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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Mar 31. 2024

다 아는 건 아니구나?

환상

집 밖에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가게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다 문득, 어깨에 들려진 에코백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에서 사 온 단트서점(Daunt Books)의 에코백이었다. 흔치 않은 직사각형의 모양에, 한쪽 면을 전부 덮은 은빛 프린트. 책이 잔뜩 쌓인 서점의 입구를 그린 것이었다. 학과 후드티 외에 영국을 추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념품 중 하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나를 잘 챙겨주던 선배 가이드의 말이 생각났다. 


선배는 "여행은 현실이 아닌 환상을 보러 오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말이야, " 그가 말했다. 

"그저 사람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여행을 오는 게 아니야. 

자신들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러 오는 거지." 


그는 덧붙여 이 '환상'을 지켜주는 게 가이드의 역할이라고 했다. 손님들을 맞이하고, 관광지를 설명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 '런더너'라는 환상을 유지시켜줘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는 비가 오는 날에 절대 우산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우산을 권하더라도, 그는 씩 웃으며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런더너잖아요."


런던에 사는 사람. 런던의 모든 환경에 익숙해져 그 지역 자체가 된 사람, 런더너(Londoner). 진정한 런더너의 모습은 어떨까? 우선 내가 생각하는 런더너는 이렇다. 


1. 트렌치코트를 입는다. - 바람, 비, 그리고 적당히 낮은 기온에 아주 적합하다.  


2. 운동화보다는 가죽부츠를 신는다. - 비가 오면 운동화가 젖기 때문이다. 


3. 스카프를 두른다. - 바람이 많이 분다.


4. 지퍼가 달린 가방을 들고 다니고, 길에서 되도록이면 통화를 하지 않는다. - 소매치기가 많다. 


5. 무단횡단을 정말 많이 한다.


6. 자전거를 탄다. 


7. 우산을 소지하지 않는다. - 비가 와도 그저 갈길을 간다. (금방 그치기 때문)


8. 펍(pub)을 사랑한다. 

- 영국은 유럽 내에서 두 번째로 맥주 소비량이 많은 국가이다. 주말이면 가족끼리 펍에 가서 어른은 맥주, 아이는 주스를 마시는 게 일상이다.

 

9. 축구를 더 사랑한다. 

- 영국에서 부동산 투자를 알아본다면 축구장 주변을 물색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국인들은 축구에 진심이다. (사람들이 항상 구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10. 대화를 시작할 때 항상 날씨를 언급한다. - 영국에서 날씨만큼 재밌는 현상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나는 주말이면 한인마트에 가서 장을 봤고, 한인교회에 나가 점심에 먹고 남은 반찬을 꼭꼭 싸왔다. 맥주의 맛도 몰랐고, 트렌치코트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옷과 살림살이도 전부 한국에서 가져왔다. 무엇보다, 졸업 후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 주위엔 한국인들이 더 많았다. 런더너라고 하기엔 그저 런던에 사는 사람, 아니 '영국에 사는 한국 사람'정도였다. 그런데 투어를 나가는 순간에는 삶 자체가 영국에 맞춰진 '런더너'로 둔갑했다. 그리고는 손님들에게 환상적인 나라 영국을 소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와, 영국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네요."


나의 설명에 만족한 손님의 말이었다. 나의 답변이 그의 기대에 부응한 것이다. 첫 투어에서 나의 진땀을 빼던 늦깎이 손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을 만큼, 손님들의 질문은 정말 다양했다. 영국 왕실의 역사부터, 사회, 문화, 교육, 최저임금과 물가상승까지. 온갖 분야를 넘나드는 궁금증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뱉어내면 되었으니까. 환상을 깨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인간미 있는 이유를 가져온다. 


"(지금은 왕권이 바뀌었지만) 과연 찰스 왕자는 왕위에 오를 수 있을까요? 

이건 영국인들도 궁금해한답니다."

"영국의 대부분의 미술관과 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예요. 문화를 접할 기회가 항상 열려있죠."

"(2019년 기준) 영국의 최저임금은 한국의 약 두 배 정도 되겠네요."


