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행
중학교 때 이후로 나의 장래희망은 줄곧 특수교사였다.
흔하게 알려지지 않은 직업을 선택하게 된 3번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다.
그 3번의 만남이, 지금 내가 이런 모양의 특수교사로 살게 해 주었다.
1983년, 봄
토요일 오후 학교가 끝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친구들과 함께 집에 가는 길이다.
터질듯한 볼살과 빵빵한 뱃살 덕분에 감자라고 불리는 친구가 걸음을 멈춘다.
"도라야, 네가 짝꿍해, 내 생각에는 네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나?" 심장이 쿵.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감자가 나에게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이어서 한 마디 더 보탠다.
"너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감자는 내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못 돼먹은 아이는 아닐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학교에 한 친구가 전학을 왔는데 아무도 그 친구 옆에 앉으려고 하지 않아 짝꿍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침을 흘리고, 말도 제대로 못 할 뿐만 아니라 혼자 걷는 것도 힘들어 신발장은 붙잡고 서 있던 친구의 짝꿍이 되라는 말을 감자가 나에게 하고 있다.
친구들이 모두 놀라 구경만 하고 있을 때, 나는 먼저 다가가 인사를 했고, 전학생에게 말을 건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 내가 조금 친절했던 거 인정. 하지만, 그 친절이 짝꿍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어.'
감자에게 말도 못 하고 그저 운동장을 나란히 걷는다.
'이제 나는 어쩌지. 진짜 내가 짝꿍을 해야 하나?'
괜히 무거워진 나이다.
주말이 지나고 학교에 가면서 다짐한다.
'그래! 내가 하자! 선생님께 내가 전학생의 짝꿍이 되겠다고 말하자'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나에게 전학생의 짝꿍이 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그 친구는 특수학교로 전학을 갔다.
우리가 같은 반으로 지낸 날은 단 '하루'였다.
그때, 내 마음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남았다.
"그래! 내가 할게! 내가 짝꿍 할래!" 바로 말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부끄러움이 마음에 탁 걸렸다.
1985년, 여름
친구의 한옥집은 운치가 있다.
미음자 모양의 마당, 윤기 나는 대청마루를 따라 뛰다 보면 부모님의 서재라는 곳이 나온다.
부모님에게 책상이 있다는 것이 생소하다. 우리 집에 책상은 고등학교 다니는 언니 방에만 있다. 나에게는 밥상이 책상이고 책상이 밥상이다. 그런데, 엄마 아빠의 책상이 있고 그곳에서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는 친구의 이야기는 상상만으로도 부러운 그림이다.
이 집에는 나에게 없는 게 많다.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뒹굴뒹굴 땀을 식히는 맛이 최고다.
친구의 갸름한 얼굴에 양갈래로 땋은 검은 머리에는 윤기가 돈다. 푸석한 내 곱슬은 정말이지 싫다.
"너는 언니가 많아서 좋겠다. 나는 혼자라서 심심해."
"아오. 맨날 심부름에 말 안 들으면 때리고, 예쁜 새 옷도 못 입어."
친구가 입은 검정원피스의 카라에는 구멍이 송송 뚫린 레이스가 물결을 그리며 둘러져있다. 심지어 작지도 크지도 않고 소매 끝이 딱 맞는다.
"그래도 나는 언니가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그럼 바꾸자!"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진심이다.
"엄마랑 아빠는 언제 오셔? 나 이제 가야 할 것 같아."
"나 무서운데 조금 더 있다가 가면 안돼?"
"되지! 괜찮아."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가! 엄마 아빠 이제 곧 와"
어차피 엄마, 아빠는 늦으시고 지금 집에는 언니들만 있을 것이다. 집에 서둘러 갈 이유가 없다.
"그래. 근데 너희 엄마, 아빠한테 안 혼날까?"
"응, 괜찮아! 좋아하실 거야. 집에 데리고 온 친구는 네가 처음이거든."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노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 진짜?"
"응, 사실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어."
내 눈치를 살핀다. 새엄마? 아님 새아빠? 뭐지? 그런 사연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엄마, 아빠 두 분 다 듣지를 못하셔. 청각장애가 있어."
