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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Mar 03. 2024

어느 20대의 퇴직 기념 여행

Musical

7월의 끝자락, 1년 중 날씨가 가장 좋은 시기였다. 영국의 날씨는 소문대로 변화무쌍했다. 비가 오는 건 일상이었고, 마른하늘에 때아닌 우박이 내린 적도 있었다. 런던의 거리를 걷다 보면 비바람을 종종 겪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우산을 꺼내기보다, 재킷을 여미고 그저 갈 길을 간다. 그렇다. 진정한 런더너들은 비를 맞고 다닌다! 거센 바람에 우산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항상 날씨가 흐린 것은 아니다. 나의 두 뺨과 팔에 자글자글한 주근깨가 증명하듯, 영국의 햇빛은 정말 강렬했다. 하지만 경험상 터득한 '3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와 내 친구들이 타지 생활에 적응하며 알게 된 사실은, 영국에서는 3일 이상 해가 쨍쨍한 날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걸 '3의 법칙'이라 부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여름은 이런 화창한 날이 1년 중 가장 많은 계절이었다. 그날도 날씨가 참 좋았다.


가이드로 일을 시작한 지 2개월이 지났다. 업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여유롭게 웨스트민스터 역 3번 출구에 서 있었다. 오늘은 근위병 교대식이 없는 화요일. (근위병 교대식은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진행된다) 교대식이 없는 날에는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대체재를 찾았다. 예를 들면 세인트제임스 공원(St.Jame's Park)에서 흑조와 펠리컨을 보러 간다던지,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에서 자유시간을 오래 갖는다던지. 하지만 이 모든 건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근위병 교대식이 있더라도 비가 내린다면 누구든 당장 실내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여하튼 이번 투어는 날씨가 도와주고 있으니 마음이 가벼웠다.


곧이어 손님들이 도착했다. 인원은 총 5명으로, 두 쌍의 부부와 한 청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이드 유수입니다.

아쉽게도 오늘은 근위병 교대식이 없지만, 이렇게 런던이 화창한 날도 꽤 특별하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해가 나온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보아하니 청년 손님은 '나 홀로 여행객'이었다. 그간의 투어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홀로 유럽 여행을 온 손님을 만난 적은 있었지만, 그들은 대개 인터넷 카페나 게스트하우스에서 동행인을 구해 함께 투어에 참여했다. (솔직히 처음엔 약간의 문화충격을 받았다. 정말 낭만적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나 홀로 여행객'이 정말로 혼자인 경우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온전한 '혼자'인 손님을 인솔해야 했다. 혹시라도 소외감을 느낄까, 눈길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가이드와 잠시 떨어져 있는 자유시간에는 더욱 신경이 쓰였다. 사건의 시작은 '사진 찍기'였다.


우리는 역 밖으로 나와 웨스트민스터 브리지(Westminster Bridge) 위로 올라갔다. 잠시 경치를 감상한 뒤, 런던아이(London eye) 앞에서 10분간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자유시간의 대부분은 사진 촬영에 할애된다. 서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부부들 사이, 청년이 셀카봉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간 연습했던 '인생샷'각도를 선보였다. 다리가 길어 보이는 구도에 포즈까지. 빨간 버스가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알고 보면 나의 가이드 후기는 사진실력에 대한 칭찬이 주를 이뤘고,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뿌듯했다. (아직까진 한 분야에서라도 그 얄미운 사수를 이기고 싶었다) 이후 글에서 다루겠지만, 나에게 사진을 찍는 요령을 알려준 해피 가이드님 덕분이었다. 그녀는 손님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곤 했다.


"여러분, 가이드의 또 다른 직업은 사진작가랍니다!"


"가이드님, 저희도 찍어주실 수 있나요?"

"네 그럼요!"


자연스레 두 부부 손님도 사진을 요청하며 다가왔다. 덕분에 첫 만남의 어색함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우린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었고,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물론, 가이드는 사진작가였다. 나는 피사체가 되는 걸 선호하지 않았을뿐더러, 가이드가 투어 중에 기념사진을 남긴다는 게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비로소 모두가 긴장이 풀린 편안한 분위기를 취할 수 있었고, 청년 손님에 대한 나의 걱정도 점차 줄어들었다.  


