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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Mar 10. 2024

해피 가이드님

여기서 뭐 하세요?

새롭고 낯설었던 일이 편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투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점점 나 자신을 '프로페셔널'한 가이드로 보기 시작했다. 나의 설명이 끝난 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손님들의 얼굴을 보자면! 아, 그만큼 보람찬 순간이 또 있을까.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나의 해설은 손님들에게 영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는 게 분명했다. 나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걸작(다른 말로 '인생샷')도 빼놓을 수 없었다. 손님들의 후기가 이를 증명했다.

가이드님의 해박한 설명에 정말 재미있는 투어였어요.
가이드님 덕분에 인생 사진 건졌어요!

어느 순간부터 초보 가이드 시절의 긴장감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이제는 처음 본 손님들과의 대화를 물 흐르듯 이어갈 수 있었고, 관광지에 대한 설명은 반사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거기에 뛰어난 사진 실력은 덤. 나는 마침내 완벽한 가이드의 탈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이드님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세요?"


엄연히 투어를 진행하고 있는 가이드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의아하겠지만 상당히 자주 받았던 질문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바늘에 콕 찔린 듯 당황하여 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갓 대학생 신분을 탈피한 청년에게는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지난 여행에서도 퇴직을 한 20대를 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 (자칭) '프로페셔널 가이드'였던 나의 뒷덜미엔 식은땀이 났고, 두 눈은 지진이 난 듯 마구 흔들렸다. 행여 나의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은 아닐까,


'이건 저의 진짜 모습이 아니에요!'


'투어 가이드'는 잠시 생계를 위해 빌린 옷과 같았다. 그렇다고 원치 않는 아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현실을 직면하는 순간이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변장을 하더라도 완벽하길 바랐다. 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할 줄 아는 일' 하나쯤 가지고 싶은, 그런 욕심이었다. 훗날 먹고 살 방법에 대한 선택지를 만들어 놓으려는 마음이랄까. 일종의 안전망을 설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웬걸, 손님들은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렇다. 나는 해피가이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가이드 활동을 하기 전, 마지막 참관을 하는 날이었다. 이전에 언급했듯, 다른 선배 가이드의 투어를 보며 현장 분위기를 익히는 것이다. (혹시라도 워킹투어 중 혼자 온 여행객이 동행한다면, 또 가이드가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가이드 지망생일 것이다.) 나는 가장 먼저 만남의 장소에 도착했다. 이윽고 나타난 해피 가이드.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환한 웃음을 따라 자리 잡은 팔자 주름이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인사하며 내게 다가왔다.


"오늘 참관하러 왔죠? 일찍 왔네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유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는 이따 소개할 테지만, 해피 가이드랍니다."


그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입과 코를 감쌌다. 코를 많이 훌쩍이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눈과 귀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전날 슬픔에 잠겨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건 고초열(hay fever)이었다. 


고초열(hay fever)은 3월에서 9월 사이, 특정 식물의 꽃가루 날림으로 인한 알레르기 반응이다. 콧물과 재채기에, 눈이 붓고 가렵고, 두통과 미열이 있을 수 있다. 후각이 저하되고 피로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마다 면역체계가 상이하기 때문에 반응시기와 증상도 제각각이다. 옛 영국에서는, 실내 생활이 잦아 대체로 면역력이 약한 귀족들이 고초열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의 서민들은 고초열 증상을 '귀족의 상징'으로 부러워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가이드님 몸이 안 좋으신 듯한데, 괜찮으세요?" 나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네. 이맘때면 늘 이래요. 그렇지만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그때까지 그녀의 웃음이 담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조금 뒤에 손님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나는 그럴수록 활력이 넘치는 그녀를 발견했다. 정말 말이 안 되지만, 투어를 시작할 때 즈음 그녀는 꺼내든 손수건이 무색할 만큼 멀쩡한 상태로 변해있었다. 처음 인사를 나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지난밤 숙면을 취한 듯 생기 가득한 모습의 그녀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투어를 맡은 해피 가이드입니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떠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눈동자, 밝은 미소, 그리고 재치 있는 입담에 우리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자, 그럼 길을 건너서 웨스트민스터 궁(Palace of Westminster, House of Parliament)을 감상해 볼까요?"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보행 신호를 기다리는 우리 옆으로 한 영국인이 대뜸 무단횡단을 하며 지나갔다. (영국을 여행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영국인들의 무단횡단은 습관적이다.) 이를 본 해피가이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영국인들은 무단횡단을 정말 많이 한답니다.

하지만! 저희는 동방예의지국, 한국의 국민으로서 보행 신호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호호호 “


웨스트민스터 궁(Palace of Westminster)은 13세기부터 지금까지 영국의 국회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오늘날엔 'House of Parilament - (영국의) 국회의사당'(으)로 불려지고 있다. 영국의 의회는 상원의원(귀족, House of Lords)과 하원의원(House of Commons)으로 나누어진다. 예로부터 영국에서는 귀족은 빨간색, 일반인을 초록색으로 구분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 웨스트민스터 궁을 향하는 다리의 색상을 들 수 있다. 귀족인 상원의원들은 빨간색인 램버스 다리(Lambeth Bridge)를, 하원의원들은 초록색인 웨스트민스터 다리(Westminster Bridge)를 통해 국회의사당을 출입했다고 한다.
초록색의 웨스트민스터 다리(Westminster Bridge)에서 본 웨스트민스터 궁(House of Pariliament, Palace of Westminster)
웨스트민스터 다리 건너편에 보이는 빨간색의 램버스 다리(Lambeth Bridge).

