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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Jun 22. 2021

두서없는 이야기들

과테말라에서 강원도로

도연에게,


앞으로 너에게서 답장을 받으면 일주일 안에 답장을 쓰도록 알람을 설정해놔야겠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답장을 읽고선 홀라당 까먹었지 뭐니????


너의 지난 편지를 읽으며 '나의 서른일곱'에 대해서 아주 야트막하게 생각해봤어. 벌써 서른일곱을 절반이나 살아냈더라. 그런데 내가 통과해 온 그 6개월의 시간이 좋았던 거 같아 난. 그리고 남은 6개월은 더 좋을 것 같아, 라는 막연한 신뢰 같은 것들이 내 안에서 피어나는 기분이었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것들 가운데서 나답게 살아내는 일. 너는 그런 일에 고민이 많다고 했지? 나도 결국은 '나답게 살기'에 집중하고 있어. 그렇게 지낼 때야 비로소 내가 스스로에게 마음에 드는 모습이니까 말이야.

이곳에서의 나의 직업은 '주부'니까 사람들과 얽히는 이해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일은 식모(이자 유모) 때문이거나 시댁 식구들이라거나 그런 것들일 텐데... 지금은 내 주위의 사람들이 퍽 나이스 해.


과테말라로 이주해 올 때 가장 걱정했던 '시댁이 있는 나라'라는 생각은 이제는 아예 없어졌어. 예전엔 서운하게만 느껴지던 어머님의 퉁명스러운 말투도 이제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나도 어머님한테 아양 떨 듯 억지로 살갑게 굴 필요가 없어서(그렇지만 그래도 전화할 때 목소리 톤은 조금 높이곤 하지) 좋아. 표현 방법은 각자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어머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분이니까. 장남이 꾸린 가족이 평안하고 행복하도록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시려는 분이니까 어머님의 그 마음을 비꼬아 받아들이거나 '시댁'이라는 조건의 색안경을 한 겹 벗겨내니 시댁도 충분히 좋을 수 있는 거더라구!! 게다가 바쁜 시어머니는 참 좋은 것 같고 말이야. ㅋㅋㅋㅋ나도 나이 들면 더 바쁘게 살아야지, 다짐했잖아... 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엄마가 나한테 그러더라. 내가 과테말라로 이주해 온 이후로는 내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내가 생판 모르는 나라에 있을 때보다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친구나 지인들이 많고, 또 어머님이 계시는 나라로 오니 엄마의 마음이 편안하대. 아, 그리고 무엇보다 사업을 하던 파나마 김서방보다 월급쟁이인 과테말라 김서방이 엄마는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있지, 나는 요즘 책이든 영상이든... 부모님 얘기만 나오면 눈물이 주체할 수 없게 흘러. 특히 어떤 포인트냐면 부모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걸 생각하면 그렇게 복받쳐 오르더라. 부모님을 못 뵌 지 2년이 흘렀어. 엄마는 '페이스톡'을 자주 하니까 곁에 있는 것 같고 좋다고 늘 말씀하시곤 하지만 내 마음은 조금 달라. 건강하지 못한 엄마와 70대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아빠. 우리 외할아버지가 여든몇 세에 돌아가신 걸 생각했더니 아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10여 년이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슬프더라. 10년 동안 나는 아빠와 시간을 얼마나 보낼 수 있을까.. 싶으면서 말이야.

이런 얘기를 편지에 쓸 계획은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삐져나왔네. 어쨌든 올해의 겨울엔 내가 가든, 우리 친정 식구들이 오든... 어느 방향으로든 흘러서 만날 계획을 흐릿하게 구상하고 있어.