청각장애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듣지 못한다고? 그런데 얘를 어떻게 키우셨지?
기울어진 균형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면서 쪼그라진 마음이 살짝 펴진다.
"그렇구나, 그러면 너는 어떻게 말해?"
"수화나 입 모양을 보고도 아셔"
듣지 못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을 상상한다. 잠깐인데도 여러 곤란함이 떠오른다.
'괜찮을까? 내 친구?" 부러움이 동정으로 옮겨간다.
처음 만나는 청각장애사람이다. 긴장되고 무섭지만, 이제 와서 그냥 집에 간다고 할 수도 없다.
친구 부모님이 오셨다. 젊은 아저씨, 아줌마다. 마음씨 좋게 생긴 어른이다. 두 분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음~ 응, 응~~"소리를 내며 손으로 이야기를 나누신다.
"우리 딸이 친구를 데리고 왔어! 봐!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지? 애는 착해 보이네. 너무 좋다."
나는 왜 이 말이 들릴까? 손으로, 눈으로, 입술로, 볼로, 모든 것으로 말을 하신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깊이 보신다.
내 쪼그라진 마음도, 살짝 펴진 마음도 너무 작다. 나는 아직 애인가 봐.
그해 여름,
우리는 친구의 부모님이 일하시는 오스카극장에 거의 매일 갔고, 당시 상영하는 홍콩영화를 모조리 보았다. 공짜 영화를 보는 게 살짝 눈치가 보였지만, 극장 주인이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놓았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인사 한 번이면 극장 출입이 가능했던 그 시절 나는 재벌 3세의 절친이었다.
1990년, 봄
3월 2일, 새로운 반, 새로운 친구들이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반갑다고 두 손을 붙잡고 동동발을 굴린다. 어수선한 가운데 흔들리는 교실의 중심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남다른 친구가 눈에 들어온다.
사춘기의 오기인가? 아마 우리는 영원한 친구가 될 것 같다.
"안녕! 나 네가 좋은데, 나랑 친구 하자!"
무척 당황한 모양이다. 안경 뒤로 의아한 눈이 나를 본다.
'너는 내가 친구 하면 엄청 좋을 것이다. 어서 내 손을 잡아!'
이 친구를 만난 이후에, 나는 특수교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친구야, 내가 좋은 특수교사가 되어줄게!"
친구에게는 장애를 가진 동생이 있었다.
우리 곁을 떠난 지 1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동생의 전화 목소리가 생생하다.
"도라야, 어, 도라."
"언니라고 해야지!"
"도라언니, 어, 언니~"
매번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던 동생에게 "어서, 언니 바꿔~" 했다.
나보다 한 살이 어린 동생이었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동생도 사춘기가 왔을 것이고, 몸과 마음의 소용돌이 속에 외로웠을 테다.
그저, 나에게는 지적 수준이 어린 아기 같은 동생이었는데, 아니었다.
생활연령은 절대 무시될 수다 없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의미 없이 내 이름만 부르는 말들이지만, 그 몇 마디 말속에서 전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을 동생이다.
못해 준 것들이 많아 슬픈 게 아니라, 해준 게 없어 미안하다.
그저, 친구와 친구의 엄마에게 내가 좋은 특수교사가 되겠노라 다짐했던 마음으로 지금까지 왔다.
그 시절, 친구의 가족들에게 '좋은 특수교사'가 한 번도 없었기에,
'내가 하자. 나는 다른 특수교사가 되자.' 했다.
1990년, 봄부터 나는 계속 뛰어 여기에 왔다.
나는 아직 미완의 특수교사지만, 30년 절친과의 약속이행을 위해 늘 나를 돌아본다.
내가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아이들의 삶의 지속에 애정을 갖게 된 것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동생과 30년을 넘게 우정을 쌓고 있는 친구 덕분이다.
*나의 추억 속에는 늘 장애를 가진 당사자나, 그 가족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변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없을까? 영화나 드라마에도 당사자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아니면 등장 자체가 없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특수교육대상학생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들 대부분이 과밀학급이었다. 나의 첫 제자가 올해 38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치료실에 복지관에 갇혀 사는 내 제자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동네에서 활개 치며 살게 하고 싶다.
"우리 여기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