해피가이드의 투어는 유익함과 재미로 가득했다. 영국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세인트제임스공원(St.Jame's Park)에 숨겨진 故다이애나 비(Princess Diana)의 사연, 찰스 왕자(Prince Charles, 지금은 왕이 되었지만)의 러브 스토리, 웨스트민스터 공(Sir Westminster)과 코코샤넬(Coco Chanel)의 스캔들까지. 그녀는 먼 나라처럼 느껴질 영국을 친근한 이웃나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홀린 듯 그녀를 따랐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해피가이드님, 정말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계시네요."

"아줌마 되어보세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남 이야기예요! 호호호"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버킹엄 궁(Buckingham Palace)에 도착했다. 우리는 근위병 교대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갔다.


"여기서 잠깐 기념사진 남기고 이동할게요!" 해피가이드님은 차례대로 손님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버킹엄궁전(Buckingham Palace). 사진과 같이 궁의 지붕에 영국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면 여왕/왕이 행차했다는 뜻이다.

"사진 안 찍으세요?" 순서를 기다리던 손님이 내게 물었다.

"아, 네. 사실 저도 가이드인데요, 오늘은 현장 참관을 위해 왔어요."

"그렇군요! 원래는 무슨 일 하시는데요?"

"아, 그게..."

"오! 저기 보세요!"

답을 고민하던 차에 근위병 교대식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근위병은 영국 내 주요 궁전 및 왕실의 주거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과 윈저 성(Windsor Castle)에서 특별히 병사들의 교대식이 진행된다. 교대식은 군악대의 연주를 시작으로, 근무를 위해 새로 들어오는 근위병(New guard)과 근무를 마친 근위병(Old guard)의 교대와 행진으로 마무리된다.  
근무를 위해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으로 들어가는 근위병의 모습.
군악대의 행진.

돈벌이, 명예와 사명감, 행복 등등. 제각각의 이유로 군화를 신고 행진에 나섰을 병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정복 속에 감춰진 근위병들의 진짜 모습은 어떨까? 저들 중 누군가는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 그를 보며 "여기서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난감해하며 그런 질문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을 자신의 동료를 떠올릴 것이다. 해피가이드처럼, 타고나길 정복에 맞춰진 그런 사람. 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와 나는 걸음부터 달랐다. 영국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빨간색과 초록색 다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겨우 옆사람과 발맞춰 초록 다리 위에 올라서는 나를 뒤로하고 그녀는 자신 있게 빨간 다리 위를 거닐고 있겠지.


투어가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손님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유수 씨, 시간 괜찮으면 같이 식사할래요?"

 

우리는 카페로 들어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고  연신 기침을 하였다. 보아하니 한 순간에 다시 콧물이 나고 눈이 부어올랐다.

"몸이 다시 안 좋으세요?"

"네, 그렇네요."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그녀는 따뜻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희한하죠?" 그녀가 물었다.

"네?"

"저는 몸이 아프다가도, 투어를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해요.

그러다 일이 끝나면 곧바로 앓아눕죠."


 나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럴 수가 있나요?" 

"네. 그렇더라고요."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 몸도 그걸 아나 봐요. 제가 즐기고 있는 순간엔 아프고 싶지 않다는 걸요."

"가이드님은 일이 즐거우시군요."

그녀는 나와 눈을 맞추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저는 이게 천직이에요."라고 말했다.


"천직이요?"

"네. 저는 타고났어요. 완전 무대체질이거든요. 사람들 앞에서 웃고 떠드는 걸 정말 좋아해요."


"아...!" 그녀의 말에 하루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저는 일할 때가 쉬는 거예요." 그녀는 웃으며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의 테이블에는 휴지가 잔뜩 남아있었다. 해피가이드님은 멋쩍은 듯이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미안해요. 콧물이 너무 많이 나서.... 하하하"

"괜찮습니다. 그런데, 눈이 아침보다 더 발갛게 부어오른 것 같아요."


"아, 약을 먹으면 너무 졸려서 투어를 그냥 나갔더니, 이제 몸에서 반응이 오나보네요." 

그녀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제 약 먹었으니 집에 가서 뻗으면 되겠어요. 하하하"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역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뜨거웠던 오늘 하루에 아쉬움이 남는지, 해는 마지막까지 붉은 석양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날 불타는 열정을 보여준 해피가이드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유수 씨."

"아니에요. 푹 쉬시고 몸조리 잘하세요."


"오늘 했던 투어를 떠올리면서 잠에 들면 금방 나아요."

"저는 집에 가면 그저 딴짓하기 바쁜데, 가이드님은 직업정신이 정말 대단하세요."


나의 말을 들은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 입장일지 모르겠지만,

살다 보니 그런 일을 만나더라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멈추지 못하고, 그 힘듦마저 즐기며 하게 되는 그런 일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이 내 마음에 쏙 드는 거예요.

저에겐 그런 일이 '가이드'에요.


유수 씨도 꼭 그 '일'을 찾게 될 거예요."


어느 한가로운 오후, 나의 아버지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바꿈으로써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지."


나는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영국의 특별할 것 없는 어떤 여름날. 나는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가이드 깃발을 높이 든 채, 손님들을 맞이했다. 우리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투어를 이어갔다. 근위병 교대식까지 명당에서 관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 손님이 내게 묻는 것이다.


"가이드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여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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