아참, 전에 내가 to do list 썼던 것 기억하니? 그중에서 요샌 바이올린 연습을 시작했어. 오랜만에 하니까 현을 잡는 손가락 끝마다 상처가 나고 아픈데, 그러길 일주일이 지나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손가락 끝의 통증이 없어졌어. 굳은살이 생겼나 봐. 오랜만에 하는 바이올린이 무척이나 즐거워. 어릴 때 이렇게 했더라면 엄마가 원하는 것보다 더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ㅋㅋㅋㅋㅋㅋ 시호한테 악기를 걸리면 안 되기 때문에(아마도 다 뜯어놓고 던질지도 모르니까) 시호가 놀이터에 나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나가자마자 옷장 속에서 악기를 꺼내와 유튜브를 켜서 연습하곤 해. 얼마나 바이올린 연습에 심취해 있었는지.. 지난주엔 글쎄 혼자 외출해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을 금요일이나 되어서야 했다니까?! 매일 집에서 바이올린만 연습하다가 "어머! 벌써 금요일이야??? 카페 한 번 나가줘야지!"라면서.


요즘 내가 열을 올리고 있는 세 가지!

홈트로 내 몸을 조금씩 건강하게 만들기(3개월 동안 3kg를 덜어냈어!), 시호와 내 밥을 정성껏 지어먹기, 그리고 바이올린이야. 그 일들 사이사이에 식물들 돌보기와 책 읽기 정도가 들어가면 나의 하루가 완성되지.


그런데 밥이라는 게 참 이상해. 파나마에선 오빠가 밥을 담당했잖아? 그때도 사람들이 다 오빠를 일등 신랑이라고 그랬어. 마치 모든 것을 다 해주는 남편인 양. 사실 우리의 집안일은 오빠가 요리를 하고 내가 청소나 빨래 등을 하는 걸로 구분되어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밥 하는 남편'이 갖는 어마어마한 명예가 있더라고.


내가 시호의 밥을 정성껏 지어 먹이는 걸 보고 사람들은 또 나를 최고의 엄마 취급(?)을 해. 난 절대 그런 류의 엄마가 아닌데 말이야. 심지어 우리 엄마는 나더러 '모성애'가 강하다고 하더라? 밥 잘 차려주는 이유 하나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서 '밥'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대단하구나, 싶더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그런 평가가 싫지 않고(좀 간사한 서타일 ㅋㅋㅋ), 너도 알다시피 내가 시호의 밥에 성의를 가득 담는 건 내 만족이기도 하기에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할 예정이야.


너의 답장을 읽는데, '치커리'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치커리가 어떻게 생겼더라?' 하며 잠시 버벅대다가 쌈에 싸 먹으면 맛있는 그 치커리!!!! 하며 치커리의 모습을 떠올려냈어. 으아.. 한국에 가거든 너희 집은 주말 코스로는 부족해... ㅋㅋㅋㅋㅋ 며칠 더 비비고 앉아서 텃밭에서 갓 딴 채소와 과일로 밥을(네가 해주는) 먹고 싶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설거지는 내가 할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은 비가 길게 내려 시호가 놀이터에 나가지 못했어. 고로 나도 바이올린 연습을 할 수 없지만, 비가 내린 덕에 커피를 한잔 끓였고 귀로는 비를, 코와 입으로는 커피를 마시며 너에게 아직 답장을 쓰지 않은 게 문득 떠올라 이렇게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아.


여름색 짙은 강원도의 노을은 정말이지 근사하다.

도심에서 낮은 집에 사는 일은 노을을 노력해서 찾아가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이 집을 사랑하지만.


너의 답장은 7월이나 되어야 받을 수 있으려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예전처럼 자주 편지가 오가지는 못하지만 나에게도 우리의 편지가 무척이나 소중해. 옛날에 이메일 쓰던 시절도 생각나고 말이야. ㅋㅋㅋㅋ헤헤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 아참! 다음 편지엔 내가 요새 푹 빠져있는 구제숍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을게!!!


우리의 서른일곱, 너의 서른일곱의 일곱 번째 달은 어떨지 답장 기다릴게!!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과테말라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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