"저희는 은퇴하고 유럽을 돌고 있어요."

"와, 정말 멋지세요! 저희는 신혼여행으로 왔어요."

두 부부가 서로 주고받은 시선에 공감이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끈끈한 '무엇'이 있는 듯했다. 미혼의 20대는 알지 못할 '어른의 삶'이라고나 할까.


"저는 퇴직 기념 여행을 하고 있어요."

혼자인 청년이 외로울 것이라는 나의 우려였을까, 아니면 20대로 추정되는 앳된 얼굴과 '퇴직'의 이색적인 조합 때문이었을까. 괜스레 청년의 사연에 호응이 부족한 것 같았다.


"퇴직 축하드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의 말에 청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마워요. 누군가에게는 꼭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공감'이 아니라, 혹여 있을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입을 연 것뿐이었다. 퇴직을 하고 여행을 오다니, 미래에 대한 계획은? 설마 여행의 목적이 무책임 혹은 탕진인가?


"이것 좀 보실래요?"

청년이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네 번째 손가락인 약지에 커다란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엄청 큰 반지네요. 의미가 있는 건가요?"

"네. 제가 스스로에게 주는 퇴직 기념 선물이에요." 그가 말했다.

"한 3년 일했을 거예요. 그 시간을 증명할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큰 마음먹고 퇴직금을 탈탈 털어 마련했죠. 그런데 여행을 오고 보니 살짝 후회가 돼요."


"후회요?" 내가 물었다. 질문을 하면서도 답을 알 것 같았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무모한 투자는...


"네. 그냥 여행에 전부 다 투자할걸 그랬어요."


청년은 런던의 모든 걸 느끼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한 마리의 토끼가 된 듯, 그는 주변 모든 경치와 소리를 눈과 귀에 담았다. 흘러가는 바람이라도 놓칠세라 코로 크게 심호흡하며 집중했다. "후-하-!"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누군가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세상에, 이 다람쥐 좀 보세요!"

세인트제임스 공원에서 한 가족이 다람쥐를 만난 모습

세인트제임스 공원에 들어서자, 청년은 더욱 활기를 되찾았다. 새들은 청년을 위해 노래했고, 구름은 잠시 햇빛을 피할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살랑이는 바람은 그의 땀방울을 말리는데 제격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지쳐간 발은 잔디밭을 밟으며 피로를 풀었다. 우뚝 선 고목나무는 공원의 고요함을 지켜주었다. 도시의 복잡한 거리에서 벗어나 만끽하는 자연은 그야말로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세인트제임스 공원(St. Jame's Park)은 영국 왕실 소유의 공원으로, 왕실 주재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세 개의 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중 버킹엄 궁(Buckingham Palace)에서는 근위병 교대식을 감상할 수 있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영국의 조경과 더불어 백조, 흑조, 거위, 오리, 펠리컨 등이 방목되고 있다.
세인트 제임스 공원의 연못

"믿을 수가 없어요. 지금 어떤 비밀의 숲에 들어온 것만 같아요." 

청년은 최대한 보폭을 줄여가며 공원을 거닐었다. 그는 가끔 멈춰 서서 경치를 감상하곤 했다. 후-하. 그의 깊은 심호흡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공원의 끝이 다가올수록 그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나는 그를 위해 시간이 잠시 멈춰주길 바랐다.


"오늘 투어는 여기까지입니다."


나는 웃는 얼굴의 손님들을 배웅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동시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점심시간이었다. 날씨도 좋으니 공원의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그때,


"가이드님! 잠시만요."


뒤를 돌아보니 청년 손님이 서 있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혹시 점심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패키지가 아닌 당일 투어의 경우, 손님들은 대개 가이드와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가끔 식사를 권하는 손님도 있었지만, 민폐가 될 듯하여 거절했다. 하지만 당시 이런 질문이 처음이었던 나는 어찌할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아, 그게..."

