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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Mar 24. 2024

하늘 위 이별통보

어쩔 수 없지.

여행 전 계획은 필수적이다. 일자와 시간별로 촘촘히 나뉜 꽉 찬 스케줄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지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는 필요하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그곳을 알아야 여행 중 돌발상황에 맞서고, 감동을 최고치로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은가. 비유가 과하다 느껴질 수 있지만, 투어를 진행하는 가이드의 마음가짐도 일부 반영된 것이다. 가이드는 여행객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은 현지인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투어 중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어야 했다. 가이드용 깃발을 들고 손님들을 맞이한 순간, 그 책임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우선 투어 전날 손님들에게 문자를 보내곤 했다.

안녕하세요, 내일 오전 워킹투어를 맡게 된 가이드 유수입니다.
투어 전, 사전 안내 및 주의사항을 전달하고자 연락드립니다.

1. 가벼운 우산이나 우비를 챙겨주세요.
 - 영국의 날씨는 주로 우기입니다. 갑자기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 주시면 좋습니다.

2. 소매치기와 같은 분실의 우려가 있으니, 여권이나 중요한 개인 물품은 숙소에 보관해 주세요.

3. 배낭이나 에코백과 같은 큰 사이즈의 가방보다는 지퍼가 달린 크로스백을 소지해 주세요.
- 크고 지퍼가 없는 가방은 소매치기의 타깃이 될 수 있습니다.

기타 문의사항은 편하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럼 내일 투어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하지만 이런 사전고지가 무색하게도 여행에는 '변수'가 늘 존재한다. 이전의 글로 강조했듯이,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 날이면 투어의 시작이 마냥 활기찰 수 없다. 다행히 준비한 우산으로 비를 막을 수 있겠지만, 그 누가 먹구름 낀 날에 여행하는 걸 선호한단 말인가. 이때 투어를 좌우하는 건 손님의 의중이다. 실제로 날씨 탓에 투어를 중도 포기하거나, 모든 장소를 건너뛰고 곧바로 실내인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국립미술관)로 이동하길 요청하는 손님들이 있었다. 결국 그날 4시간의 투어는 1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예상치 못한 소매치기를 만나기도 했다. 자유시간이 끝날 때 즈음, 놀란 토끼눈으로 내게 달려온 손님이 있었다. 어느 순간 가방이 열려있었고, 환전한 돈을 넣어둔 파우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분명 가방을 꼭 잠그고 몸에 밀착시킨 채 다녔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알고 보니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외국인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카메라와 가방을 잠시 내어 준 순간, 그의 일행이 가방을 뒤져 지갑을 빼간 것이었다.


그래도 수습을 통해 여차저차 넘길 수 있는 변수들이었다. 투어 일정을 바꾸던지, 위로의 말을 건넨다던지. 임기응변은 가능했다. 그런데 가이드로서 절대 극복할 수 없던 하나가 존재했는데, 바로 '감정'이다. 가끔 일행 간 다툼을 하거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좋지 못한 감정으로 투어에 임하는 손님들이 있었다. 단단히 쌓여 올려진 마음의 벽은 사진을 권해도, 회심의 농담을 던져도, 철옹성인 듯 뚫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얼굴은 점점 진땀과 억지웃음으로 뒤덮이고, 두 눈동자는 왜인지 모를 분노로 반응하는 손님의 기분을 살펴가며 투어를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늘 가이드를 맡은 유수라고 합니다."


휴가철이 실감 날 정도로 신혼부부와 커플 여행객이 많던 8월이었다. 이번 투어에도 신혼여행을 온 부부손님, 애인사이로 보이는 커플손님이 함께했다. 그리고 외딴섬처럼 홀로 터덜터덜 걸어오던 마지막 손님 한 명까지 총 5명이 모이게 되었다. 연인들 사이 홀로 남겨진 외딴손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그에게 조금 더 신경을 쓰기로 했다. 곧이어 런던아이(London Eye) 앞에서 주어진 자유시간.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손님, 제가 사진 찍어드릴까요?"

"아유 아닙니다! 저 그냥 혼자 구경할게요."

"아, 네!"

외딴손님은 알콩달콩 서로의 모습을 남기는 여행객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다리 너머 보이는 탬즈강(Thame's River)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곳은 영국 국회 광장 정원(Parliament Square Garden)입니다."

