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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Apr 21. 2024

안녕-1

시작

나 임신했어.


갑작스러운 안드레아의 소식에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이 모인 단체 메신저에 알람이 떴다. 사진 속 불룩 튀어나온 그녀의 배는 그저 신기했다.


축하해! 기분이 어때?
많이 힘들어? 몇 개월 됐어?
아이 성별은?
뱃속에 생명이 있다니.... 어쩐지 무섭다!


대학시절 가장 큰 기억은 셰어하우스에서 4명의 친구들과 생활한 경험일 것이다. 나의 하우스메이트들은 각각 바하마, 이탈리아, 쿠웨이트,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왔다. 서로 다른 배경 덕에 우리의 동거는 참 특별했다. 함께 쓰던 부엌은 온갖(5개국) 음식 냄새로 가득했고, 주말에는 가족들과의 통화로 집 전체가 온갖(5개국) 언어로 가득 찼다. 졸업식을 마치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다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안드레아가 엄마가 되었다.


새삼스레 졸업은 무려 7년 전이었고, 우린 모두 사회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한 직장인이 되었다. 쿠웨이트에서 온 다이애나는 대학생 당시 처음 배운 자전거에 푹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 아마추어 선수가 되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주말에는 장거리 사이클 경기에 나가는 비밀스러운 이중 삶을 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온 베르디는 영국에 남아 삽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바하마에서 온 버치는 인테리어회사에, 포르투갈에서 온 안드레아는 명품 매장에 취직을 하였다. 나는 잠시 영국에서 가이드를 하다, 한국으로 돌아가 한 회사의 사무직을 차지했다.


추억을 더듬으며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식당을 검색해 보았다. 학교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이곳의 사장님은 놀랍게도 한국인이었다. 나와 안드레아는 거기서 약 2년 간 일을 했다. 식당 개업부터 시작했던 터라 사장님과의 관계도 상당히 돈독했다. 사장님은 정이 많은 아저씨였다. 다른 직원들 몰래 우리에게 한인 마트에서 사 온 라면과 햇반, 냉동 순대를 챙겨주곤 했다. 일이 한가한 주말 저녁이면 다 같이 모여 수다를 떨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건지, 졸업 전시는 언제인지 등등. 마치 오래 알던 조카를 챙기는 삼촌처럼, 사장님은 항상 안드레아의 미래를 장담하곤 했다.


“유수 씨, 잘 봐. 안드레아는 분명히 영업, 그것도 판매직을 선택하게 될 거야.”


당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대성을 하겠다는 꿈을 가진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안드레아는 매장 매출 1위를 놓치지 않는 우수 직원을 거듭났다(물론 지금은 출산휴가 중이지만). 그녀는 심지어 경쟁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우린 가끔 당시를 회상하며 서로에게 묻곤 했다.


사장님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냥 찍은 건 아니겠지?


대학졸업 후 정들었던 셰어하우스를 떠나 이사를 갔다. 그때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갈 곳에 대한 선택지가 넓지 않았지만, 운이 좋게도 친절한 노부부가 사는 집에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런던이 아닌 서튼(Sutton)이라는 지역의, 기차역에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아주 훌륭한 위치의 집이었다. 방이 너무 비좁은 탓에 싱글 침대와 옷장, 작은 책상을 놓으면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돈을 벌어 더 나은 곳으로 옮기면 그만이었다.


런던은 집값이 워낙 비싼 탓에 시내 중심지의 주거인구가 많지 않다. 대신, 기차와 버스 등의 대중교통이 원활하여 사람들은 주로 교외지역에 거주한다(사람들은 주로 기차를 타고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런던 교외를 방문한다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런던의 번화가나 관광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인 것을 볼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직장이 필요했다. 외국인으로서 취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매일같이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지고 이력서를 내는 건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거절을 당하는 것도 익숙해져 버렸다. 때마침 취업에 성공했다는 안드레아의 소식에, 그녀가 부러우면서도 좌절감에 점점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유수 씨, 잘 지내요? 혹시 시간 괜찮으면 하루정도 식당 일 좀 도와줄 수 있나요?


일식당 사장님의 연락이었다. 사장님은 나와 안드레아가 동네를 떠나기 전부터 새로운 직원 물색에 나섰다. 일손이 끊기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학생은 많지 않았고, 사장님은 결국 영국에 남아있는 나에게 SOS를 보내왔다. 사실상 우리의 마음이 통했던 셈이다. 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네, 그럼요.


오랜만에 만난 사장님은 여전히 반가웠고, 육체적 노동은 잡다한 생각을 접어두기에 딱이었다. 한창 바쁜 시간대를 보낸 뒤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나와 사장님은 홀 한 편의 식탁에 앉아 점심식사를 했다. 간만의 수다를 즐기면서.


"유수 씨,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그럭저럭이요. 사실 취업이 어려워서 늘 똑같아요."

"아마 여기서는 외국인으로 취업 어려울 거예요."

"맞아요. 아, 안드레아는 명품매장 직원이 되었어요."

"정말? 봐요 유수 씨. 제가 말했죠? 안드레아는 판매를 해야 돼."

"그러니까요. 저희도 놀랐어요."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문득 궁금함에 사장님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당연한 듯 답했다.

"딱 보면 알잖아요. 느낌이 왔어요.

안드레아는 사람도 잘 다루고, 사업 수완에 대한 이해도 좋았잖아요."

"그럼, 저는요? 저는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요?"

점이라도 보러 온 듯한 나의 질문에 사장님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유수 씨? 음...

하고 싶은 일 해봐요. 하고 싶은 일을 하려다가, 만나게 되는 일들이 있어요.

난 사실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일본 만화가 좋았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 알고 보니 '만화'보다는 일본 문화에 흥미가 있는 거였더라고. 그 길로 무작정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 일식당에 들어갔다가, 식당 사장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관심 있는 분야가 명백히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걸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어요. 안드레아는 정말 투명했던 거죠.

유수 씨는 아직 안개가 드리워져 있는 거예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전진하다 보면 길이 보여요. 원래 안개가 걷힌 뒤에 길은 더 맑고 또렷하거든요."

 

나는 그 뒤로 여행사에 취직해 가이드로 일을 시작했다. 사장님이 말했던 '끌림'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 나에게 열린 유일한 기회에 더 가까웠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기엔 당장 월세를 낼 돈이 급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장님의 말이 내 머릿속 깊이 심어져 문득문득 떠오르길 바랐다. 무슨 일이든 나의 앞날을 위한 과정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믿음보다는 용기의 문제였던 듯하다. 안갯속을 무작정 걸어 볼 수 있는 용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안드레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가 일했던 ㅇㅇ식당은 그대로인 것 같아.
혹시 사장님께 연락해 봤어? 사장님 말대로 판매직을 맡고 있다고.
아니! 분명 자기 말이 맞지 않았냐고 자랑할게 뻔하잖아.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들은 사장님의 반응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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