Hemi) 두 주인공의 첫 만남 자리에서 벨의 모습 묘사가 궁금하여 AI에게 시켜 그려보았다.
‘암녹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같은 색깔 긴 장갑을 끼고, 단순한 진주 목걸이 한 줄을 목에 걸고, 검은 머리는 뒤로 빗어 넘겨 정수리에서 틀어 올린 20대의 여자’를 그렸다.
책 속 묘사만큼 영혼 있는 아름다움을 얻을 수는 없네. 나중에 영화가 나와서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다.
인생은 살면서 생긴 흉터들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 흉터 이면에 있는 것으로 인해, 그 흉터가 남긴 인생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격자구조인 이 소설(액자소설)은 이 메시지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액자 안과 밖의 두 연인은 상처를 치유하고, 각각 사랑을 찾는다. 약간 스포일러를 더하자면, 책은 해피엔딩이다. 오해에서 빚어진 상처를 안고 헤어진 액자 안 연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성공적으로 하면서 살다가 43년 후에 다시 만나 오해를 풀고 사랑을 되찾는다. 하지만 원, 다 늙어서 다시 만나면 뭐 할 건가 싶기도 하다.
책을 덮으면서 히브리어로 할아버지라는 뜻의 ‘사바’를 중얼거린다. ‘헤미’가 손자들에게 사바로 불리는 장면을 그려본다. 사바. 아름다운 울림을 가진 단어를 알았다.
올여름의 무더위를 견디기 위해 시간을 잊기 좋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