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70년대에 이대 나온 여자야

by 꼬낀느


언제부터 ‘이대 나온 여자’란 말이 희화화되어 쓰였는지 궁금해서 찾아보고 유래를 알게 되었다. 나는 76학번으로 이대에 입학했다. 이대를 나왔다는 게 왜 약간 비틀어진 말로 묘사되기 시작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나는 이제 젊은 날을 가감 없이 돌아볼 나이가 되었다.



기숙사


image.jpg 남편이 그려준 이대 기숙사 우리 방 모습


만 18세에 부산에서 올라와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부티 나게 자라진 않았지만, 밥 먹고 살만했던 집 딸에게 그 기숙사 방은 심했다. 낡은 군용 침대 같은 철제 침대 네 개가 붙어서 놓여 있고, 폭 좁은 장 네 개가 나란히 입구에 있었다. 침대 옆에 작은 책상이 하나 놓인 참으로 군더더기 없는 실용적인 공간이었다. 거기서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여학생 4명이 살았다.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김옥길 총장님은 말하셨다.

“한국인의 양심과 실정에 맞는 방.”

나는 그 말 한마디에 시대와 사회를 깨달았다. 그 후 늘 관심을 두고 바라본 선생님은 어린 여학생이 존경하는 마음을 지켜나가기에 족한 분이셨다.


기숙사는 9시에 통금이 있었다. 방 언니들을 따라 명동의 오비스캐빈에라도 나갈라치면, 막 흥이 오르자마자 돌아오기 바빴다. 9시까지 맞춰 오느라, 언덕길을 헉헉대면서 올라오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 길은 ‘휴웃길’이라 불렸다.

집에서 맏이로 자라, 언니들이랑 좁은 바닥에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면, 호되게 손등을 맞기도 했다.

“어딜, 감히.”

그래도 똑똑하고 예쁘던 언니들의 스무 살 언저리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군부독재와 마약


내가 대학을 다녔던 70년대 후반은 현대사에 남을 큰 사건들이 많았다. 당시 우리끼리 농담은,

“나중에 70년대에 의대 나온 의사에겐 가지 말아야 해.”

할 정도로 뻑하면 휴교에 휴강이었다.

나는 데모할 정도로 용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이 데모하는 곳을 쉽게 떠날 수 없어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친구와 나는 그런 우리를 ‘회색인(최인훈, 1964)’이라 자책하기도 했다.


데모만큼 마약도 악명을 떨쳤다. 사실 이대 친구들은 다 얌전해서 나는 마약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문은 흉흉했다. 모 대학에선 학교 옥상에서도 모여서 한 대더라. 우리 기숙사에서도 어느 방 식구들은 모두 해서, 그 방에 가면 묘한 냄새가 뱄다는 소문이 났다. 동부 이촌동의 클럽에는 미군들이 많이 왔는데, 그곳에도 독특한 냄새가 났다. 그래도 일반인은 접할 수 없었고, 나도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다.

대신 담배는 많이 폈다. 아마도 ‘담배 피우는 여자(김형경, 2005)’는 70년대 이대 앞 카페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요, 양장점은 열


그런 노래가 있었다. 양장점은 열이 아니라, 백인지도 모른다. 70년대까지는 우리나라에 기성복이 드물었다. 모두 학교 앞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던 시대였다. 한양대 다니던 내 친구는 일 년 내내 이대 앞 양장점에 옷값 외상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패션이라면, 이대 앞이었다.

76년 5월 말은 이대 축제 기간이었다. 개교 90주년을 맞은 학교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고, 기숙사 방 언니들은 학교 앞 양장점에서 드레스를 맞춰 입고, 마지막 날의 쌍쌍파티 준비에 법석을 떨었다. 3, 4학년만 티켓 지참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어 어린 우리는 구경만 하며 그날을 기다렸지만, 그 후 학교 축제에서 쌍쌍파티가 없어지게 되어 우리에겐 그런 기회가 없어졌다.

그 학교 앞 상점을 비웃는 시선들은 당시에도 많았다. 1학년 1학기에만 미팅을 50번 하는 애들도 수두룩 했다. 그때 미팅했던 서울대생은 교복을 입고 나왔다. 지나치게 진지했던 그의 모습에 나는 주눅 들었고, 대화는 내내 겉돌았다. 학교 앞에서 옷 맞춰 입은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 학생은 딱 한 마디 뱉었다.

“쁘띠 부르주아의 병적인 발상.”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오래 생각할 정도로, 사상이나 이념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이어령 교수님과 이민아


교수님의 강의는 몇백 명이 수강하는데도, 늘 순식간에 마감되어 수강 신청이 전쟁이었다. 결국 나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2학년 때 부전공이었던 불문학 개론 시간에 ‘어린 왕자’를 읽었는데, 그 수업을 민아랑 같이 들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조그맣고 늘 생글생글 웃던 민아가 이어령 교수님 딸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나는 그 애와 조잘조잘 얘기 나누며 듣는 그 수업과 밝은 민아가 좋았다.

나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는 사람이라 세월이 흘렀는데 다시 그를 찾거나 돌이키기보다는 마음에 남은 모습들을 가끔 혼자 꺼내 본다. 민아도 훗날 매스컴에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웠지만, 스무 살의 민아를 기억하며 그녀를 위해 기도만 했다.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일을 했을 텐데. 하늘은 이쁜 사람 순으로 먼저 데리고 가는 것인지. 나는 너보다 더 살아 너를 추억한다.



데모하는 학생, 공부하는 학생, 술 마시는 학생


7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데모도 하고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는 게 아니라, 부류가 극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금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신촌역 앞 으악새 술집에 우르르 몰려가 낮술을 마시고, 학교에 돌아와 C관 앞 비탈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지금도 남편과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해보면, 그 시절 우리들은 참 술도 많이 마셨다. 나는 데모도 하지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아 겨우 졸업했을 정도이니, 아마 술 마시는 학생이 아니었을까.


마흔 무렵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후, 나는 장학금을 타는 학생이 되었다. 지금도 매일 아침 공부한다. 좋아서 하는 공부이긴 하지만, 그때 공부하지 않은 벌을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이화스러움


70년대는 대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다. 이대 문리대는 배지의 바탕색이 하얀색이었다. 부산에 내려와 그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은 은근히 자랑이었고, 남포동에서 좀 멋진 여자인데 싶으면 이대생이었다.

이대 앞 한 토박이가 한 말을 본 적이 있다.

‘이대는 언제까지나 이화스러우면 좋겠어요.’

나도 그렇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대는 언제나 이대스럽기를 바란다. 똑똑하고, 세련되고, 시대의 모습을 이끌어갈 수 있는 포용력을 지닌 어머니 같기를 후배들에게 기대한다.





짧지 않은 글이었지만,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시절 이야기를 길게 할 날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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