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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Apr 14. 2024

성공 사례

여행사 직원

주인공의 이름을 딴 '콜필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화제의 작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 JD 셀린저는,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면서 "잘 쓴 책은, 독서가 마무리되고 나서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게 만든다."라고 말했다(사실 적었다).


여행도 비슷하다. 새로운 땅을 밟아보며 그곳의 삶을 보자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몸과 마음은 눈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피로를 잊고 여행에 빠져든다. 그리고 여행객은 훗날 집으로 돌아가 그 아름다웠던 경험을 주변에 속속히 전할 것이다. 숙소의 침구부터 매일 아침 들렸던 근처 카페의 종업원까지.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게 될 거다. 모든 여행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체로 그것은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도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는 자신만의 모험으로.


"가이드님, 다른 사람들은 주로 어딜 가나요?"


하지만 손님들은 투어를 할 때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했다. 질문의 목적은 조금이라도 확신을 얻기 위함이다. 나의 행보가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지. 그렇다면 그건 최선의 선택일 확률이 높을 테니까. 그래서 현지의 사정을 긴밀히 알고 있고,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다양한 여행객을 지켜보았을 가이드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행의 묘미는 도전이 주는 설렘이 아니냐고?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특히 요즘엔 어딜 가든 SNS와 블로그를 뒤져 후기를 꼼꼼히 따지게 된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낭비하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이드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여행객들의 여행은 비슷비슷하다. 식당, 쇼핑 리스트, 숙소 등등. 사실상 다 거기서 거기다. 심지어 투어 중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정을 죄다 바꾼 손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성공사례였다. 실패와 시행착오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렇담, 가이드 혹은 관광업 종사자가 여행계획을 짜게 되면 어떨까? 완벽한 동선에 관광명소는 놓치지 않고 가성비 넘치는 맛집과 숙소, 절대 후회 없는 쇼핑까지. 그동안 눈과 귀에 담아둔 데이터를 고르고 골라 조합하겠지? 천지지변과 같은 돌발상황이 아닌 이상,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여행이 아닐까 예측해 본다.


"별거 없네요."


손님의 감흥 없는 탄성은 내 마음속 남아있는 일말의 미련도 허용하지 않는 듯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가을공기가 기분 좋은 10월의 어느 날.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어느덧 나의 마지막 투어였다. 내가 맞이한 손님은 단 한 명. 우리의 만남은 시작부터 삐걱거린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투어 가이드 유수입니다.

어쩌다 보니 단독투어를 하게 되셨네요! 운이 좋으세요."

"혼자 여행 와서 사람들 좀 보려고 신청한 건데, 운이 좋긴요."


조금은 낯설지도 모르지만, 단독투어도 장점이 많다. 시간과 동선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투어'보다는 '여행'의 기분을 낼 수 있는 것. 언제든 가이드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 있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전용 사진사(가이드)가 있다는 것! 나의 기대와 다르게 손님에겐 그저 또 다른 외로운 날이었던 듯했다.


주변의 공기가 더 이상 어색함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우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계속해서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잠시 귀찮아하는 듯했지만 대화를 이어나갔다. 여행사 직원이었던 그는 휴가철이 다 지난 지금에서야 여유가 생겼고, 그는 고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럽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여행계획은 지금껏 내가 보았던 모든 관광블로그의 요점을 전부 합쳐 놓은 것 같았다.


"일단 제일 유명한 한인민박에서 지내가다, 여행 마지막날은 탬즈강이 보이는 호텔에서 보낼 거예요.

런던은 하루정도면 다 볼 것 같으니, 다른 날에 옥스퍼드(Oxford)랑 코츠월드(Cotswold),

그다음 날엔 스톤헨지(Stonehenge)랑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 보러 가요.

오늘 저녁엔 뮤지컬도 보러 가죠.

식당은 혼자 먹기도 괜찮고, 관광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으로 리스트 뽑아 뒀고요,

마지막 날에 쇼핑을 하고, 택스 리펀(Tax Refund)도 받을 거예요."


나는 그의 말에 호응했다. "최고의 계획이네요!"

하지만 손님은 이내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근데 그러면 뭐해요. 혼자 와서 재미도 없고,

아침 먹으러 들린 카페는 음식이 형편없었어요.

덕분에 앞으로 갈 식당에 대한 기대치는 확 떨어졌죠.

오늘 투어도 마찬가지고,

내일 일정도 별거 없을 것 같네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하루가 예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의 태도는 시종일관 냉소적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빨간 버스와 검정 택시는 촌스럽고, 사용하는 이가 없는데도 거리 곳곳에 세워진 철 지난 '해리포터 감성'의 공중전화박스는 더욱 촌스러웠다. 저녁을 위해 예매한 뮤지컬 공연은 딱히 관심은 없지만 유명하다는 평을 믿고 억지로 관람하는 것이며, 쇼핑도 귀찮고 돈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건 꼭 사야 해.' 딱지가 붙은 물건은 왜인지 놓치면 손해인 듯한 느낌이지 않은가. 그 외에 영국 여행 중 맞닥뜨릴 수 있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손님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나마저도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손님의 태도로는 여행을 즐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여행사 직원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직업병이었을까? 아니다, 그건 섣부른 판단일지도.


