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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Feb 05. 2021

‘인간은 절대 안 변한다’?,  No!

       


유튜브와 친해진 요즘이다. 

미지의 영역에도 쉽게 다가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시절이다.


‘인지심리학’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았다.


인간의 여러 가지 고차원적 정신 과정의 성질과 작용 방식의 해명을 목표로 하는 과학적, 기초적 심리학의 한 분야.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 획득한 지식을 구조화하여 축적하는 메커니즘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한다.……

방법론적으로는 실험심리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실시하여 그것으로부터 얻어진 결론을 토대로 예상 가능한 모델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정신활동이라는 특성상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가설과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를 종합함으로써 그 내부 구조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 인지심리학의 목표이다.(두산백과 doopedia).



인간 인지 과정의 구조와 원리를 밝힌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 인간 인식, 마음 작용에 대해 밝혀보고자 하는 작업인 듯싶다.


아주대학교 김경일 교수님의 뇌과학과 연결시킨 인지심리학 강의도 틈틈이 즐겨 들었다. 인간 이해, 즉 ‘나’라는 생물체 이해에 유용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아난다마이드(anandamide; 뇌신경전달물질, 대마 성분)의 퍼센트로 그 국민들의 기질, 예컨대 낙천성의 척도를 설명하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낙천성이 약하단다(가장 낙천성이 높은 것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라고 한다).

즉 행복감을 느끼는 정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한국인은, 그와 표리를 이루어 근면, 성실도가 세계 최고위라 한다.


또한 아이큐의 비교는 무의미한 것이며, 메타 인지(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 발견, 통제하는 정신 작용)야말로 인간 능력 발휘에 있어 중대한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설명도 유의미했다.


AI 시대의 인간 위기론과 불안감의 언설들이 떠돌기도 하지만, 이렇듯 한쪽에서는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과 본질을 탐구하는 연구가 활황을 보이는 듯하다.

인간은 위기의식 속에서 성장하고 한단 도약하는 존재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인간과학’의 시대가 예견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또 듣자니, 아직까지의 심리학적 연구 결과가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라는 것에 귀결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다.

내 마음에 안 드는 나를 평생 붙들고 살아야 한다면, 내가 배우고 노력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일련의 심리학적 연구들이 인간 그 자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간을 들여다보고 또 밝혀내 줌으로써, 일면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노력들의 결과가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에 머무르게 된 이유는 명료하다.

‘변할 수 있는 방법’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인간 인식에 대한 해체는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그 해법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소이다.


그러나 앞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물질보다도 단단한 인간의 인식,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 인류가 지난날 인간 마음에 의해 야기해 온 수많은 실패와 모순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환난의 역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절대 안 변한다는 말을 나도 간간히 듣고 살아온 것 같다.


그렇지만 지난 날의 나는 열심히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살아왔다. 책을 읽고, 지혜의 고전들을 찾아 읽었다.

이렇게 머릿속에 풍부한 지식이라도 쌓다 보면 나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밑바닥에 있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노력들이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당장에는 좀 흡족해지고 충만해진 듯 여겨졌던 그 효과는, 생각보다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여전히 옆(!)의 사람이 불편했고, 낯선 사람이 거북한 폐쇄성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성격만 급해서 둥거리지만 삶은 재미없었고,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 속을 헤매었다.

지식이란 것이 결코 나라는 인간을 고매하게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이 아님을 잘 알게 된 것 같다.


마음이 ‘참’을 깨우쳐야 하는 것이며, 실제 내 마음에 ‘허기’가 없어야 깨우칠 수 있는 것임을 나중에 명상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의 산 삶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마음(업)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습을 버리는 명상을 해오다 보니, 어느 틈에 예전의 그 ‘나’로부터 빠져나와 있었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편하고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어진 것은, 생각해 보면 대단한 변화이다.

내 앞의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이것도 예전에는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사람이 고맙고, 소중해져 있다.

하루 해가 짧아 바둥거리면서도, 지금 당장 고요히 숨이 쉬어진다. 마음이 쉬고 있다.


잘 나고 능력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위축받던 지난날의 내가, 이제 내 마음 속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배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부터인 거 같다.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의 태도들에 시선이 돌려지니, 그 모든 것이 나에게 풍요로운 가르침으로 전해져 왔다.


조용히 배움을 즐기다가, 간혹 주위 사람에게 내가 뭔가 필요해진 한순간이 올 때 느끼는 기쁨의 소중함도 알게 된 것 같다.


불편하고 못마땅했던 허기의 마음들이, 부정적인 마음의 환(幻)들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 마음들을 버리다 보니,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해 있었다.


내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바뀌어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지금의 나를 희망차게 존재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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