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졸혼도, 이혼도 하지 않는다 (1)

by 꼬낀느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만 17년을 살고, 사십 대 초반에 이혼했다. 홀로 9년 아이들 키우며 지내다, 오십이 갓 넘어 재혼했다. 이제 그와 14년째 산다. 간단한 내 이력이다.


이혼한 것은 시어머니 때문이었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예속 dépendance :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 종속된, 일반 여론이 사랑하는 사람의 조건 자체라고 여기는 문형.>

<나는 예속된다는 사실에 열중해 있으며, 하지만 더 미묘한 점은 그런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마흔두 해를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살았다. 아버지, 남편, 아들. 나는 그들의 눈치를 끝없이 보아야 하는 작고, 귀여운 애완견이었다.

“난 네 꺼야.”

이 달콤한 울림을 스스로 원하여 내뱉었다. 나는 남자들의 사랑 안에서 편안했다. 자위적 만족. 사랑에 헌신한다고 믿었으며, 그들은 나를 '천사'라 불렀다.


결혼 초, 사업이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아버지가 남몰래 나를 찾아왔다. 시집살이하는 큰딸은 구정물 냄새나는 행주치마도 못 푼 채 달려 나와, 아버지에게 꼬깃꼬깃 접은 돈으로 술을 사드렸다.

“그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곁에 있던 네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아니?”

묵은 미움을 풀고 암 수술 후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는 나를 보고,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천사로군.”

나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과 또 그가 예속되어 있는 사람에게 이중으로 종속된다. 그러면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내가 그 마지막 대상이자, 나를 저자세로 만드는 저 높은 곳의 결정이 이번에는 전적으로 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를 한국에 둔 채, 우리 네 식구만 독일에 가서 살게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그랬다.

“이제 니들끼리만 조촐하고, 행복하게 살아보렴.”

우리는 거기서 처음으로 부부 싸움을 했다. 끊임없이 싸웠다.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면서 출구 방향에 대한 의견 차이로 싸웠고, 내가 공부할 것을 단독으로 결정했을 때도 싸웠고, 시내 나가는 길에 장을 좀 봐달라고 부탁할 때도 싸웠다. 우리에겐 '시어머니'란 공동의 적(?)이 없어지고, 둘이 처음으로 적이 된 것이었다.


남편은 1박 2일 동안 가출했고, 아마 계속 굶었던 듯 바싹 마른 입술로 돌아와 가는 한숨을 쉬었다.

“옛날에는 우리, 행복했었는데.”

나는 어이가 없었다.

왜 희생과 양보의 주체가 나여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나야 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한 비극적인 훌륭한 주체로서 스스로에게 선택했던 운명 안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시어머니는 수술 전 병원에 다닐 때, 차 뒷좌석에서 끊임없이 불평과 한탄만 늘어놓았다. 작은며느리와 합심하여 깡그리 집안 재산을 탕진하고 난 후에, 어머니가 그녀에게 퍼붓던 말.

“씹만 갖고 시집온 년!”


이른 더위가 극심하던 오후 시어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나는 살의적 분노에 사로 잡혔다. 새로 개업한 카페 입구에는 오색 풍선이 조롱조롱 입구까지 달려 있었다. 나는 주먹으로 풍선을 하나씩 터뜨리며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친구가 무서워 도망갔다. 나는 파괴되고 있었다.


그날 밤까지 대체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서성대던 나는 밤 12시에 남편의 무거운 고갯짓 동의를 얻고, 친구네 가게에 가서 밤새 술을 마셨다. 우리는 새벽, 해운대 모래 위에 누워 꺽꺽 울었다.

다음날 나는 더 이상 파괴당하지 않기 위하여 병원에 갔었다. 이틀 약을 먹고 나니 주먹이 앙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무것에도 집중이 되지 않고, 전혀 사고가 불가능해졌다. 나는 약을 버렸다.


<그리하여 귀족 계급의 권력이 민주화 요구의 첫 여파를 느끼기 시작하는 저 역사적인 단계에 이르게 된다.>

한국 남자는 남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러진다. 그들은 자신이 불편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불편함은 불편해서 못 견딘다.


유학 가는 딸들마다 그 나라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아버지에게 한(恨)을 낳게 했지만, 나는 동생네 부부들을 보면 '차이'를 느낀다.

막내는 무늬는 한국 사람인 독일인과 결혼하였다. 그들은 가끔 방 안에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했다. 때로 언성이 높아진다. 근심스러운 낯으로 묻는다.

“니들 다투었니?”

멀건 얼굴로 동생은 대답한다.

“아니, 우리 토론했어.”


나는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을 포기했다. 사랑은 늘 더하거나 덜했다. 착한 한국여자였던 나는 '관계'에만 급급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마침내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내 인간됨을 찾아볼 때가 왔다.

대체 “그것이 ‘나’여야 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1999년 7월 30일에 부산을 떠났다.

부산을 떠나고 이혼했어도 아이들 할머니는 서울까지 나를 찾아왔다. 내 친정어머니에게도 찾아갔다. 도저히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어 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떠났고, 먹고 살길을 찾기 위해 공부했다.


이제 묵은 분노와 미움은 남아 있지 않다. 90대인 그분은 아직 살아 계신다. 치매여서 요양병원에 있다고 했다. 그분에 대해서는 애잔한 연민과 무관심과 약간의 감상적 생각으로 적당히 편하고, 좀 어색하다. 그렇게 되기까지 6년이 걸렸다. 나는 이제 과거의 나를 자주 돌아보지 않는다. 남은 삶을 돌본다. 나는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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