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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Mar 17. 2024

세 자릿수 뺄셈

꼬마손님의 인생강의 

"이러는 거, 조금 촌스럽죠?"


 투어 중 손님들은 내게 어떤 평가를 바라기도 했다. 나는 그럴때마다 조금은 난감했다. 무슨 기준으로 '촌스럽다'는 걸 가늠해야 하는지. 투어를 진행하며 만난 모든 손님들은 여행에 대한 각자만의 방법이 있었다. 딱히 유행이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걸 예로 들어보자. 나는 그간 만난 손님들을 통해 사진을 위한 다양한 소품들을 알게 되었다. 인형, 캐리커쳐, 커플티, 커플 모자, 머리띠, 프레임 등등. 가끔 손님들의 포즈와 사진 구도를 참고하기도 했다. 결국 여행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주관적인 추억인 것이다.


"아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저 여행을 즐기시는 건데요."

나는 늘 같은 대답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죠?"

"저희 여행 온 거 너무 티 나죠?"


이런 경우도 있었다. 여행도 여행이지만 투어까지 신청해 놓고 '티'가 나는 게 걱정이라고? 이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다수의 집단이 만들어놓은 규칙과 문화를 모르는 일은 왜인지 모르게 창피하게 다가온다. 단순 투어뿐만 아니라, 낯선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는 것조차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혹여나의 행동이 폐가 되진 않을까, 하는 조심성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은 최대한 그 다수를 따르려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입국한 지 채 10시간이 되지 않은 여행객이 그곳의 생활을 전부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이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당연한 이 상황을 신경 쓰고, 또 신경 쓴다. 부딪히기보단, 최대한 피하고 묻어가기를 택하면서. 사회적 체면. 이게 진짜 문제일 수도 있다.


유학을 위해 처음 영국에 입국할 당시, 내가 아는 영국은 영화 <해리포터>와 <노팅힐>이 전부였다. 지하철 역에 그렇게 많은 계단이 있고, 오래된 역사를 증명할 만큼의 먼지가 들끓을 줄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서울의 지하철을 생각했다가 몸집만 한 캐리어를 끌고 열차를 타려고 한 건 정말 큰 오산이었다. 다음 날 하루종일 근육통에 시달렸다! 또, 자동차 운전대의 위치가 오른쪽에 있고, 좌측통행을 우선으로 한다는 걸 알지 못해 "쏘리"를 한동안 입에 달고 지냈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와 통행 방향이 정반대라는 것인데, 길을 건너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본능적으로 오른쪽으로 걸었다가 반대편의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처음 캐리어를 끌고 다닌 지하철 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대기 중인 버스의 문을 두드렸다고 기사에게 한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가끔 배차간격을 맞추기 위해 버스가 정류장에 잠시 정차하는 경우가 있는데, 기사는 안전상의 이유로 버스의 문을 열지 않는다. 이를 무시하고 문을 두드리는 건 영국에서 굉장히 무례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 외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문화적, 사회적 관행들이 존재한다. '적응해 가는 수밖에.' 사실 말이 쉽지, 매번 수치스러움을 맞서야 하는 불편한 일이다. 눈치껏 스며드는 것. 그게 가장 좋은 작전일지도 모른다.


한 가족과 배낭여행 중인 것으로 보이는 두 대학생을 손님으로 맞이한 적이 있었다. 대학생 손님들은 '요즘 세대'답게 여행 전 각종 사이트와 블로그를 통해 철저한 준비를 해온 듯했다. 평이 좋은 한인 게스트 하우스에 숙박하며 끼니를 해결하고, (런던의 한인 민박 중에는 조식이나 석식을 한식으로 제공해 주는 곳이 있다.) 런던의 맛집 리스트(이건 나도 참고가 되었다!), 교통카드까지 구비해 온 것이다. 


런던의 대중교통으로는 지하철, 트램, 기차, 버스 등이 있는데,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내 통용되는 교통카드(오이스터 카드, Oyster Card)를 발급받아야 한다. 오이스터 카드는 충전형(Pay-as-you-go), 무제한 이용권(Travel Card) 등 이용 횟수에 따라 계획적으로 구매와 사용이 가능하다. 참고로 연령대, 이용 횟수, 사용기간 등에 따른 할인을 적용받을 수도 있다.


"엄마! 저 기념품 사요!" 가족 단위의 손님 중, 아이가 기념품 매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웨스트미스터 다리 위 기념품 매대. 놀랍게도 당시 시간은 오전 11시경이었다.


"엄마, 저 기념품 살래요."

"아니야, 저런 기념품은 사람들이 잘 안 사.

그렇죠 가이드님?"