국회광장(Parliament Square)은 영국 국회의사당(웨스트민스터 궁, Palace of Westminster)의 북서쪽 부근을 일컫는다. 광장의 정원(Parliamen Square Garden)에는 윈스턴 처칠, 넬슨 만델라, 마하트마 간디 등, 세계적 인사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거행되는 예식의 동선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회 광장 정원(Parliament Square Garden)으로 가는 길.

외딴손님은 무표정으로 정원의 동상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그는 정말이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나는 왜인지 자꾸만 그의 마음을 풀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초조해졌다. 다음으로 우리는 세인트제임스 공원(St.Jame's Park)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나의 최종병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불행도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가벼워지기 마련이었다. 푸릇푸릇한 잔디와 뛰노는 다람쥐와 백조, 오리, 흑조까지. 북적거리는 도심에서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휴식처였다. 이번에도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외딴손님에게 물었다.


"공원 산책 좋아하시나요? 여기는 동물들이 방목되고 있어서..."

"예, 저 혼자 잠시 걷겠습니다."

그는 눈앞의 다람쥐를 보고는 지나쳤다. 무려 다람쥐를!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았다. 먼발치에서 신혼여행을 온 부부손님이 외딴손님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아마 나처럼 대화를 거부당할게 뻔했다. 세 사람은 잠시 말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이내 부부손님은 그를 지나쳐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다.


자유시간이 끝이 났고, 우린 내셔널 갤러리로 향했다. 고대부터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인상주의 작품을 감상할 예정이었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외딴손님도 나의 지긋지긋한 간섭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는 예상대로 조용히 벽에 걸린 그림들에 살짝살짝 눈길을 주며 이동했다. 공원에서 그에게 대화를 시도한 부부손님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저 사실, 여기 오는 비행기에서 여자친구와 헤어졌어요."라고 그가 말하는 것이다.


내셔널 갤러리의 인상주의 관. 우리는 왼쪽에 마네(Manet), 오른쪽에는 세잔느(Cezanne)의 작품을 두고 외딴손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어느 때보다 집중한 손님들을 발견했다. 물론, 나 또한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무려 유럽이잖아요.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그 긴 여행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요?

뭐, 계획 중에 다툼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서로....


보안 검색대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비행기 탑승까지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아, 이건 제 생각이지만요.

표를 내야 하는데 그때....


그런데 갑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저를 보더니,

'우리 헤어지자.'라고 하더군요."


"와..." 여기저기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지금 여행계획은 어떻게..." 손님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 취소했죠. 그런데 이 투어는 조금 아쉬워서 그냥 나왔어요."


그의 말에 우린 약속이나 한 듯, 응원의 말을 보탰다.

"잘 오셨네요!"

"맞아요! 잘하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허허허" 외딴손님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쩌다 이렇게 첫 영국 여행을 혼자 하게 되었나, 허무하기도 한데....


어쩔 수 없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겨봐야겠어요. 가이드님, 저 혼자 저녁에 뭐 하면 좋을까요?"


나는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밀레니엄 브리지(Millennium Bridge)에 야경을 보러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

런던 밀레니엄 브리지(공식명칭 : London Millennium Footbridge)는 2000년을 맞이하여 완공된 철강 다리이다. 당시 다리의 흔들림이 많아, 사람들은 "Wobbly Bridge (흔들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참고로 2002년에 보수공사를 마쳤다) 밀레니엄 브리지는 세인트 폴 성당(St.Paul's Cathedral),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Tate Modern),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기념하는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으로 이어진다.
밀레니엄 브리지(Millennium Brdige) 위에서 바라본 세인트 폴 성당(St. Paul's Cathedral)

"네, 훌륭하네요. 가보죠." 드디어 외 딴 손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나는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투어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에 그를 끼워 맞추려 한 것이다. 괜한 관심과 오지랖으로 그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해 버린 셈이었다. 각자의 사정은 감당하는 사람만이 그 무게를 알 수 있다는 걸, 당시의 어리숙한 내가 알아챌 리 없었다. 그저 이전에 마주했던 변수 중 하나일 테지, 하는 지레짐작으로 억지로 그의 감정을 끌어올리려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변수는 언제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불쑥 나타나서는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가이드였던 나는 그런 돌발상황에 맞서 싸우기를 택했다. 대비하고, 해결하고, 극복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성취감도 있었지만 좌절과 한계를 경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굴곡도 있는 거였다. 외딴손님이 이별을 통보받은 그날처럼. '어쩔 수 없지.' 대신 우리에겐 굽은 길도 기꺼이 걷게 해주는 여행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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