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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Feb 18. 2024

프롤로그

2023년 12월 26일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지금은  2024년을 닷새 남긴 2023년 12월 26일 새벽. 나는 직장인 4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나마 취미로 남겨둔 전공마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면서도 정작 미래에 대한 준비는 없다. 하루를 보내며 '이번 주말엔 어떤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던 나의 모습도 없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요즘 계정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SNS에 올라오는 성실한 사람들(소위말해 갓생러들)의 일상은 심히 비현실적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 자기 계발,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근길에 오르다니. 나에겐 출근 1시간 전 기상이 바로 미라클 모닝이다(출근이 9시라는 전제하에). 얼굴의 베갯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급히 고양이 세수를 한 뒤 선크림을 바르고,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돈하고 집을 나선다. 지하철의 유리창에 비친, 폐인과도 같은 나의 모습을 향해 물어본다. 도대체 그 삶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그것을 업으로 삼지 못하고 있다. 평범한 월급쟁이의 삶은 안정감을 보장해 주지만 안일함과 무기력함이 동반되는 부작용이 있다. 돈이 새어나가도 월급날은 돌아오고, 가끔은 정규직만큼 좋은 사회적 지위도 없다. 하지만 고정적인 수입은 절실함을 모르고, 명함이 나의 열정을 담아주지 못한다. 풍요 속의 빈곤,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던가.  아, 잠 못 드는 새벽 감성이란.

 

대학 졸업 후, 곧바로 귀국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오게 된 유학길인데. 그래도 '영국에서 일해 봤다.'라고 인생에 한 줄 남겨봐야 하지 않은가. 과히 거창하지만 갓 사회로 뛰어든 대학 졸업생에게는 아주 멋진 결심이었다. 운 좋게 교내 창업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비자를 지원받게 되었고, 나는 2년 간 영국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창업 자금 마련을 위해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 갈고닦은 영어를 내세워 통역과 번역을 했다. 간혹 급하게 현금이 필요할 땐 대학생 당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식당에 가서 서빙을 했다. 그러던 중, 한인 여행사 사장을 만나 투어 가이드로 취직이 되었다.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꽤 일정한 수입이 들어왔다. 유럽 여행객이 가장 많은 여름에 시작한 일이었던 만큼, 팔과 얼굴엔 주근깨가 생겼고 하얗던 피부는 까맣게 탔다. 간혹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을 상대해야 했고, 날씨, 공휴일, 보수공사 등 불가항력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크림과 땀방울로 범벅진 내 얼굴은 미소를 잃지 않았고, 나의 다리는 쉼 없이 움직였다.


'투어가이드'는 매번 설렘 가득한 여행객을 맞이하지만 감정의 기복을 감내해야 하는 직업이다. 언제나 완벽한 하루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행을 망치게 할 수 있는 요소는 너무 많다. 우선,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만나 타지에서 꼬박 8시간을 보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여행'이란 설레는 도전이고, 때론 소소한 사건들이 종일 웃음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별생각 없이 찍은 사진이 '인생샷'이 되거나, 우연히 시간이 맞아 근위병 교대식을 보게 되거나(사실 이건 요령이 있다), 거리의 버스킹이 현장의 감성과 맞아떨어지거나, 골목마다 숨겨져 있는 유명한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Banksy)의 작품,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진행되는 왕실의 행사, 세인트 제임스 공원(St. Jame's Park)에서 거대한 펠리컨을 보는! 여차저차 떠나기 전 손님들의 얼굴이 미소 짓고 있다면, 그날의 여행은 성공인 것 아닐까. 


런던 리젠트스트릿(Regent Street)

“일이 끝나면, 리젠트스트릿(Regent street)에서 피카딜리 서커쓰(Piccadilly Circus)까지 걸어가.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거지. "


여행사 과장님이 한 말이었다. 과장님은 종일 있던 투어를 마치고 혼자 걸었다.


"그곳을 걷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려."