"제가 혼자 먹기 싫어서 그래요. 부탁드립니다!"


점심으로 싸 온 샌드위치가 가방 안에서 눅눅해져 갔지만, 타지에서 외롭게 끼니를 해결할 청년을 두고 차마 그 결심을 내릴 수 없었다.  우린 함께 길을 나섰다. 나는 그를 채링 크로스 역(Charing Cross Station)으로 인도했다. 식당과 카페가 많은 번화가였다. 마침 집 근처로 바로 가는 기차가 다니기도 했지만, 그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식사 후에 나는 곧바로 귀가를, 그는 근처의 소호(Soho), 차이나타운(China Town), 그리고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을 방문하며 관광을 이어갈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지금 이거 꿈 아니죠?

정말 한 편의 뮤지컬 같아요."


청년이 갑자기 멈춰 섰다. 우리 앞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리의 음악가가 있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바이올린의 선율은 제 박자를 유지하며 울려 퍼졌다. 바람이 가로수의 나뭇잎을 흔들며 공연에 참여했다. 청년은 눈을 감았다. 도시의 소음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동차의 경적음, 교통경찰의 호루라기, 여기저기 들리는 대화들, 시멘트 바닥 위를 구르는 자전거 바퀴 소리. 따릉-! 청년은 눈을 뜨고 자전거를 위해 한걸음 물러났다. 연주가 마무리 되었고, 우린 박수로 화답했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바이올린 위에 올려져 있었다.


"뮤지컬 좋아하시면 런던 오신 김에 관람해 보세요."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런던의 웨스트엔드(West End)는 런던의 서쪽과 탬즈강의 북쪽을 지칭하는 지명이다.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y Circus)부터 채링크로스 (Charing Cross) 역까지 이르는 이곳은 런던 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겠다. 1663년 개관한 Theatre Royal Drury Lane 극장을 시작으로, 웨스트엔드에는 39개의 극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까지 약 350년간의 문화 예술을 이어오고 있다. 참고로 당일 예매의 경우, 일반 시중가보다 조금 더 저렴하게 관람권을 구입해 공연을 즐길 수 있다.
런던 웨스트엔드 거리. 극장마다 공연을 홍보하는 간판이 보인다


나의 말을 가만히 듣던 청년이 내게 물었다.


"그럼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뮤지컬 보실래요? 티켓은 제가 살게요."


집으로 가는 기차 안, 나는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뮤지컬을 보러 가지 않았다. 식사 후,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뒤돌아 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청년의 말대로 그날은 정말 한 편의 뮤지컬 같았다. 첫 만남을 시작으로 세인트 제임스 공원과 거리의 버스킹까지. 환상적인 1막이었다. 곧이어 있을 2막은 '진짜' 공연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다음으로 미루어야만 했다.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나의 시선은 청년과 같은 곳이 아닌, 부부들 사이 행여 고적할 그의 뒤통수를 향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의 약지에 끼워진 '퇴직 기념 반지'를 보며 과한 사치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책임'과 '탕진'이라 여겼던 청년의 여행은 되려 주변 곳곳에 살아 숨 쉬는 아름다움을 알아채는 순간들로 가득했다. 감동은 전부 '그의 것'이었고, 나는 그것을 잠깐이나마 엿보았을 뿐이었다. 커튼이 올라가고 불빛이 내린 무대 위,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나를 떠나갔다. 나는 열차의 창 밖으로 스치듯 보이는 도시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의 뮤지컬은 다음에."


런던 웨스트엔드에는 약 39개의 극장이 있다. 극장마다 하루에 한 번씩 공연이 열린다고 해도, 한 달이면 1,170번, 1년엔 1만 4천 번이 넘는다. 당일 관람권을 구매하거나, 미리 표를 예매해서 볼 수 있는 공연은 차고 넘쳤다. 그저 중요한 건 나의 선택이었다. 언제든지, 몇 번이고 올라갈 제1막을 기대하며, 청년의 아름다울 인생 2막을 응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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