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명론자이다. 살다 보니 하나의 선, 운명을 따라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운명이 이러니 마냥 따라만 가며 살자는 뜻이 아니다. 운명에는 선순환(善循環)이 필요하다. 오늘의 내가 하는 일이 원인이 되어 결과가 돌아온다. 나는 운명 개척론자이다. 그래, 결국 말장난이다. 다만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모두 앞날과 연관이 있고,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마흔두 살에 이혼하고 가장 막막했던 것은 먹고사는 일이었다. 아이들 둘을 데리고 있었고, 양육비는 딱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받았다. 전업주부여서 내 재산이라곤 한 푼도 없었다.
친정엄마의 지원으로 미국에 도망가서 공부했다. 911이 터지고,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 비자를 얻고 공부 중이었지만, 공부를 마쳐도 여기서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없어졌다. 원래는 공부 마치고 일할 예정이었다.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했고, 나도 돌아왔다.
이혼하기 직전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를 땄지만, 파리에서 박사하고 온 내 친구들도 시간 강사 자리도 구하기 힘들 때였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불어와 독일어는 지는 학문이었다. 아마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박사과정에 갔을 것이다.
“박사 따고, 시간 강의 한두 개 하면서 학회 나가서 폼 잡고 살면 되잖아.”
전남편이 유일하게 허락한 게 공부였다. 불문학에서 내 관심사는 15세기였고, 그걸로는 먹고살 수 없었다. 하지만 공부는 더 하고 싶었다.
나는 당시 입시 시장을 몰랐고, 한의대에 진학해 볼까 하고 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한의대가 어렵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의대 다음으로 탑에 올라 있었다. 일단 재수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30대 주부들도 두 명이 있던 반이었다. 셋이서 반년 동안 서로 도와가면서 열공했다.
그해 겨울 수능 보고 대입원서를 썼다. 한의대는 어림도 없었고, 강원대 수의대는 모자랐지만 지원해 보았다. 지금은 모든 수의대가 내신 1점대이지만, 20년 전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교수님들과 면접하는 자리에서,
“올해는 성적이 좀 모자라지만, 공부 더 해서 내년에 꼭 올게요.”
하고 장담하기도 했다. 지금도 강원대 수의대를 생각하면 애틋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대성학원 재수종합반에 응시했다. 그 재종반에 들어가는 것도 어느 정도 실력이 필요해서 합격만도 다행으로 여겼다. 본격적으로 수험공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반에 60명쯤 빽빽이 책상을 붙인 채 하루 종일 공부하는 학원이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다른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고 밤늦게까지 공부했고, 나는 꼬맹이가 중학생이라 수업 마치면 돌아왔다.
첫 달에는 따라갈 만했다. 그러나 딱 삼 개월 지나자 영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나는 반에서 꼴찌 했다. 당연한 거다. 그 애들은 벌써 몇 년째 공부하고 있는 물리나 화학들을 나는 개념조차 모르니. 그리고 깨달았다.
‘적어도 수의대 가려면 재종반에서 2년, 그 이상을 가기 위해서는 3년의 재수 생활이 필요하겠구나.’
공부를 마치면 50세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재수 생활을 접었다.
지금 나는 돌아본다. 그때 공부를 계속해도 되지 않았을까? 2년 재수하고, 수의대에 진학해서 50대에 개업해도 20년은 할 수 있다. 한 5년 공부해서, 20년 써먹을 수 있으면 충분히 시간 투자할만하다. 나는 지금 65세인데 현역이고 아직 몇 년 더 일할 거니까.
최근 45세에 의대에 입학한 분의 기사를 보았다. 이제 수명이 길어지고, 노년에도 머리와 몸이 건강한 사람이 많아졌다. 이혼하고 먹고살 길이 두려운 분은 마음도 다잡고, 살길도 찾을 겸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 단 먹고살 길을 찾는 공부는 가장 실용적인 학문이 되어야 한다. 한 전문대학의 ‘입학이 취업이다.’처럼 당장 직업과 연결될 수 있는 그런 공부.
인생이 재미있는 게, 그때 내가 2년도 안 되는 유학 생활을 하며 영어를 접한 것과 재수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수능 영어를 알게 된 것이 바탕이 되어 나는 영어 공부방부터 시작해서 영어학원 선생이 되었다. 물론 이것으로 부족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영문법을 기초부터 샅샅이 공부했다. 맨땅에서 헤엄치기로. 학생 수준에 맞는 초등 영문법과 중학 영문법을 차례차례 혼자 독파한 것이다. 한 5년 다시 치열하게 공부했다. 모든 일은 반드시 한 5년 정도 맹렬하게 몰입하는 시간이 있어야 전문가가 된다.
내 첫 제자는 7살. 그 후 나는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가르쳤다. 그 94년생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 내 브런치를 구독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인맥에 성공한 사람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운명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거기 딸려가는 게 아니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이혼해서 현재가 두렵고, 미래가 무섭다면 우울증 약 먹지 말고 당신 자신을 가라앉히기 위한 공부는 어떨까. 브런치에서 이혼일지들을 보면서 당사자 당신에게 그런 제안을 해본다. 공부가 제일 쉽다. 물론 선생이라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