하지만 영국은  최저임금이 높은 만큼, 인건비가 드는 서비스가 굉장히 비싸다. 외식, 미용, 택시를 포함한 교통비까지. 월세도 만만치 않았다. 가이드를 하며 벌어들인 월급에서 월세와 생활비를 제외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의료비와 약값은 저렴했다. 영국은 공공 의료 보험(National Health Insurance) 제도가 있어, 영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의료비를 지원해 준다. 하지만, 그만큼 시설도 저가였다. 아, 그리고 매번 연착되는 기차와 지하철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이런 뒷 이야기들을 여행 중에 굳이 들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전에 호주로 휴가를 다녀온 직장 상사는 그야말로 '꿈의 나라'를 보고 왔노라고 내게 말했다. 호주인들은 대낮이면 서핑을 나가고, 시급이 높아 생활비 걱정이 없다고 했다. 햇빛, 자연, 파도, 그리고 여유가 공존하는 행복의 나라. 분명 반전은 있을 거다. 그렇지만 그건 여행으로 본 호주가 아니지 않은가.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꿈과 환상이 추억되려면, 민낯을 적나라하게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가이드로서 그 부분을 완벽하게 이해했으며, 실천에 옮겼다 자부했다. 결국 나의 빈틈이 드러나고야 말았지만.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을 둘러본 뒤,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로 향하는 길이었다.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은 1805년 트라팔가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며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 넬슨 장군(Admiral Lord Horatio Nelson)의 기념비와 이를 수호하는 사자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광장에서는 각종 야외 행사, 집회, 콘서트 등이 개최되고 있다.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뒤편에 보이는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왼편) 

"가이드님, 혹시 단트 서점 에코백 알아요?"


단트 서점은 1990년에 제임스 단트(James Daunt)가 설립한 서점이다. 초창기에는 여행 관련 서적만을 판매하다 점차 분야를 넓혀 2010년에는 자체 출판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런던 내 총 9개의 매장이 있으며, 소호(Soho)에 위치한 서점이 본점으로 가장 오래되었다. 단트 서점은 또한, 높게 트인 천장과 양 옆으로 뻗은 책장이 있는 독특한 인테리어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손님이 언급한 서점만의 에코백 역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안타깝게도, 나는 소호와 같은 런던의 번화가를 자주 방문하지 않았고(정확히 말하자면 비싼 교통비와 외식값 탓에 못 간 것이다), 책은 주로 인터넷에서 구매했다. 그러니 그 유명하고 역사 깊은 서점을 알 턱이 없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답했다. 


"아뇨, 저는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러자 손님은, 며칠 전 브라이턴(Brighton)과 스톤헨지(Stone Henge) 투어 중에 만난 가이드에게 추천받은 것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다 아는 건 아니구나?"


당연한 소리였지만, 손님의 말은 이상하게도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다 알지 못하는 게 왜? 그 서점이 도대체 뭐길래? 7년을 생활해도 런더너는 될 수 없는 거였을까. 타지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연기를 하던 '영국에 사는 한국 사람'의 민낯은 그렇게 공개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투어가 마무리된 후, 손님은 소호의 단트 서점으로 향했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 전날 먹다 남은 카레를 데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한 달 뒤 출국이었다. 그간 함께했던 투어가이드와 한인 여행사에 이별을 고했던 때였다. 여행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럽 출장을 온 사촌언니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마지막으로 걸어보는 런던의 시내도 의미가 있었다. '마지막'이 주는 여운이었는지, '일'과 '생활'이라는 이유가 사라져서였는지, 나의 걸음은 여러모로 가벼웠다. 


우리는 소호로 향했다. 나는 시내 곳곳을 둘러보며 새삼스레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가게도 있었나?' '저 골목에는 뭐가 있을까?' '이 작은 공간에도 공원이 있었다니!' 아주 어두워지기 직전인 초저녁, 이제 막 가로등이 켜진 런던의 골목은 떠날 결심이 선 나의 마음을 아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수야, 너 단트 서점 알아?" 

언니의 물음에 나는 단숨에 대답했다.


"응! 거기서 에코백을 꼭 사야 해." 


나는 은색 프린트가 새겨진 검정 에코백과 책까지 사서 나왔다. 과한 소비라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깊게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 꺼내든 에코백은 영국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월급을 아껴가며 전날 남은 음식을 데워먹는 그런 기억이 아니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런던의 거리를 누비던 나의 모습, 쉬는 날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던 순간, 저녁에 친구들과 함께 펍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축구 경기를 보았던 날들, 빨간 2층 버스와 기차를 타고 시내 곳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드나들던 경험, 비가 와도 나의 속도를 유지하며 발걸음을 옮겼던, 환상에 가까운 장면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여태 여행을 하다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해 지나쳐간, '살아보기'보단 '살아남기'로 보내버린 지난 시간들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이 단트 서점의 에코백을 어깨에 메며 그것에게 부탁을 해보았다. 이번에도 놓친 환상의 조각들을 잘 담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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