리젠트스트릿, 피카딜리 서커쓰, 옥스퍼드 스트릿(Oxford Street). 이 세 구역은 영국의 압구정과 가로수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형 백화점부터 명품가게, 사무실, 마켓, 맛집이 즐비한 런던 시내 번화가다. 체력이 괜찮다면 도보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다. 19세기 건축물을 그대로 유지해 놓은 이 역사 깊은 거리는 세인트 패트릭(St.Patrick's Day), 부활절, 크리스마스, 신년(New Year's) 등 특별한 날마다 조명과 장식으로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온종일 관광객으로 붐비는 리젠트스트릿. 투어가 끝나는 오후 6시쯤에는 퇴근하는 직장인들까지 그 무리에 합세한다. 런던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주변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쇼핑을 하느라 서성일 것이다. 진정한 런더너(Londoner)들은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를 무단횡단한다. 거기에 자전거를 탄 사람들, 택시, 버스 등. 차도와 인도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이다.


복잡한 리젠트스트릿은 과장님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이었다. 하루 8시간 사람들을 인솔하던 투어가이드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위로를 받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 역시 리젠트스트릿을 걸으며 기분을 전환하곤 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그곳은 나의 꽃밭 같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근래 정원 가꾸기에 재미를 붙인 어머니가 발견한 사실이 있다. 동이 트기 전 새벽, 꽃 봉오리 앞에는 벌떼가 그득히 모여있다. 시간이 지나 햇빛을 받은 봉우리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면, 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속을 파고들어 꿀을 빨아먹고 간다는 것이다. 꽃은 완전히 피기도 전에 벌들의 방문에 힘이 빠져 시들해진다. 그래도 시들한 꽃들은 서로 합쳐 꽃밭을 만들고, 어머니의 정원은 보기에 참 좋다. 꽃의 입장에서는 서로 위로를 주고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꼴은 이래도 함께 꽃밭 속이라는 것, 그래도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어낸다는 것. 


나는 투어가 끝나면 시들해진 몸을 끌고 꽃밭을 찾아가 위로를 받았다. 오후 6시 리젠트스트릿. 지친 얼굴의 런던 직장인들 틈을 걸으며,


"잘했어.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그렇게 나만의 정원을 만들어갔다. 투어가 끝난 뒤에 남는 여운이 때론 섭섭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검정 택시, 빨간 버스, 기마병, 해리포터가 순간이동을 하던 전화박스, 여왕이 살고 있다는(지금은 왕이 살고 있지만) 버킹엄 궁전까지! 당시 나에겐 사람과 비둘기로 득실대던 일상의 거리가 여행객의 눈과 귀에게 감동을 주고 있었다. 나는 그럴 때면 


나름 치열하게 보낸 영국 생활을 뒤로하고 무려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주근깨 생길 걱정 없이!) 근무하는 나는 자꾸만 그때가 그리워지곤 했다. 외부 요인(코로나19)으로 인해 1년도 채 되지 않아 관두었지만 2019년, 그해 런던의 여름은 나에게 땀과 주근깨로 가득한 추억을 남겨주었다. 그래도 최소 주 4회 런던 여행을 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 지구가 생겨난 이후로 똑같은 날씨가 단 하루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매번 같은 동선에, 늘 반복되는 일상이라 여겼지만 런던 워킹 투어가이드는 매일 새로운 여행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 새로움은 물론, 변덕스러운 날씨 덕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료 가이드 중 한 분은 나에게,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여행."이며, "그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직업은 가이드."라고 했다. 런던 시내를 누비던 평범한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준 건, 바로 '내가 만난 사람들'이었다. 


20대에 퇴직 여행을 하고, 처음 만난 사람과 배낭여행을 하고, 신혼여행을 하고, 이별 여행을 하고, 가족 여행을 하는. 각자의 목적과 사연으로 런던을 방문한 100여 명의 사람들은 37번의 투어로 나와주었고, 나는 그들의 인생의 한 편을 엿볼 수 있었다. 공적으로 공유되는 지극히 사적인 삶의 이야기였다. 내가 일했던 여행사에서는 여행객을 '손님'이라고 칭했다. '고객(顧客)'과는 다르게 머물다 떠나는 의미가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마주할 일 없을 손님들은 (사람일은 모르는 거지만) 거리낌 없이 나에게 속마음을 열어보였다.


한참을 사색에 잠겨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3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채워 전원을 켰다. 부르르 부르르. 물을 끓이는 기계음이 났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손님들의 여행의 한 페이지를 채워주는 게 가이드의 역할이라 여겼는데, 어쩌면 내가 그 여행에 초대된 손님이었을지도. 잠시 그들의 사연에 이입하여, 그들의 시선을 빌려 떠났던 여행의 순간을 다시 마주해 보기 위해 기억을 뒤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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