"유럽 여행을 왜 여름에 많이 가는지 알겠네요."

"네?"

"바람도 많이 불고, 날도 금방 흐려지는 게 여행하기 딱 싫잖아요."


우리는 조용히 걸었다.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 세인트제임스 공원도 그를 웃게 만들 수 없었다. 어느덧 트라팔가 광장에 도착했다. 기분 탓인지 그날따라 버스킹과 길거리 공연을 하는 예술인들이 많았다. 나는 머릿속에서 가장 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손님에게 이런 '길거리 감성'은 먹히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런던은 거리의 버스킹을 꽤 열렬히 지향하는 편이다. 런던에서 버스킹을 하고 싶다면, 우선 시에서 주최하는 오디션에 합격해야 한다. 런던시는 오디션 합격자에 한하여 버스킹 면허증을 발급하고, 실력에 따라 버스킹 장소를 고를 수 있는 특권을 준다. 런던의 뮤지션들은 지하철역과 허가된 거리 중 장소를 선정하여 시간에 맞춰 공연을 진행한다. 여행 중 괜찮은 즉석 연주를 듣고 싶다면 런던의 큰 지하철 역을 찾아가 보는 것도 방법이다.
런던 시내 곳곳 버스킹을 하는 뮤지션들

"팔자 참 좋네요." 손님이 허탈한 듯 말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곧바로 다음 장소를 설명했다.


(2024년 기준) 올해로 설립 200주년을 맞이한 영국의 국립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는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아우르는 서유럽의 예술 작품들로 가득하다. 이곳에 있는 약 2,300개의 작품은 주로 귀족 가문의 기부로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그 취지에 맞게 특별전을 제외한 모든 전시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내셔널 갤러리는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인상주의를 아우르는 시대별 작품 컬렉션을 자랑한다.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아레스>,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의 매장>, 벨라케즈의 <비너스의 단장>, 반고흐의 <해바라기>, 그리고 영국의 국민화가로 알려진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가 있다.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분수대에서 바라본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입구(왼쪽)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미술관. 장소의 분위기 탓에 손님의 말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조용히 그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꽤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 반고흐의 이야기에 흥미롭다는 듯 반응했다. 그는 반고흐의 <해바라기>를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땐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가난하기만 했는데,

어떻게 계속 그림을 그렸을까요?" 손님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지금에라도 그의 가치가 인정받으니, 포기하지 않은 보람이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사실, 한량한 인생이었을 거예요." 손님이 이어 말했다.

"돈도 못 버는데 동생에게 빌붙어서 하고 싶은 그림만 고집한 거잖아요."


투어를 끝낼 때였다. 나는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가이드님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이게 본업은 아니실 테고, 여기서 무슨 일 하고 싶으세요?"


나는 최대한 짧게 고민하고 조리 있게 말하려 노력했다.

"맞아요. 사실 오늘이 제 마지막 날이에요. 저는 꿈이 작가예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꿈에 도전해 보려고요. “


그에 비해 손님의 답변은 참 빠르게 튀어나온 것 같았다.

"영어 잘하시던데, 그걸로 한국 대기업 입사하세요.

그게 제일 좋아요. 성공사례죠."


우리는 함께 미술관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소나기가 내렸다. 마침 챙겨 온 우산이 있었다. 나는 호기롭게 우산을 펼치며 손님에게 말했다.

"손님, 어느 쪽으로 가시나요? 제가 역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내가 간과한 건 거센 비바람에 힘없이 나부낄 우산의 상태였다. 대학시절부터 들고 다녔던 나의 낡은 우산은 간신히 두 사람의 정수리를 막아 줄 뿐이었다. 다행히 지하철 역이 근처에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손님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이 우산 못쓰겠네요. 제가 하나 사드릴게요." 손님이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여기서 기차 타고 가면 돼요."

"내릴 때 비가 또 오면 어떡해요. 제가 하나 사드릴게요."


나는 한사코 손님의 호의를 거절하며 덧붙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대신 나중에 좋은 후기 작성 주세요. 여행 잘하시고요."

"오늘 마지막 날이라면서요? 굳이 후기 남기는 게 필요한가요?"


나는 의아한 표정의 손님을 향해 웃어 보이며 답했다.

"네, 아직은 제 근무시간이니까요."


나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역에 도착할 때 즈음, 비는 어느새 그치고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예상대로 금세 그치는 소나기였다. 나는 걸어가며 우산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이 정도면 비바람 한 두어 번은 더 버틸 수 있겠다. 나는 그제야 웃었다.


"이게 내 성공사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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