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아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아려왔다. 방금 전 그와 나눈 대화가 귓가에서 울렸다. 짧은 대화였다. 짧고, 간단하고, 끝이 보이는 말들.
“우리, 여기까지 하자.”
그는 마치 예전부터 준비한 대사를 읊듯 말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라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겨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는 늘 진심이었다.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그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의 감정을 헤아리려 애썼다. 그가 더 편안해지길 바라며 내 자리를 줄이고, 때로는 나 자신을 희생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진심이었던 사람만 바보가 된다.
내가 애쓸수록, 그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관계라는 건 서로의 균형으로 유지되는 것이라는데, 나는 언제나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 많이 움직였다. 그는 가만히 있었고, 그 가만히 있음이 어쩌면 나를 조금씩 더 작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사랑이라서? 그를 잃고 싶지 않아서? 어느 쪽이든 지금은 다 허망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늘 믿었다.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고.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그런데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꾸었던 꿈은 결국 혼자만의 것이었다는 걸. 그는 내 꿈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휴대폰을 꺼내 그의 번호를 바라보았다.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했다. 말은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내 손가락은 느리게 움직였다.
“애틋한 말은 하지 마. 내가 너를 미워할 수 있게, 그냥 떠나줘.”
전송 버튼을 누르기까지 몇 초를 망설였다. 그러나 누른 순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아니, 가벼워지길 바랐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 앉아 있으면 내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더 잘 느껴졌다. 방 안은 고요했지만, 머릿속은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 생각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밤을 잊을 수 없겠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겠지만, 오늘 내가 얼마나 초라했는지, 얼마나 작아졌는지, 그것만은 선명하게 기억날 것 같다.
진심을 다했던 내가 왜 항상 이렇게 남는 걸까. 아무리 곱씹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진심이 모자랐던 걸까, 아니면 나를 잘못된 곳에 쏟아부었던 걸까.
창밖을 보니 가로등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어디로 흔들리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래도 오늘 밤은 이렇게 끝내야겠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나를 미워할 수도, 그를 미워할 수도 없는 채로. 진심을 다한 내가 바보가 되는 밤, 그렇게.