아이의 어머니가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네네! 그렇죠. 너무 흔하긴 하죠? 하하하"


가족 여행을 온 손님은 총 3명이었다. 10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꼬마손님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관심을 가질만한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았다.


"헬로~"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아이가 씩 웃으며 인사했다.

"Hi! How are you?"

"아앗, 쏘리! 쏘리!"

반갑게 화답하는 외국인에게 부모는 당황한 듯 연신 사과를 하며 아이를 잡아끌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아버지의 한숨이 공기 중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네, 그럼 저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쪽으로 이동해 볼게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

"저기요! 가이드 선생님!"

나의 설명 중에 꼬마손님이 큰 소리를 나를 불렀다. 아이의 엄마는 화들짝 놀라 아이의 입을 막으며 내게 말했다.


"죄송해요, 가이드님. 저희 아이가 장난치는 걸 너무 좋아해서...

너무 신난 나머지...."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와 불안한 표정.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일종의 사명감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르겠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나라에 도착해 낯선 환경을 보게 되는 경험에 신나지 않을 어린이가 있을까. 모든 것이 신기할 아이의 시선을 집중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직 세인트제임스 공원의 다람쥐를 보러 가기엔 30분 정도가 더 남았는데.... 근위병 교대식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런데,


"와! 저기 보세요!"

우리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 앞에 도착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1066년부터 대관식이 거행되던 영국의 교회이다. 사원에서는 대관식뿐만 아니라 왕실의 장례식, 결혼식 등을 진행하기도 한다. 사원에는 약 3천3백 명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는데, 왕족과 유명인사가 주를 이룬다. 왕족의 경우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다이애나비, 빅토리아 여왕 등, 유명인사로는 제인 오스틴, 찰스 다윈, 셰익스피어 등이 기념되어 있다.
웨스트미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참고로 사진에 나온 부분은 후문이다.


마침 그곳에서는 왕실의 장례식으로 보이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 역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꼬마손님의 호기심을 잡아둘 무언가를 찾았다! 우리는 짬을 내어 식을 마저 구경하기로 했다. 사원의 후문에서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경호원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귀에는 와이어로 된 무전장치를 꽂은. 다 같이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이 신기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얘, 너 뭐 하니?" 대학생 손님이 꼬마손님에게 물었다. 

아이는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개미를 막대기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아잇! 너 그러면 안돼!"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치며 아이의 행동을 제지했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나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꼬마손님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혹시 잘 안 보여요?"

꼬마손님은 나를 보더니 이때다 싶어 씩 웃으며 말했다.

"세 자릿수 뺄셈."


"응?" 이게 무슨 말이지?


나의 동그래진 눈을 바라보며 아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세 자릿수 뺄셈을 하려면, 숫자를 세로로 놓아야 해요.

가로로 되어있으면, 앞에 있는 숫자가 위로 가게!

그리고 뒤부터 빼기를 해야 해요."


"오호... 그렇구나."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아이의 어머니가 내게 와 말했다. 

"아이고, 죄송해요. 애가 최근에 수학시간에 배운 걸 말하고 싶었나 봐요."


그 순간, 나는 무언가 깨달았다. 

"아하, 괜찮습니다!"


꼬마손님은 관광을 마다하고 나에게 초등수학 수업을 했다. 그것은 한 자릿수 덧셈과 뺄셈을 시작으로 두 자리, 그리고 세 자릿수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과정이었다.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설명을 하는 아이의 얼굴이 정말 귀여웠다. 투어 중 이것저것 알려주는 가이드를 보며 자신도 똑같이 아는 것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수업이 계속되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꼬마손님의 진도는 한 자릿수 곱셈까지였다. 


"그럼 투어를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꼬마손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나 도착한 세인트제임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어 다람쥐를 쫓아다녔다. 근위병 교대식 중에는 기마병에게 인사를 하려고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살짝 곤란했지만, 주변 관광객들도 함께 웃어넘기는 유쾌한 상황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이가 그저 조금 신이 나서 일어난 작은 사건들이었다. 오히려 나를 포함한 어른들의 걱정이 유난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가끔 그날의 투어를 떠올리며 꼬마손님의 순수함과 용기를 떠올렸다. 누가 뭐래도 나의 전부인 세 자릿수 뺄셈을 당당하게 내 보이는 것. 그건 창피해하거나 조심스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어떤 문제가 나올지언정 (심지어 두 자릿수 곱셈일지라도) 온몸으로 부딪혀 보는 것이다. 슬쩍 둘러본 기념품 매대에 걸린 열쇠고리가 마음에 쏙 들지도,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건넨 인사가 뜻밖의 인연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여행의 묘미는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체면보다는 마음에 충실해보자. 그전 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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