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첫 소설을 출간한지 20년이 되었다.
돈은 근근이 밥 먹고 살 정도로밖에 벌지 못했고, 유명해지지도 못했으며, ‘재미’가 가장 큰 미덕인 장르소설 씬에서 지루하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전업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도 어김없이 글쓰기의 길로 돌아와 꿋꿋하게 새로운 소설을 써왔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대견스러웠다.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꾸준하게 쓰려는 ‘노력’만이 내가 계속 소설을 써나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현재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재작년 임신을 했을 때 ‘고백의 순간(2023, 북큐브)’을 쓰고 출간한 게 마지막이었다. 출산 후 ‘고백의 순간 외전(2024, 북큐브)’를 쓰긴 했지만 한글 파일로 30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이었다.
육아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서 소설을 쓸 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기엔, 나에겐 가사도우미인 딴딴과 육아도우미인 N, 그리고 N이 퇴근하면 육아의 90프로를 맡아주는 남편이 있었다. 물론 저질체력의 노산 엄마인데다 밤수유와 엄마껌딱지 시절, 직접 이유식을 만들던 시기에는 꽤 힘에 부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다른 평범한 영유아 엄마에 비해 육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월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낮 시간에는 비좁은 집에서 딴딴과 N, 아기 럭키와 부대끼느라 어수선해서 집중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아기가 잠들고 난 7시 이후에도 아기 옆에 누워 유튜브 쇼츠나 넘기는 시간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각해 놓은 소재도 있고, 호기롭게 제목도 정해두었지만 본격적으로 구상에 들어가면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 어떤 구상이나 시놉시스 없이 일단 부딪쳐 보자며 몇 줄 씩 써보기도 하고, 어떤 원고는 서너 장 진도를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서 다시 멈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소설을 쓰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소설을 쓸 수 없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노력이 나의 최대 장점이었는데 이제는 노력할 의욕조차 없어진 느낌이다.
이런 나의 답답한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처음 글을 쓰던 시기 소설 온라인 연재 커뮤니티에서 만났다. 밤을 새며 글을 쓰면서 채팅을 하던 우리의 만남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현재는 메신저를 통해 거의 매일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멀리 떨어져 살아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얼굴을 보고, 서로의 가족들과 어울려 여행을 가기도 하고, 집안의 경조사에도 함께 참여하며 그 인연을 20년째 이어가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 종이책을 출간한 어엿한 출간 작가들이었다.
가장 큰 언니는 국내 메이저 출판사의 장르소설 레이블에서 첫 종이책을 출간한 후 다른 출판사와 두 번째 책 계약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연달아 아이 셋을 출산하고 육아하며 소설 쓰기에서 점점 멀어졌다.
(당시 미혼이었던 나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짬을 내서 한 줄이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의아해했었다. 내가 출산과 육아를 -그것도 고작 아이 한 명- 하면서 그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가당찮은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을 해서 예전보다는 조금 여유 시간이 생겨 다시 소설을 쓰려고 노력중이다.
다른 언니는 두세 권의 종이책을 더 출간한 뒤 언니의 또 다른 꿈이었던 드라마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유명한 드라마 대본 공모전에 입상하고 연계된 드라마 제작사들과 인연을 맺기도 했고, 국내 최대 드라마 제작사와 계약을 하고 피디와 대본을 디벨롭하기도 하기도 했지만 드라마 제작 시장의 경기 침체로 인해 드라마화와 입봉이 답보 상태다.
이 기다림의 시간에 언니는 다시 소설을 써보기로 마음 먹었다. 예전에 써두었던 소설들을 다시 이어나가려 시도도 해보고, 새로운 소재로 소설을 구상해보기도 한다.
작년 연말 한국에 방문했을 때 우리는 만남을 가졌다. 한 언니가 같은 다이어리 세 개를 사왔다.
우리는 이 다이어리에 소설을 구상해서 2025년에는 꼭 좋은 글을 써서 출간하자고 서로 격려하고 다짐했다.
넘쳤던 의욕이 무색하게, 석 달이 지나도록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 여전히 이렇다할 시작을 못하고 있다.
함께 제자리걸음 중인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쭉쭉 시원하게 진도를 나가서 글쓰기 욕구를 자극시켜주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소설은 어떻게 쓰기 시작하는 거였더라….
20편이 넘는 장편 소설을 책으로 출판한 경력이 무색한 원초적인 고민과 함께, 오늘 또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