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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Apr 28. 2024

안녕-2

"저 이제 그만할래요."


2019년 10월. 가이드로 일한 지 약 5개월 만이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예정된 이직은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은, 어떤 이끌림과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침 9시, 런던 웨스트민스터 역(Westminster Station)에서 시작되는 투어를 마치면 오후 4시쯤 된다. 나의 주요 출퇴근 수단은 기차였다. 집이 런던 중심지보다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퇴근하는 런던의 직장인들과 기차에 몸을 싣고 가다 보면 어느덧 6시. 기차역에 내려 집을 향해 약 7분 정도 걸어간다. 죽 내리막으로 걷다가, 오르막을 만나기 직전에 슈퍼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1.5리터짜리 생수를 사들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왜 꼭 오르막 직전에 슈퍼가 있던 걸까. 나는 절대 과소비를 할 수 없었다.


하얀 벽과 어두운 갈색 지붕이 잘 어울리는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 나의 방이 보였다. 나는 매일 방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져 얼굴을 파묻곤 했다. 잠시동안 그 캄캄한 순간에 피로를 맡겼다. 그대로 잠이 들어도 될 만큼,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눈을 감은 채 그날 하루 일과를 돼 새겨본다.


"제가 알아서 볼게요."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


"가이드님, 제대로 교육받으신 거 맞나요?"


가이드의 태도는 시종일관 불량했고, 설명도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아 유익함도 없던 투어였습니다. 기껏 돈 내고 투어 참여했는데, 참 실망스럽네요.


호평들로 채워진 후기들 속에 간혹 보이던 혹평이 있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아쉬움은 늘 마음속 한편에 남는 법이다. 악의가 없어도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것. 이런 말들은 나를 위로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이불속을 파고들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그랬을까?'


영국 북쪽의 작은 시골마을인 요크(York)에서 투자 박람회가 열렸다. 관광업 종사자들 간 투자 상담과 네트워킹을 목적으로, 영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여행업체와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행사장은 수백 개에 달하는 홍보부스로 가득 찼다.


"안녕하세요, 저는 통역을 맡게 된 유수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SNS를 통해 급히 통역 자리를 대신해 줄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나는 곧바로 게시물을 올린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이틀 뒤 요크로 향했다. 행사는 2박 3일 간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온 여행사 직원과 나는 하루 평균 20개 정도의 부스를 오갔다. 부스는 여행상품을 판매하고, 우리는 그것을 사는 역할이었다.


"E-mail us if you're interested! - 관심 있으면 연락 주세요!"

부스에서의 만남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었다. 판매직원들은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내가 통역을 맡은 한국 여행사 직원은 해당 상품에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말했다.


"일단 알겠다고 하세요."

"네? 아, 네! Yes we will!"


당시 박람회에서 본 여행상품은 정말 다양했다. 맨체스터(Manchester)에 있는 미식 투어, 공항에서부터 시작되는 스코틀랜드(Scotland) 버스 투어, 이층 버스에서 즐길 수 있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비틀스(The Beatles)의 흔적을 따라가는 비틀스 투어, 그중 가장 인기 상품은 도보로 런던 시내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워킹 투어(Walking tour)였다. 투어라곤 패키지밖에 모르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업계 종사자에게는 어쩌면 흔한 아이디어였는지도 모르겠다.


"쉬세요. 전 담배 피우러."

"아, 네! 이따 뵙겠습니다."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의 여행사 직원 덕에 나는 간간히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행사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구석에 마련된 쿠키를 집어먹었다. 그러다 그 옆에 커피머신을 발견했다. 쿠키에 커피가 빠질 순 없지. 나는 커피를 담기 위해 종이컵을 찾았다. 왜인지 눈치가 보여 살금살금 움직이던 그때,


"안녕."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덩치가 큰 한국인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숨을 고르며 인사했다.

"혹시 통역 자주 해요?" 남자가 물었다.

"글쎄요, 이번이 처음이긴 한데...." 나는 남자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끝을 흐렸다.

"통역 비슷한 거 해볼래요?"

"네?"

"번호 좀 줘봐요."


나는 홀린 듯이 그에게 연락처를 남겨줬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아까 명함을 다 써서...."

"아, 괜찮습니다."

"내가 조만간 연락할게요. 고마워요."


그는 이내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가 말한 '통역 비슷한 일'이 무엇인지도 묻지 못한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이제껏 만나온 부스의 영업직원이 된 기분이었다. 그의 연락은 기대되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니까.


그로부터 일주일 후, 늦잠을 자던 나는 휴대폰 진동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번에 요크에서 번호 주셨죠?"

"아, 네!"

"괜찮으시면 뉴몰든(New Malden)으로 오실래요? 식사나 하시죠."


뉴몰든(New Malden)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한인타운이다. 가장 큰 첫 번째는 LA 한인타운이다.


전화로 미리 알려준 한인 식당에 도착해 보니, 내게 번호를 물어간 그 남자와 더불어 다른 한국인 직원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해피가이드님, 선배 과장님도 함께.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마침 한식이 필요했던 나에겐 (순댓국을 먹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자를 받았다.

유수 씨 우리 같이 일해봅시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해요!


직무에 관한 설명이나 제대로 된 면접도 없이, 다짜고짜 시작한 가이드 일은 훗날 내게 잊지 못할 수많은 우연적 만남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월급도 같이. 당시 내 앞에 나타난 여행객(손님)은 나를 울고 웃게 만들었다. 모든 걸 되돌리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또 그만큼 손님과 함께한 여행이 주는 감동이 벅찼다.


“가이드님 덕분에 여행이 정말 풍요로워졌어요.”


“좋은 투어 감사합니다!”


“설명이 정말 친절하세요.”


가이드님을 만나 이번 유럽 여행이 더욱 알찼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랬던 내가 일을 관두게 된 이유는, 아마도 다시 한번 우연에 기대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흘러들어온 이 길을 틀어보는 것, 그 끝이 어디일지 운명에 맡겨보는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로 인해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또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영국을 떠나기 전, 무작정 기차를 타고 런던 시내를 걷다 돌아왔다. 그날따라 카메라에 담긴 장면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안녕. 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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