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에서 나는 행복했다

뉴욕 한 달 살기 12

by 꼬낀느


지난 주말 보스턴 날씨는 최저기온 14도, 최고 기온 17도였다. 올가을 처음으로 두툼한 윗도리를 걸쳤다. 쌀쌀하고 가끔 비도 뿌렸지만 걷기 좋은 날씨였다. 그래서 보스턴에서는 걷고, 보고, 먹고, 잤다. 단순하면서도 시간을 귀하게 즐기는 방법이다.


“보스턴에서는 무조건 걸어요.”


보스턴의 건물들은 이제까지 본 세상과 구도와 배치가 달랐다.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에는 ‘구시가지’가 있었다. 높다란 교회의 첨탑을 가운데 두고, 고도 제한된 건물의 붉은 지붕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대신 도시로 나오면 익숙한 고층 건물들이 지루하게 겹쳐 있었다. 그런데 보스턴은 이런 규칙을 벗어났다.

‘가장 오래된’이란 수식어가 붙은 그 붉은 건물들 바로 뒤에 고층 빌딩이 딱 붙어 있어 사진을 찍으면 묘하게 두 건물이 맞붙어 있는 듯 보였다. 사진 찍기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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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 오면 대개 프리덤 트레일 Freedom Trail을 걷는다.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소란스러움을 피하면서 바닥의 붉은 선을 따라 걸으며 역사 공부를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보스턴의 부드러운 속살은 대로 뒤에 있는 조용한 주택가나 뉴베리 스트리트 Newbury Street에서 보인다.


며칠 전 뉴욕 지하철에 앉아 있었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혼자 슬며시 웃는다. 내 눈에 보이는 몇 사람들은 지금 당장 연극무대에 세워도 될 만큼 제각각 개성적인 모습이었다. 바로 옆에 앉은 젊고 키 큰 백인 남자는 짧은 머리를 삐삐머리로 묶고, 소녀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내려다본 신발에는 귀여운 나비 모양으로 리본까지 묶여 있었다.


짧은 여행에서 본 보스턴 사람들은 뉴욕 사람처럼 다르거나, 두렵거나 하지 않았다. 젊은 학생들이 많은 곳이었는데도 좀 더 보수적이고, 좀 더 중산층이 많이 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편안하게 많이 걸었다. 삼일동안 매일 만 보 이상 걸으면서도 몸이 점점 활기를 찾아갔다.


“학교와 서점과 공립 도서관에서 본 것은요.”


보스턴은 학교의 도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숙소인 백베이 힐튼호텔에서 가까이 있던 버클리 음대(Berklee College of Music) 빌딩을 토요일 밤에 지나가면서 보았다. 불 꺼진 창이 몇 되지 않았다. 연습실로 보이는 불 밝힌 그 방에서 음악과 만나고 있을 그 젊음이 살짝 부러웠다. 내가 도망쳐 온 음악과 나에게는 없는 재능을 가진 그들이.


시내에는 다른 학교들도 있었다. 이제 임윤찬이 다니고 있는 학교로 기억하는 NEC(New England Conservatory) 앞에서 혹시 저 모퉁이를 돌아오는 윤찬을 만나지 않을까 기대도 하며, 학교 안에 들어가 잠시 죠단 홀(Jordan Hall)에서 리허설 중인 연주자들을 구경했다. 홀은 역시 창문 너머 보기만 해도 고풍스런 우아함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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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는 역시 막강했다. 보스턴 공립도서관에 앨범이 주르르 있었고, 하버드 대학의 책방에도 <Beyond the Story>가 가장 잘 보이는 입구 서가에 정면으로 놓여 있었다.



“뉴베리 스트리트에서는 노천카페에서 먹고 마시고, 노스엔드(North End)에서는 이탈리아 요리를 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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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에는 뉴베리 거리를 걷다 너무 지쳐서 그 부근에 있던 Pinky’s에서 간단하게 칵테일과 고추튀김과 랍스터롤을 먹었다. 거기서 먹은 그 고추튀김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식으로 하면 꽈리고추를 튀겨서 쌀 튀김을 섞어서 조리한 거라고 할까? 내 입맛에 잘 맞아서 아주 맛있게 먹고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shishito-peppers.jpg BLISTERED SHISHITO PEPPERS (lime-aioli, sea-salt, puffed wild rice & fresh herbs, $12)


토요일 점심은 뉴베리 스트리트 뒷길에 있는 그리스 음식점 Krasi에서 먹고 하버드 대학에 갔다. 보스턴에 사는, 동생 대학 동창 부부를 만나 시끄러운 Tattee 카페에서 대화도 나누고 사진도 찍고 했다. 그 카페는 도처에 있는데, 어디나 사람 많고 시끄러웠다.

“그래도 얘들이 미국의 앞날을 책임질 사람들인 거지?”


비가 오고 있어 많이 걷지 못하고, 하버드 대학에서는 책방과 기념품 가게를 갔다. 학생들 줄 기념품을 사고 나니 흐뭇하다.

“공부 열심히 해서, 하버드도 가고 그러렴.”

엄마의 바람, 선생의 마음이다.


일요일 돌아오기 전에 비콘힐을 구경하고, Toscana란 제대로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해산물 리조또를 먹었다. 나에겐 여기 음식이 모두 조금 짠데, 흔한 리조또가 쌀쌀한 날씨에 간이 딱 맞고 따뜻해서, 바닥이 보일 때까지 싹싹 비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뻤던 건 잠을 제대로 푹 잔 거요.”


보스턴의 호텔비는 억 소리가 나올 만큼 비싸다. 동생이랑 사전 예약할 때 시내 한 복판인 백베이에 있는 호텔에 잡을지, 좀 변두리로 나가서 싼 호텔로 할지 많이 궁리했는데, 결국 2박 3일의 짧은 여행에서는 시내에 있는 게 낫다 싶었다. 벡베이 힐튼호텔은 위치는 좋지만, 서비스가 세련되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동생이 회사 할인을 받아서 이틀에 800불. 백만원이 넘는 돈이어서 떨렸다. 10월에는 더 오른다고 한다. 대체! 왜! 이렇게 뉴욕이나 보스턴은 호텔비가 비싼거냐고! 이해를 못하겠다.


근데, 어라. 이 호텔방이 널찍하고, 많이 걷고, 잘 먹고 했더니 여기 와서 처음으로 안 깨고 밤에 6시간 동안 숙면을 취했다. 그러고 나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역시 먹는 거, 걷는 거, 보는 거 모두 중요하지만 자는 게 가장 우선인 나다. 보스턴에서 나는 잘 자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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